2014. 8. 11-12
2014. 8. 11
선생님,
오늘 아침에는 마음이 조금 더 들떴습니다. 예전부터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이라고 불리는 루이지애나 미술관에 가기로 한 날이거든요. 오래선드 해협 너머로 스웨덴이 바라다 보이는 해안가에 자리 잡은 루이지애나 미술관은 전 세계의 미술애호가들을 불러 모으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루이지애나 미술관은 미술 작품뿐만 아니라 건축물이 자연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요. 건물의 대부분은 단층(1층짜리 건물)으로만 이루어져 있고, 벽의 한 면 전체가 통유리로 되어 있는 데다가,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출입구를 곳곳에 설치해 놓았기 때문이지요. 이런 구조적 특성상 루이지애나 미술관은 미술관의 내부와 외부가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고, 자연이 건축의 일부로 들어와 서로를 껴안고 있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마치 안동 병산서원의 만대루에 올라가 앉았을 때 누각의 기둥과 기둥 사이로 낙동강 건너편의 병산이 마치 병풍에 걸린 그림처럼 건축에 스며드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는 전시실도 있었어요. 어떤 분이 미술관 건물을 설계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연과 문명을 분리하지 않고 이 둘을 관계론적으로 사고하는 동양적 세계관에 익숙한 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습니다. 아무튼 이런 구조적 특징 때문에 관람객들은 미술관 내부의 동선을 따라 계속해서 미술관 안팎을 들락날락하게 됩니다. 외부와 끝임 없이 소통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걸까요? 미술관을 찾은 사람들의 표정이 유달리 천진난만해 보였어요. 마치 소풍을 온 아이들처럼요.
루이지애나 미술관을 보며 학교 건축을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학교도 이처럼 아이들을 끊임없이 자연 그리고 타인과 소통하게 하는 공간이었으면 좋겠어요. 학교 건물이 단층으로 되어 있고, 통유리벽과 정원을 통해 외부의 자연환경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쉬는 시간에 조금의 지체도 없이 친구들과 밖으로 나가 놀 수 있게 출입문을 많이 만든다면 생각만으로도 참 행복한 학교생활이 될 것 같아요. 건축과 공간이 인간의 행동과 정서에 미치는 영향은 참 크다고 생각해요. 무뚝뚝해 보이는 어른들도 관람 도중에 건물 안팎을 들락날락하며 산책을 즐기고, 햇살 좋은 잔디밭에서 여유롭게 낮잠을 자기도 하는데 아이들이 이런 학교에서 생활한다면 얼마나 즐거워할까요?
그리고 오늘 저는 어린이를 위한 미술관 아뜰리에에서 중요한 경험을 했어요. 구석에서 네 명의 아이들이 레고를 가지고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는데요, 아이들이 얼마나 놀이에 몰입을 했던지 제가 가까이 다가가도 모를 정도였어요. 레고 놀이에 열중한 아이들을 보면서 어린이들이란 어떤 존재인지, 아이들의 특성이 어떤 것인지를 직관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직접 무언가를 함으로써 몰입을 경험하고, 그때 가장 잘 배울 수 있다는 사실 말이지요. 무언가 스스로 해봄으로써 배움에 대한 호기심, 흥미, 열정을 유지하고 몰입하게 되는 건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여행도 그런 것 같아요. 단체관광버스나 택시 같이 다른 누군가의 힘을 빌려 훑고 지나간 길은 아주 쉽게 잊히지만, 지도를 들고 직접 더듬어 가며 한 발 한 발 누빈 길은 절대로 잊을 수가 없더군요. 생면부지의 장소에서 직접 길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놓였을 때 비로소 우리의 호기심과 관찰력은 증폭되고 낯선 사회를 깊이 체험하게 되는 법이니까요.
오늘 하루 코펜하겐 중심부를 벗어나 기차를 타고 소풍 가는 기분으로 찾은 루이지애나 미술관에서 뜻하지 않게 학교 건축에 대한 새로운 상상까지 덤으로 안고 돌아오는 제 마음은 이번 주 내내 코펜하겐 전체를 감싸고 있는 재즈 선율처럼 자유롭고 흥겹습니다. 덴마크의 기차표 가격 또한 저로 하여금 상상력을 진땀 나게 발휘하도록 만들었지요. 물론, 그 가격에는 인간의 육체노동을 충분히 존중하고 땀 흘린 만큼 누려야 할 소득을 보장해 주려고 하는 이 사회의 합의가 담겨 있음을 잘 알기에 흔쾌한 마음과 떨리는 두 손으로 저를 루이지애나로 데려다준 타인의 노동에 대한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이 도시는 어떤 예기치 않은 선물을 선사할까요?
2014. 8. 12
선생님,
저는 지금 크리스티아니아에 와 있습니다. 여기가 어디냐구요?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 시내 한가운데예요. 단아한 도심의 자태는 갑자기 어디로 사라지고, 마을 어귀에서부터 장승 비슷한 나무 조각과 건물벽을 잔뜩 뒤덮은 그래피티에다 티벳 불교의 경전이 적힌 천조각까지 휘날리는 모양새가 완전히 딴 세상에 왔음을 실감 나게 하네요. 크리스티아니아와 코펜하겐 시내의 경계에 있는 마을 어귀에 당당하게도 이런 팻말을 붙여 놓았어요. ‘Now you are entering EU (지금 당신은 유럽연합으로 들어갑니다)’. 물론 이들이 어떤 국가에도 속하지 않는 자치 공동체를 지향한다고 해서 외부에 폐쇄적인 것은 아니에요. 이곳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요. 비폭력, 무기와 강한 마약 금지, 자동차 사용 금지, 쓰레기 분리배출 등과 같은 최소한의 규칙만 지킨다면요. 그 외에는 모든 것이 자유입니다. 이곳은 주민들뿐만 아니라 많은 코펜하겐 시민들의 놀이터인가 봐요. 재즈나 락공연을 하기도 하고, 스케이트보드를 타러 크리스티아니아를 찾아오는 시민들을 보았어요.
물론 오늘의 크리스티아니아가 있기까지 모든 과정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지요. 코펜하겐의 비싼 집세를 감당하기 버거운 젊은이들과 자유로우며 공동체적인 삶을 원하는 이들이 옛 해군기지를 점령하여 살기 시작하면서 시작된 크리스티아니아가 1970년대 초 공동체 실험을 시작한 이래, 우파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이곳을 접수하려는 공권력의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다고 해요. 이곳에서 중요한 일은 모든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토론과 합의에 의해 결정되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자치 규칙이 때때로 국가의 행정, 사법, 경찰 권력을 대체하기도 했다고 하니, 공권력에 의해 완전히 지배당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는 이 당돌한 자유인들이 우파 정부에게는 참 눈엣가시였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크리스티아니아가 지향하는 가치는 평화, 평등, 생태, 자유, 민주주의, 자치, 다양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 금지 등이라고 해요. 그런데 크리스티아니아 주민들이 외부 사람들과 연대하는 방식은 결코 무겁지 않아 보여요. 그건 아마도 창의적인 문화 때문인 것 같아요. 제일 유명한 건 바로 크리스티아니아 자전거예요. 환경을 위해 교통수단으로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기로 한 크리스티아니아 주민들이 가벼운 짐을 나를 목적으로 일명 ‘크리스티아니아 자전거’를 만들게 되었는데요, 1978년에 처음 만들어진 이 자전거는 이제 코펜하겐의 아이콘이 되었어요. 코펜하겐 시내에서는 자전거 앞에 부착된 커다란 짐칸에 아이들을 실은 채 크리스티아니아 자전거를 타고 가는 시민들을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답니다. 저도 신기한 마음에 크리스티아니아 주민에게 양해를 구하고 시승을 해보았죠.
그리고 크리스티아니아에 가면 덴마크 정부가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마리화나를 거래하고 피우는 모습을 볼 수 있지요. 처음엔 마리화나 밀거래를 단속하기 위해 나온 경찰에 협조했지만 경찰들이 현장 급습에 이어 주민과 관광객들을 상대로 한 몸수색을 단행하자 크리스티아니아 공동체는 이 문제를 자신들이 직접 해결하기로 결정합니다. 회의를 열어 마약 중독 치료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약한 마약으로 분류되는 마리화나는 허용하지만, 그보다 강한 마약은 금지하기로 자체 규정을 정한 것이죠. 그리고 마리화나 문제에 대한 공청회를 크리스티아니아와 국회 건물에서 열고 여러 차례 공론화를 위한 토론을 벌였다고 하는 대목에서 덴마크 사회의 분위기를 짐작해 봅니다.** 마리화나 사용 금지 혹은 허용이라는 결론 자체보다도, 시민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토론하고,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 사회의 분위기가 저로서는 부러웠어요. 또, 40여 년간 자칭 ‘패배자들의 천국’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실험’을 때로는 못마땅한 눈길로, 때로는 관용과 협상을 통해 어쨌든 그들을 부정하지 않고 지켜봐 준 덴마크 사회의 태도도 부러웠지요.
그동안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지금도 위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의사를 결정하는 과정에서부터 결정한 내용을 실천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주민 자치에 의한 합의 민주주의라는 사회적 실험을 이어나가고 있는 크리스티아니아를 보면서 민주적인 학교를 잠시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학교라는 곳이 나와 다른 것을 서로 인정할 수 있고,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려 문화를 공유하고, 다수결이라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편리함을 넘어 작은 것이라도 토론과 합의를 통해 결정하고 실천하는 장소가 될 수 있을까요.
숙소로 돌아가는 길, 크리스티아니아와 코펜하겐 시내 사이의 경계를 알리는 팻말에 다다라 잠시 멈추어 선 다음 고개를 돌려 왔던 길을 다시 바라봅니다. 제가 나중에 코펜하겐을 찾았을 때에도 크리스티아니아의 대담하고 창의적인 공동체 실험과 이들의 든든한 지원세력인 코펜하겐 시민들과의 연대를 계속 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만 발길을 돌립니다.
코펜하겐에서,
J 드림
* 크리스티아니아 가이드(영문, 2004 개정판) 3쪽 참고.
https://www.christiania.org/info/christiania-guide-english/
** 크리스티아니아 가이드(영문, 2004 개정판) 5-9쪽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