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곤 옥상 2

by starry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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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카타의 거리를 집 삼아 사람들을 촬영하는 사람이 발 딛고 선 위치는 어디여야 하는지 묻던 아저씨의 질문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내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아저씨가 세상을 떠나고 몇 해 후 초보 연구자가 되어 현장연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2016년 핀란드에서 교육학을 공부하고 있었던 나는 박사과정 논문을 쓰기 위해 당시 내가 살고 있던 뚜르꾸의 한 학교에서 현장연구를 진행했다. 그리고 여름이 다가올 무렵 서울에서 두 달간 머무르며 현장연구를 하기 위해 한국에 도착했다. 인천공항에 도착한 나를 제일 먼저 맞이한 것은 탑승교에 발을 내딛자마자 피부에 묵직하고 끈끈하게 들러붙었던 공기의 촉감이었는데, 한국을 떠나 있었던 몇 년 동안 낯설어져 버린 그 감각은 현장 연구를 앞두고 있었던 내게 익숙한 일상을 낯설게 바라보는 법을 슬며시 알려주는 듯했다. 유학을 가기 전 매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일터였던 학교가 약간은 낯설고 어색했다. 나는 더 이상 교사가 아니라 청소년들의 학교생활을 들여다보는 연구자이자 핀란드에서 살다가 잠시 서울에 머물게 된 여행자였다. 한국의 교사들은 이런 나를 아이들에게 대뜸 선생님으로 소개했다. 나는 십 대 초반의 청소년들에게 위협적이지 않은 관찰자로 받아들여지기 위해 매일같이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학교에 갔다. 점심시간이면 아이들 사이에 끼어 그들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를 들은 후 관찰 일지에 풀어놓기를 반복했으며,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악이 무엇인지 물어본 후 이동 시간에 듣곤 했다. 다행히 그들은 나를 위협적인 어른으로 생각하진 않는 듯했다. 교사가 되어 교실 앞에서 학생들을 바라볼 때와 관찰 일지를 손에 들고 교실 뒤에 앉아 학생들을 바라보는 때의 교실 풍경은 달랐다. 시간표와 교실, 복도로 대표되는 직선의 규율 속에서도 아이들은 은밀하게 때로는 드러내놓고 나름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학교생활 중에서도 관찰의 백미는 단연 점심시간이었다. 공간과 시간 그리고 아이들의 신체를 규율하던 질서가 잠시 느슨해지는 이 시간이면 아이들의 몸이 생동하는 세계가 펼쳐지곤 했기 때문이었다. 학교에서는 아침마다 학생들의 휴대폰을 수거해서 교무실에 모아놓았다가 마칠 때 돌려주고 있었는데 아이들 중 한 명은 휴대폰 두 대를 들고 와 수거할 때 한 대만 내놓고 나머지 한 대를 가지고 있다가 점심시간에 몰래 꺼내곤 했다. 그 휴대폰으로 옆 학교의 남학생과 메시지를 주고받는가 하면 피부 메이크업과 립 틴트로 단장한 서로의 얼굴을 찍어주고 걸그룹 같은 포즈로 단체 사진도 찍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한편, 내 연구에 참여한 한국의 선생님들은 처음엔 뒤에서 뭔가를 공책에 끄적이는 연구자가 부담스러운 눈치였지만 차츰 내 존재에 적응해 나갔다. 때로 그들은 학생들을 상담하느라 바쁜 자신을 대신해 학부모가 맡겨 놓고 간 준비물을 수업이 진행되는 교실에 갖다 줄 수 있겠냐는 등의 부탁을 해오기도 했다. 교사와 학생들의 일상에 내가 한발 들이는 것을 인정해 주는 듯한 작은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교사들이 급식실에서 학생들이 점심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내게 다가와 같이 식사를 하자고 권하며 교사용 테이블이 있는 작은 방으로 나를 부를 때는 난감했다. 나는 점심시간이 제공한 유연한 시공간의 틈새에서 아이들만의 세계가 펼쳐지는 장면을 관찰하려 하는 연구자이기도 했지만 연거푸 거절당해 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던 현장 연구를 시작할 수 있게 해 주고 그들의 일상에 나를 받아들여준 선생님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야 하는 참여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현장 연구를 하는 내내 참여자와 관찰자라는 두 역할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느껴야 했던 긴장과 갈등은 초보 연구자였던 내가 감당하기 벅찬 과제였는데 그때의 심정을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핀란드 학교에선 (연구에 응해주신) 선생님들께서 내 점심식사에 대해 하등 신경을 쓰시지 않아서 편했다. 그런데 여기선 내 점심 문제를 신경 쓰시는 분들이 많다. ** 샘도 그리고 ** 샘도 점심을 교직원 식당에서 같이 먹자고 권하셨다. 그때마다 찰나의 순간에서 고민한다. 고맙지만 제안대로 하지 않고 급식실에서 아이들과 같이 밥을 먹거나 아예 밥을 먹지 않고 급식실 풍경을 관찰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담임샘들의 호의를 받아들여 교직원 식당에서 밥을 먹고 선생님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한국문화에 맞게 행동할 것인가. 오늘 나는 교직원 식당에서 밥을 새 모이만큼 먹고 나왔다. 문화를 넘나드는 연구자가 되기란 참 어렵다.


이처럼 현장 연구를 하며 했던 고민들은 성규 아저씨가 제작 노트에 적었던 생각들과 닮아 있었다. 콜카타 서더 스트리트의 인력거꾼 샬림과 후세인, 마노즈의 일상을 함께 하며 어디까지 관찰하고 어디까지 참여할 것인지 매 순간 고민을 거듭했을 그 역시 제작노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관찰자로 남아야 하건만, 이들의 삶에 너무 깊이 개입을 함으로써, 인력거꾼들에게 오히려 의타심만 부추긴 결과를 낳고 있다. 이용규 작가의 말을 그렇게 상기했는데도 말이다. “부탁이 있어요. 이번 촬영은 제발 불우이웃 돕기가 되어선 안 돼요.” […] 어설픈 따뜻함은 촬영의 장애가 될 뿐이다. […] 샬림은 현재 가족들 사이에서 환자가 속출하는 바람에 거의 넋을 놓고 있는 상태다. […] 캘커타로 가족을 데리고 왔다. 하지만 그는 노숙자다. 합숙소가 있지만, 요즘 같은 우기로 인해, 그 좁고 좁은 방엔 이미 20여 명의 인력거꾼들이 잔다. 그곳에서 가족을 재울 수 없는 상황이다. 물론 촬영팀의 지나친 개입과 배려로 인해, 다큐를 촬영하겠다는 선과제보다, 샬림에 대한 우정으로 촬영은 이미 리얼리즘을 많이 잃은 상태다. 이것을 이제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인류학의 시선으로 접근하는 현장 연구와 다큐멘터리 촬영은 현장에 머무는 내내 관찰자와 참여자라는 정체성 사이를 오가며 절묘한 균형을 잡아야 하는 긴장의 연속인 것 같다. 돌이켜보면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왔던, 그래서 한 번도 누군가를 제대로 관찰해 본 적 없었던 내게 현장연구는 고강도의 정신력과 체력을 요구하는 여행이었다. 비대해진 자아로 우글거리던 옹졸한 세계를 벗어나 타자의 삶을 관찰하고 조심스럽게 그들의 세계에 한 발 한 발 들여놓으며 서로에게 스며들 듯 영향을 주고받았던 순간들이 나를 키웠던 특별한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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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곳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지고 여행이 비일상과 일상의 경계를 넘나들기 시작하면서 여행자는 의도하든 의도치 않든 다른 사회를 연구하는 인류학자의 눈을 갖기 시작한다. 돌아갈 비행기표를 찢어버리고 파라곤 호텔의 도미토리를 집 삼아 아침이면 마더하우스를 가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짜이(인도식 밀크티) 가게 사장과 수다를 떨면서 인도를 만나게 되는 여행자들처럼 말이다. 인류학자 로버트 고든은 그의 저서 『인류학자처럼 여행하기』에서 인류학자의 시선을 지닌 여행자는 훌륭한 이야기꾼이라고 말한다. 그는 비행기를 타고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빠르게 이동을 거듭하기보다 가급적 한 곳에 오래 머물며 발로 걸어 다니면서 우연한 상황과 조우할 것, 그리고 바삐 스쳐갈 때는 결코 눈에 띄지 않는 사람들을 찬찬히 찾아내볼 것을 권한다.** 성규 아저씨가 샬림을 만나 <오래된 인력거>를 촬영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우연과 마주한 순간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느 날처럼 깔리 가트에서 봉사를 하고 있었던 성규 아저씨는 죽음을 앞둔 환자들 가운데 광기에 가까운 발작을 일으키며 심한 헛소리를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러던 중 그에게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해 그의 말을 녹음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는 심한 비하르 지방 사투리를 쓰고 있었고 주변의 콜카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마침 성규 아저씨를 깔리 가트까지 데려다준 인력거꾼 샬림이 비하르 출신이어서 그 환자의 말을 표준 힌디어로 통역해 주었고, 비하르에서 대대적인 학살이 자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성규 감독은 그렇게 해서 1999년 카스트와 빈부격차, 부패한 정치가 묘하게 얽히고 충돌하며 일어난 비하르의 참극을 다큐멘터리로 담을 수 있었고, 샬림과 친구가 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서더 스트리트의 인력거꾼을 주인공으로 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게 된다.*** 인력거꾼은 세상이라는 풍경화 속 그림자처럼, 또는 드러나지 않는 배경처럼 묵묵히 그 풍경화를 채우고 있지만 공식적인 정보나 통계가 절대 보여줄 수 없는 의미 있는 삶의 장면과 그가 발 딛고 살아가는 적나라한 현실로 다큐멘터리 감독과 연구자를, 그리고 여행자를 안내하는 사람이다. 이성규 감독은 서더 스트리트를 무대로 살아가는 인력거꾼들과 천민들에게 받아들여지고자 했으며, 나는 학교의 청소년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 애썼다. 이렇게 현지인들의 연결망을 타고 그 사회를 조금씩 알아가다 보면 내가 내부인으로 살아가며 당연하게 누리던 권력과 혜택은 쓸모가 없어졌으며 현지인의 도움에 기대어야 하는 연약한 외부인이라는 존재가 되었음을 자각하고 겸손해지게 된다. 작가 김영하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다큐멘터리 촬영과 현장 연구, 그리고) 여행을 통해 섬바디에서 노바디가 되는 법을, 자기중심주의가 만들어 낸 자만을 떨치고 아무것도 아닌 자의 겸허함과 유연함이 담긴 참여관찰자의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낯선 곳에서 비로소 현지인들에게 받아들여졌을 때 찾아오는 안도감에 매료된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행장을 꾸리거나 다음 여행을 상상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2016년 현장연구를 마친 후 내게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인류학자의 시선으로 일상을 여행하기. 고든의 조언대로 바삐 스쳐갈 때는 결코 눈에 띄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내려고 노력하기. 식당에서 서빙을 하는 종업원의 말투에 귀 기울이며 그녀의 고향이 어디일지 짐작해 본다. 혼자 식당에 찾아와 추어탕 한 그릇을 앞에 놓고 소주를 마시는 남자의 턱에 돋아난 은회색 수염과 이마에 깊게 패인 주름을 본다. 촛불집회에서 추위를 피해 난로를 둘러싸고 언 손을 녹이고 있는 사람들, 기름때가 낀 외투에 다소 피곤한 기색이지만 눈빛만은 형형한 사람들을 본다. 고흐의 그림에서 어두운 조명 아래 감자를 먹는 사람들 같기도 하다. 이 세상이 주목하는 자리에 있지 않지만 내 삶도 충분히 의미 있다고 나직하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는 것 같다.


마더 하우스에서 주는 짜이와 바나나로 아침을, 저녁엔 미지근한 맥주 한 병을, 그리고 백 루피짜리 도미토리 침대에 몸을 누이는 것으로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하다 보면 어느새 동지애가 싹트곤 했던 파라곤 옥상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런 여행을 다시 할 수 있을까? 흘러내리는 땀으로 등 뒤가 금세 젖어버리는 2025년 팔월의 골목길을 걸으며 서더 스트리트를 떠올려본다. 2003년의 내가 나타나 숙소 뒷골목을 걸어 마더 하우스로 향하는 꿈을 더 이상 꾸지 않는 2025년의 내게 안부를 묻는다. 계속 걷는다. 손수레에 가득 실은 종이 상자를 고무줄로 동여매고 핏줄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팔뚝과 군살 하나 없이 가냘픈 등짝에 의지해 오르막길을 오르는 할아버지와 뒤에서 수레를 밀어주는 중년 남자를 지켜본다. 샬림과 성규 아저씨가 흐릿하게 겹쳐 보인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다큐멘터리스트였던 그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 <오래된 인력거> 현장 연출 노트 가운데 |작성자 안테바신 https://blog.naver.com/report25/150068880833

** 로버트 고든. 2002. 인류학자처럼 여행하기. 유지연 옮김. 펜타그램. 309-312쪽 참고.

*** 타자의 고통을 본다는 것|작성자 안테바신 https://blog.naver.com/report25/150097324827

**** 김영하. 2019. 여행의 이유. 문학동네. 151-185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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