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00년의 나는 지금보다 겁이 없었다. 젊음과 무지에서 비롯된 용기로 충전되어 있었던 나는 네팔 카트만두의 타밀 거리에서 티베트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선물로 줄 요량으로 달라이 라마의 사진을 구입해서 책 사이사이에 찔러 넣었다. 국경을 통과해서 중국 영토(티베트)로 들어서자 국경수비대가 소지품을 검사하긴 했지만 다행히 책을 세세히 넘겨보진 않았다. 우정공로(friendship highway)라고 불리는 길을 닷새 동안 달렸다. 비포장도로에서 올라오는 흙먼지를 온몸에 흠씬 뒤집어써가며 숙소에 도착하면 샤워는커녕 세탁한 지 삼 년은 족히 지난 듯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해야 했다. 말이 숙소였지 해발 사천 미터가 넘는 고지대를 오가는 여행객들을 위해 설치해 놓은 텐트촌이었다. 하지만 수도 라싸에 도착하면 불심 깊은 티베트 현지인들에게 책에 고이 감추어 들고 온 달라이 라마의 사진을 전해주리라는 생각을 하며 고릿한 이불 냄새를 견딜 수 있었다. 숙소 바깥에는 화장실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는데 천장이 없었다. 우정공로를 여행하다 보면 천장이 뻥 뚫린 화장실에서 쏟아지는 은하수를 볼 수 있다는 글을 책에서 읽은 게 생각났다. 고소증이 찾아왔던 저녁, 나는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었다.
우주인처럼 걷다가 땅바닥에 먹은 것을 게워내고 밤하늘을 쳐다보니 초승달과 점점이 박힌 별들이 은은한 실크스카프처럼 걸려 있었다.
그때는 이것이야말로 이 고통스럽고 낭만적인 여정을 묘사할 한줄기 서사가 될 거라고 여겼었나 보다.
라싸에 도착한 나는 달라이 라마의 사진을 들고 조캉 사원 앞에 있는 광장으로 갔다. 티베트 각지에서 모여든 순례자들과 관광객들로 붐비는 그곳엔 사복을 입은 중국 공안들도 빼곡하게 깔려 있었다. 티베트 사람들에게 “따시델레!”라고 인사를 건넬 순 있었지만 공안의 눈을 피해 그들에게 달라이 라마의 사진을 건넬 수는 없었다. 바코르 광장을 벗어나 걷던 나는 슈퍼마켓으로 갔다. 진열대 위에 놓인 비달사순 샴푸가 눈에 들어왔다.
'이럴 수가.'
내가 아는 그 비달 사순 샴푸가 맞나 싶어 다시 보니 맞았다. 짙은 자주색 통에 비달 사순이라는 로고가 영어로 큼직하게 적혀 있었다. 심지어 그 옆에는 팬틴 샴푸도 있었다. 전 세계로 팔려나가는 제품들인데도 티베트의 수도 라싸 시내에서 마주친 순간 나는 마치 거기 있어서는 안 될 어떤 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찰랑거리는 머릿결이 그려진 그림과 로고가 조캉 사원 앞에서 오체투지를 하거나 마니차를 돌리고 있는 티베트 순례자들의 모습을 저만치 밀어내고 있었다. 한국의 동네 슈퍼에서도, 인도 뭄바이의 대형 슈퍼마켓에서도 아무런 놀라움을 안겨주지 않았던 비달사순과 팬틴 샴푸가 왜 그렇게 충격으로 다가왔을까. 지구인들의 생활양식이 맥도널드 햄버거처럼 점점 같아진다 해도, 티베트만큼은 전 세계를 시장으로 포섭하는 저 거대한 자본주의의 물결에서 한 발짝 벗어나 현대인에게 안식을 제공하는 고향이자 신비한 과거로 남아주길 바랐던 내 욕망이 빚어낸 환상이 샴푸통 앞에서 일순간 흔들렸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저녁이면 어김없이 자본주의의 환상적인 화학식으로 생산된 제품으로 머리 감는 일을 멈추지 못할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라싸는 급격하게 변하고 있었고, 나는 아직 변하지 않은 것들을 찾아 나섰다.
2
그 해 나는 순수한 삶의 원형에 대해 여전히 해갈되지 못한 마음과 나누어주지 못한 사진을 움켜쥐고 중국 윈난 지방을 여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동쪽 히말라야에 접해있어 설산이 보이는 리장에서도 일곱 시간 동안 아찔한 산길을 차로 곡예하듯 들어가야 겨우 닿을 수 있는 곳에 모계사회의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착하니 해발 2700미터 높이에 호수가 사뿐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곳 사람들은 루구호를 앞마당 삼아, 그리고 호수를 에워싸고 있는 산자락을 뒤뜰 삼아 살아가고 있었다. 이 마을이 해외 언론에 의해 알려지게 되면서 그 험한 곳까지 찾아오는 여행객들이 조금씩 늘고 있었다. 나는 마을에 하나 있는 여관 대신 한 가족의 집에서 묵기로 했다. 집은 1층을 마구간으로 쓰고 2층에 침실이 있는 구조였는데 밤마다 다리를 벅벅 긁어대면서도 마구간에서부터 올라온 빈대에 물리고 있는 줄도 몰랐다. 그곳엔 따로 화장실과 수도 시설이 없었다. 아침마다 집 바로 뒤에 있는 언덕에 올라가 볼일을 봤다. 그리고 옷을 다 벗고 호수에 들어가 몸을 씻었다. 처음엔 좌변기가 있는 화장실과 수도꼭지가 생각났지만, 며칠 지나니 햇살을 맞으며 볼일을 보는 시간과 누가 보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조차 벗어버리고 호수에 들어가 물이 몸을 감싸는 느낌을 즐기게 되었다. 라마교 문화권인 그곳에서는 집집마다 부엌 겸 거실에 달라이 라마의 사진이 들어간 액자를 정성스럽게 모셔놓고 있었다. 그곳에서 드디어 카트만두에서부터 들고 온 달라이 라마 엽서를 꺼내어 집안의 가장 어른인 할머니께 드렸다. 어느새 나는 여행자가 아닌 체류자-참여관찰자의 정체성을 욕망하고 있었다. 고작 일주일을 머무는 동안 옥수수밭에 따라가 잡초를 뽑고 그들과 함께 두 시간을 걸어 장을 보러 가곤 했다.
가족 중에는 내 나이 또래인 할머니의 손자 A가 있었다. 그의 방에 놓인 침대 머리맡 위로 일본과 중국 아이돌 스타들의 사진이 빼곡하게 붙어 있었다. 그는 쿤밍이나 청두 같은 대도시로 나가 돈을 벌고 싶어 했다. 이 루구호에서 유일하게 다바(무당)*의 명맥을 잇고 있는 최후의 샤먼 다파루뤄의 아들인 루뤄즈바 역시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인생, 그러니까 ‘선글라스를 쓰고 둥펑 차를 몰게 되면 그거야말로 최고’인 삶을 꿈꾸었던 것처럼.**
A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나는 자동차와 비행기를 타고 세계 곳곳을 다니겠지만, 너는 이곳에서 말을 몰고 외삼촌처럼 조카들을 돌보며 여인을 소유하지 않는 삶을 살라고 말할 순 없었다. 하지만 이곳의 자연과 문화가 소중하니 지켜야 한다는 외부인의 언어가 입가에 여전히 맴돌고 있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루구호 사람들을 마음에 묻어놓고만 지냈다. 그러다가 여행자들이 쓴 블로그와 유튜브에 올라온 동영상을 떨리는 마음으로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동안 그곳엔 샤워를 할 수 있고 전기를 쓸 수 있는 여행자용 숙소가 여러 채 지어졌고, 꺼무산 정상으로 여행객을 태워다 주는 리프트가 설치되어 있었다. 현지인의 집 마당에서 주변 마을의 젊은 남녀가 모여 둥글게 원을 그리며 마음에 드는 상대와 눈빛을 교환하던 춤판은 이제 번듯하게 지어진 회관으로 장소를 옮겨 성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루구호 일대를 둘러보는 패키지 투어 상품도 생겼다. 이제 이곳 사람들은 더 이상 물고기를 잡거나 밭일을 하지 않고 관광업에 의존해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들의 일상을 관광 상품으로 전시하고 판매하는 일에 제법 능숙해졌을지도 모른다. ‘순수하지 않다’, ‘돈을 밝힌다’, ‘이제 완전히 관광지 다됐다’는 소리를 들을 런지도 모른다.
A는 루구호를 떠나 대도시로 갔을 것이다. 그곳에 찾아와 그들의 생활을 잠시 엿보는 동안 적지 않은 돈을 쓰고 다시 떠나는 사람들을 보며 그도 유동하는 삶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돈의 위력에 매료되었을 것 같다. 결국 나 같은 여행자들과 자본이 그들의 평온했던 일상을 조금씩 흔들어놓기 시작했고, 결국 젊은 사람들로 하여금 고향을 떠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여행자인 내가 정작 그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슬프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이, 그들만은 현대인의 ‘순수한 고향’으로 남아주길 바라는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한 내가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변화를 종용하는 세상 속에서 어떤 삶을 살지 결정할 권리가 그들에게도 있을 텐데, 마치 시간이 정지한 민속촌에 붙박여 있는 밀랍 인형들을 대하듯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오만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아니면 그 슬픔은 중국의 소수민족인 그들이 세계화와 자본주의의 흐름 속에 제 빛깔로 빚어온 삶의 방식과 문화를 내어주면서 불안정한 관광업에 종사하거나 대도시의 하류 노동자로 흘러 들어가게 될 것을 염려하는 여행자의 안타까운 마음이었을까.
어설프게 인류학자 흉내를 내다가 떠나온 외부인의 시선이 아닌 당사자의 심경을 전하는 것이 좋겠다. 모소족 마을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다바 문화를 경험하며 성장한 인문학자 라무 가투싸는 이 문화가 사라져 가는 것을 지켜보는 늙은 무당의 탄식과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쓰고 있다.
늙은 무당은 이렇게 말했다.
“문화혁명으로 모든 것이 철저하게 파괴되었던 그 시절에도 나는 몰래 (다바교 의례) 연습을 했어.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려 했지. 하지만 지금은 …… 아!”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바 문화의 운명을 생각했고, 그것을 구할 방법을 생각했다. […] 아버지에서 아들로, 외삼촌에서 조카로 전승되어 온 이 문화는 이제 공중에서 흔들리는 가느다란 거미줄처럼, 혹은 깜박이는 별빛처럼 희미해져 아주 미세한 외부문화의 바람에도 스러질 운명에 처했다. […] 만일 정말 이것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바로 살아 있는 박물관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고고학으로도 그것을 고증해 낼 수 없다. 그것은 땅 밑에 묻혀 있는 유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핏줄과 눈물, 숨결과 영혼으로 이어져 온 무형의 보물이기 때문이다..****
(2편으로 이어짐)
* 다바교는 모소족이 본래 가졌던 전통종교이다. 다바는 다바교의 종교의례를 행하는 샤먼(무당)을 의미한다. 1276년 무렵에 티베트 불교가 들어오면서부터 루구호 지역에 다바교와 라마교가 공존하게 되었고, 라마교 역시 티베트 불교의 원래 모습과는 다르게 변했다. 장샤오쑹, 류이, 허핀정, 라무 가투싸. 2011. 중국 소수민족의 눈물. 김선자 옮김. 안티쿠스. 86쪽.
** 같은 책. 67쪽.
***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가 처음 사용한 용어로 서양이 동양(비서구권) 세계에 대해 동경, 환상, 무시, 혐오 등의 형태로 갖게 되는 권위 있고 일반화된 사고의 틀을 뜻한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시대가 끝난 지금도 여전히 힘 있는 ‘자아’가 힘없는 ‘타자’를 규정할 때 흔히 작동하는 생각과 감정의 틀로써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자아는 타자를 이분법적으로, 즉 자신의 반대 이미지로 묘사하게 된다. Said, E. (1978) 2014. 오리엔탈리즘. 박홍규 옮김 (개정증보판). 교보문고. 48-58, 350-359, 625-628쪽; 윤정현. 2024. 핀란드와 한국 그 사이 어딘가. 25쪽.
**** 장샤오쑹, 류이, 허핀정, 라무 가투싸. 2011. 중국 소수민족의 눈물. 김선자 옮김. 안티쿠스. 63, 70,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