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모소족의 마을에서 체류자가 되기를 소망했던 나의 바람은 여러 해가 흐른 뒤 히말라야 동쪽 끝자락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북유럽의 핀란드에서 현실이 되었다. 2010년대 초반 나는 핀란드의 한 대학에서 교육학을 공부하는 유학생이었다. 열다섯 살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에서 핀란드가 꾸준히 상위권을 차지하면서 학교와 교육기관은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방문단의 ‘메카’가 되었고, 방문단은 ‘성지순례객’으로 불렸다. 물론 한국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교사, 교육행정가, 정치인, 언론인 등으로 꾸려진 여러 방문단들이 핀란드를 비롯한 북유럽 국가의 교육 현장을 직접 보기 위해 찾아왔고 나는 그들의 일정에 합류하게 되었다. 나로서는 그것이 여행이라기보다 견학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한국인 방문단이 여행하는 모습을 삼인칭 관찰자의 시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매일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빼곡하게 짜인 일정을 소화하고 나면 지칠 법한데도 그들은 매일 밤마다 호텔방에 모여 대용량 팩와인을 마셔가며 여행자의 설렘과 흥분, 궁금증과 기대를 쏟아냈다. 그리고 내가 핀란드에서 경험한 것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오곤 했다. 어떤 방문단은 일정 중에 핀란드 교육에 대해서 발표해 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발표를 하던 중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핀란드는 의무교육이라 할 수 있는 초중등교육, 그러니까 기초교육 단계에서 교육의 공공성을 강조하고 있죠. 다양한 교육복지가 촘촘하게 학생들을 지원하면서 한 아이도 놓치지 않는 교육을 지향하고 있어요. 그런데 고등교육을 살펴보면요, 1990년대부터 교육정책이 자본주의 경쟁력 강화 논리에 휘둘리면서-
갑자기 탐방단 중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발표를 막아섰다.
“선생님, 잠깐만요. 핀란드 교육이 신자유주의 정책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건 사실이 아니에요. 핀란드 교육은 신자유주의라는 세계적인 흐름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오면서 피사(국제학업성취도평가) 최상위권이라는 결과와 모두를 위한 교육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은 거라고요. 자 이까지 설명하고 다음 순서로 넘어갑시다.”
순간 황당했지만 한편으로 내 발표로 인해 그가 당황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미식 자본주의에 오염된 것, 신자유주의 교육정책과 비슷한 것은 그에게 ‘진짜 핀란드’가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돌아보면 나 역시 핀란드에서 보고 싶은 것만을 보려고 하던 여행자의 시기를 거쳤다. 그때 핀란드를 찾아왔던 많은 한국인 교육 순례객들은 있는 것을 보려 했다기보다는 마음속 유토피아의 이미지를 확인시켜 줄 무언가를 보려고 했던 것 같다. 당시 한국의 주요 방송사들이 제작한 프로그램, 신문 기사, 그리고 방문단 일행의 탐방기를 모아 만든 책에서는 핀란드와 한국 교육을 대조적으로 묘사하는 문구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를테면 ‘핀란드는 시험, 성적표, 사교육이 없는 나라’, ‘핀란드에서는 경쟁이 아닌 협력을 통해 배운다’, ‘핀란드에서는 아이들이 즐겁게 공부하는데 한국에서는 학생들이 억지로 공부한다’. 같은 것들이었다. TV 다큐멘터리, 신문기사, 탐방기 모두 여행자가 낯선 사회를 찾아가 보고 들은 것에 대한 기록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부분 과장된 OOO은 […] 자신을 속박하는 현실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은 여행자들의 소망일 것이다. […] 여행기는 엄밀하게 말하면 여행지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자신이 보고 싶은 것에 대한 기록이며 결국 여행자 본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렇게 천국(과 그 반대 이미지인 지옥)의 심상이 여행기를 통해 만들어지길 반복했다. 핀란드는 좋은 교육과 좋은 사회를 향한 한국인 순례객들의 욕망이 투영된 상상의 장소였다.***
4
2021년 나는 서울 일 년 살기를 하고 있었다. 파견근무를 하게 된 것이었다. 코로나 19로 인해 호모 사피엔스를 대면하는 어떤 형태의 접촉도 백신 접종과 QR코드 인증을 빼놓고 이루어지긴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이 와중에 어렵사리 장거리 이사를 해서 서울로 온 만큼 사대문 안에서 살아보자 싶어 근무지였던 서울정부청사 근처에 원룸을 구하고 일 년 동안 서울을 거의 떠나지 않았다. 주말이면 체육복에 모자를 눌러쓴 채로 경복궁 돌담길을 돌았으며 때론 서촌과 인왕산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확진되는 것보다 생활쓰레기와 함께 2주 동안 원룸에 유폐되는 것이 더 두렵긴 했지만 이따금씩 동료들이나 서울에 사는 지인들과 어울려 밥을 먹고 술을 마셨다. 그렇게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를 발견하게 되었다.
“다음 주 지방 출장이야.”
“주말마다 차 끌고 지방에 있는 맛집 찾아다니는 게 낙이었는데 코시국이라 그것도 마음껏 못하니까 답답해.”
“지방 살 땐 집 한 채 있겠다 내 월급이면 어디 가도 남부럽지 않았는데 서울 오니까 자존감 팍팍 떨어지네.”
“지방에서 오셔서 서울 지리 잘 모르시죠?”
“아이고, 지방에서 올라오신 분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서울도 하나의 지역이며 서울에도 서울‘지방’국세청과 서울‘지방’법원이 있지만 서울 사람들은 다른 지역의 이름을 부르기보다 ‘지방’으로 뭉뚱그려 지칭하는 것이 익숙한 것 같았다. ‘지방’은 한 지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지리적, 사회문화적 공간을 서울(수도권)과 이에 대비되는 나머지 모두(all the rest)라는 이분법으로 나누고 거기에 각각 발전된 곳과 낙후된 곳이라는 위계질서를 부여하는 한국인의 가장 일상적인 언어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이렇듯 한국에서 중심부와 주변부라는 대조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재생산하는 대표 분야가 바로 여행과 간접적인 여행 경험을 제공해 주는 각종 대중매체일 것이다. 여행은 나와 타자가 맞닥뜨리는 일대 사건이며 내가 어떤 정체성을 욕망하고 있는지, 나와 타자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가감 없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백세희는 『납작하고 투명한 사람들』에서 영화와 같은 대중문화 콘텐츠를 통해 ‘지방’은 중심부 거주민이 여행이나 귀촌을 통해 ‘휴식’을 취하고 ‘힐링’하는 ‘고향’의 이미지로 묘사되고 있다고 말한다.**** 지역에서 나고 자랐으며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연구자 주재원에 따르면 ‘중심부’는 ‘지역’에 ‘시골’, ‘관광지’, ‘일상으로부터의 도피처’, ‘순수성을 재발견하는 곳’, ‘항상 거기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과거형으로서의 장소라는 정체성을 부여해 왔으며, 지역 역시 누군가에게는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현재형의 장소이지만 그런 사실은 은폐되거나 축소되어 왔다.***** 한 커뮤니티 게시판에 올라온 대화에서도 ‘지방’에 대한 ‘중심부’의 정형화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아니 지방이 무슨 서울인들 힐링 센터냐?
진짜요... 드라마의 지방(요즘은 보통 제주도더라)은 서울인들이 생각하는 ‘관념적’ 고향임...******
그런가 하면 신문 기사나 뉴스에 등장하는 현실 속 ‘지방’은 젊은이들이 인생을 걸고 정착할 엄두가 나지 않는 ‘낙후된 곳’이자, 의료와 문화의 ‘사막’이며, 인구가 줄어들어 ‘소멸’하는 곳으로 보도된다. ‘지방+도시’라고 해서 우중충한 이미지를 피해 갈 순 없다. 이들은 곧잘 ‘노잼 도시’로 불린다. 그 결과 여러 지방자치단체에서는 노잼의 오명을 벗고 ‘인스타그래머블’한 ‘꿀잼도시’로 거듭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관광 ‘콘텐츠’를 개발하려 한다. 하지만 공연장, 미술관, 박물관 등 공공문화시설의 절반이 수도권, 특히 서울에 집중되어 있는 현실을 생각했을 때 그것은 ‘노잼’ 담론을 극복하여 어떻게든 관광지로 살아남으려는 눈물겨운 투쟁에 가깝다.
‘중심’이 ‘지방’을 대하는 이중적인 인식은 여행자가 여행지를 바라볼 때 자칫 지니기 쉬운 권력의 시선과 많이 닮았다. 오랜 시간 인도사를 연구해 온 이옥순은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에서 유명 작가들의 인도 여행기를 통해 인도에 대한 정형화된 이미지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또한 저자는 프레데릭 불레스텍스의 『착한 미개인, 동양의 현자』를 인용하면서 인도를 ‘가난해도 행복한’ ‘성자의 나라’로 규정하는 21세기 한국인 여행자의 시선은 20세기 초 한국인을 ‘가진 것 없지만 행복한’ 사람들로 바라보았던 서양인의 시선과 닮아있다고 지적한다. 이옥순에 의하면 많은 작가들의 인도 여행기 속에는 몇 백 몇 천 년 전의 시간 속에 박제된 인도에 대한 환상과 문명에 이르지 못한 인도를 향한 혐오가 존재할 뿐, 현재를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이 가족을 먹이고 입히며 자식만큼은 교육을 통해 계층 사다리를 기어오를 수 있도록 분투하는 과정에서 품게 되는 희망과 절망은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는 누구의 렌즈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왜곡된 렌즈라고 해도 꼭 벗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여행이 갖는 의미에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여행이란 우리를 옥죄는 일상을 탈출하여 자신의 환상이 빚어낸 가상의 장소로 이동하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이기도 한 것 아닌가. 그리고 여행자의 환상을 입증시켜 줄 퍼즐 조각을 여행지에서 찾아내어 마침내 퍼즐을 완성했을 때 그 여행은 비로소 아름답게 기억될 만한 자격이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면? 상대에게 환상을 자기 마음대로 부여해 놓고 그 환상에 집착하거나 무너져 내린 환상 앞에서 실망하는 것도, 상대에게 선입견을 구축해 놓고 비하하거나 혐오하는 것도 모두 사랑과는 거리가 먼 권력(또는 폭력)의 행사라는 것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타자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존중하면서 관계를 통해 서로가 자신을 더 좋은 사람으로 변화시켜 가는 것이 사랑일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기란 어렵다. 그것이 여행지이든 연인이든 말이다. 어쩌면 눈동자를 바꿔 끼우는 것만큼이나 고통이 따르는 작업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일을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서양의 시선과 입장에 동화되는 것이 곧 근대화였던 지난 세기가 물려준 렌즈를 벗어던지고 이해와 존중의 시선으로 타자와 관계 맺기를 원하는 이 시대의 여행자라면.
사진첩을 꺼내 필름 카메라로 찍은 여행 사진을 살펴본다. 내가 보고 싶어 하는 타자의 모습을 찾아 나섰던 그 시절, 내 마음에 비친 타자의 이미지를 사랑했을지 모를 지난날 여행을 천천히 떠올려 본다.
* 이옥순. 2002.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 149쪽 참고.
** 박주현. 2008. “21세기 한국여행기에 드러나는 오리엔탈리즘-인도 여행기와 뉴욕 여행기를 중심으로.” 비교문학 45, 185쪽.
*** 오리엔탈리즘에 ‘서양’이 품고 있는 ‘비서구권’에 대한 인식 체계만이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오리엔탈리즘은 자아와 타자를 넘나들며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된다. 한국인들이 핀란드 교육과 사회에 대해 품었던 심상처럼 비서구인이 ‘서양’에 대해 갖게 되는 환상이나 동경 또한 오리엔탈리즘의 한 형태이다. 어떤 연구자들은 이를 옥시덴탈리즘이라는 용어를 써서 구별하기도 한다(Said, E. (1978) 2014. 오리엔탈리즘. 박홍규 옮김 (개정증보판). 교보문고. 627쪽)
**** 백세희. 2022. 납작하고 투명한 사람들(큰글자책). 호밀밭. 23-29쪽.
***** 주재원. 2020. 만들어진 지역성: 상상된 고향과 내부 오리엔탈리즘. 한국방송학보 34(5). 189, 212-214쪽.
****** 인스티즈(Instiz)에 올라온 게시물에서 발췌. (게시일:2024.5.16. 조회수: 103098건)
https://www.instiz.net/pt/7537781
******* 이옥순. 2002.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 푸른 역사. 134-160쪽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