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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니 벌에게만 쌀쌀맞게 대한 건 아니었다. 모기는 성가시게 생각했고, 바퀴벌레는 혐오했으며, 빈대는 두려워했다. 인간인 나를 중심에 놓고 익충과 해충, 또는 예쁜 곤충과 혐오스러운 벌레라는 틀로 그들을 구분하고 있었다.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와 해가 되는 존재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으로 그들을 빠르게 구별한 다음 행동-공생, 내 영역 밖으로 몰아내기, 학살-에 옮기는 방식에 길들여져 있었다.
대개 모기나 파리처럼 질병을 매개하는 곤충들이 해충으로 분류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영롱한 불빛으로 지역 축제에서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는 반딧불이는 다른 지역에서 일부러 모셔와 행사장에 풀어놓을 정도로 귀한 곤충으로 취급받지만, 벌처럼 꽃의 화분을 돕는 곤충임에도 불구하고 러브버그(붉은등우단털파리)는 해충 아닌 해충 신세가 되면서 지자체에 방역을 요청하는 민원이 초여름마다 쏟아진다. 기후 위기로 인해 생태계의 균형이 깨진 상황에서 러브버그의 개체 수가 급격히 많아진 것인데, 시민들에게 정신적 피해와 경제적 불편을 준다는 이유로 서울시의회에서는 대발생 곤충 방제 조례안을 입법예고하기도 했다. 그들을 합법적으로 사멸시킬 수 있는 데스노트를 서울시의 조례로 만들고자 시도한 것이다.* 인간에게 무용한 존재 혹은 불편을 주는 존재가 되었을 때 곤충은 ‘벌레’가 된다. 벌레로 불리는 순간 더 이상 생명체로서 존중받아야 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을 방제라는 이름으로 제거하는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 준다.
마치 카프카의 『변신』에서 결정적인 순간, 여동생이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를 ‘오빠’에서 ‘이것’으로 바꾸어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아버지, 이게 오빠라는 생각을 버리셔야 해요. […] 도대체 이게 어떻게 오빠일 수가 있지요? 만약 이게 오빠였더라면, 사람이 이런 동물과 함께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진작에 알아차리고 자기 발로 떠났을 테지요.”**
벌레쯤 각종 기술과 도구로 얼마든지 손쉽게 죽일 수 있고 그들이 옮기는 질병에 대한 치료제도 잘 개발되어 있는 이 시대에 우리가 여전히 벌레를 혐오하고 두려워하는 이유는 어쩌면 그들을 통해 보고 싶지 않은 이 시대 우리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카프카의 『변신』을 읽는 우리들은 첫 줄부터 주인공이 채 잠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그를 다짜고짜 흉측한 해충으로 만들어버리면서 시작하는 전위적인 도입부 몇 쪽을 읽자마자 어느 결에 벌레가 된 인간 혹은 벌레의 시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나도 ‘벌레’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경제적 유용성을 기준으로 끊임없이 인간을 구분하고 소외시키는 자본주의-능력 만능주의 사회에서, 내가 결코 무용하지 않다는 것을 매일같이 입증해 보여야 하는 이 시대 모든 개인은 잠재적 그레고리 잠자이며 잠재적 벌레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시장가치를 상실한 나는 언제든 재빠르게 다른 누군가로 대체될 수 있고, 이 세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조금의 삐걱거림이나 망설임도 없이 돌아갈 것이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한, 아니 더욱 명징하게 다가오는, 보고 싶지 않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우리의 자화상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무력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이 투영된 것만 같은 벌레에게 그토록 가혹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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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 발만 삐끗하면 그레고리처럼 갑충으로 전락하여 존재의 이유를 상실하게 되는 첨예한 경쟁과 능력 만능주의 사회에서 벌레에 대한 탄압은 나와 다른(다르다고 여겨지는) 인간에 대한 차별과 혐오로 그 범위가 확장된다. 젠더를 기준으로 편을 가르는 맘충과 한남(녀)충, 특정 세대를 비하하는 틀딱충과 급식충, 정치 성향이나 이념을 중심으로 경계를 긋는 PC충과 인권충, 페미충, 그 외에도 장애충과 9급충, 진지충까지 각종 인간 벌레가 범람하는 한국 사회에서 ‘충’은 낙인과 차별, 배제, 나아가 박멸의 내러티브를 실어 나르는 강력한 기호로 자리 잡았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충’ 담론이 경계를 드러내는 작업을 통해 사회 구성원을 내집단과 외집단으로 구분하고 내집단에는 순수 또는 쓸모 있음, 그리고 외집단에는 불순 또는 쓸모없음의 이미지를 부여하면서 혐오를 증폭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혐오 현상에 대해 진화생물학자 장대익은 『공감의 반경』에서 흥미로운 설명과 해법을 내놓는다. 저자는 비교적 소집단을 이루고 살았던 호모 사피엔스의 조상에게는 자기 사람을 더 챙기는 부족본능이 생존에 유리한 형질이었을 것이지만 사회가 갈수록 확장되고 나아가 전 세계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지금, 내집단의 감정에 깊이 공감하고 외집단을 혐오하는 부족본능이 여러 부작용을 낳고 있다고 말한다.
공감은 마일리지 같은 것이어서 누군가에게 쓰면 다른 이들에게는 줄 수 없다. 내집단에 강하게 공감했다면 외집단에 공감할 여유가 소멸하는 것이다. […] 이렇게 공감의 깊이와 넓이는 상충한다. […] 한쪽에 과잉 공감하는 순간 다른 쪽에는 폭력이 된다는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치료제는 공감의 깊이가 아니라 반경을 넓히는 것이다.
정서적 공감이 따뜻한 감정의 힘이라면 인지적 공감은 따뜻한 사고의 힘이다. […] 인지적 공감은 공감의 원심력을 강화해 공감의 반경을 넓힌다. […] 이제 우리의 과제는 즉각적이고 쉬운 감정이 아니라 조금 어렵더라도 타인의 상황을 이성으로 이해하는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느낌의 공동체가 아니라 사고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카프카는 인류가 자신과 가장 다르게 생겼다고 생각하며 업신여기는 벌레를 면밀히 들여다보고 그가 느낄 고통을 감지하며 그의 처지에서 세상을 바라볼 줄 알았던 감수성과 공감력의 소유자가 아니었을까.
저녁 어스름 녘에야 그레고르는 혼수상태와도 비슷한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이제야 비로소 어림잡기를 배우게 된 더듬이들로 아직은 서툴게 더듬으면서 문 쪽으로 천천히 몸을 밀어갔다. 왼쪽 옆구리에 길게 한 가닥 흉터가 생겨 불편하게 당겼으며 그는 좌우 두 줄 다리들을 규칙적으로 절뚝거려야 했다. 더군다나 다리 하나가 아침나절에 있었던 사건으로 심하게 다쳐서 감각을 잃은 채 질질 끌렸다.
몇 제곱미터 되지 않는 방바닥을 많이 기어 다닐 수도 없었고 가만히 누워 있는 일은 밤에만 하기에도 힘들었으며, 먹는 일도 그에게는 더 이상 전혀 낙이 되지 않아서 그는 기분 풀이로 벽과 천장을 이리저리 가로질러 기어 다니는 습관을 들였다. 특히 그는 천장에 즐겨 매달려 있었다. 그건 마룻바닥에 누워 있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한결 자유롭게 숨 쉴 수 있었으며 가벼운 진동이 전신을 스쳐 지나갔고, 그러다 보면 그레고르가 거기 꼭대기에서 빠져 있는 거의 행복한 방심 상태에서 더러, 그 자신도 깜짝 놀라게 떨어져 바닥에 털썩 소리를 내는 일도 있었다.*****
이 소설을 집필하던 당시 프란츠 카프카는 노동자재해보험공사에서 보험 담당관으로 일하면서 안전장치 하나 변변하게 갖추어지지 않은 현장에서 일하다가 뼈가 부러지거나 손가락 혹은 팔다리가 잘려나간 노동자들을 숱하게 보았을 것이다.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이 대목은 작가가 마치 어느 날 갑자기 산업재해로 인해 노동 가치를 상실해 버린 이 시대 가장 낮은 사람의 몸으로 변신하여 글을 쓰고 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변변한 목소리조차 부여받지 못한 타자의 아픔을 그 큰 눈과 귀로 오롯이 받아들여 그들의 목소리가 되어 준 사람. 카프카 박물관을 나선 후에도 한참 동안 그의 얼굴이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6
초파리부터 시작해서 벌,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리 잠자, 그리고 뉴스로 만난 러브버그까지 곤충들이 이 여행의 시작부터 끝까지 동행한 기분이었다. 인천 공항에 도착한 비행기의 문이 열리고 탑승교를 따라 몇 발짝 내딛자마자 눅진한 여름 공기가 몸을 감싸며 한국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변한 것이 없어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며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얼마나 변했을까 생각했다. 이방인을 만나면 피하거나 공격하는 게 상책이었던 시절부터 전해져 내려왔을 인류의 유전자가 내게 선사한 편 가르기와 배제, 혐오의 삼종세트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졌기를 바랐다. 인간중심의 사고에서 한 발짝 벗어나 나와는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던 존재들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조금 더 자유로워지는 여정이 되었기를 바랐다. 그렇게 된다면 막대한 양의 이산화탄소를 지르밟은 내 발자국에 대한 작은 핑곗거리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짐을 찾아 입국장을 빠져나오는데 공항에 있는 빈대 방제부스를 알리는 설치물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그 앞에서 멈칫했다. 혹시 모를 빈대와의 공존을 받아들이기에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빈대에게는 어렵더라도 다시 벌을 만난다면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생각해 보니 한국에서는 온몸에 꽃가루를 잔뜩 묻힌 채 꽃에 몸을 파묻고 꿀을 빨고 있는 벌들을 본 지 오래되었다. 그야말로 ‘To be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의 시대다.******
가만히 눈을 감아본다. 여행자의 식탁을 찾아왔던 벌이 다시 나타나 날고 있다. 카프카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 벌의 시점에서 인간의 노동 착취를 풍자하는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그가 기후위기, 그리고 우크라이나와 가자 지구 사람들의 전쟁 속 삶이라는 카프카적 상황으로 점철된 이 멋진 신세계를 보았다면 과연 어떤 작품을 썼을까. 그 소설의 결말이 지구생태계의 인간 방제 작업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 2024년 8월 윤영희 국민의힘 서울시 의원이 발의한 '대발생 곤충 관리 및 방제 지원에 관한 조례안' 입법 예고에 대해 많은 시민들이 반대 의견을 표했으며 서울시의회 보건복지위원회의 회의에서 안건으로 상정되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폐기되었다. 하지만 내년 여름에도 러브버그는 과연 학살을 면할 수 있을까?
** 프란츠 카프카. 1998. 변신·시골의사. 전영애 옮김. 민음사. 70-71쪽.
*** 오지민, 오세일. 2023. 충 담론과 혐오문화 분석. 현상과 인식 47(3), 99-128.
**** 장대익. 2022. 공감의 반경: 느낌의 공동체에서 사고의 공동체로. 바다출판사. 34-55, 160쪽.
***** 프란츠 카프카. 1998. 변신·시골의사. 전영애 옮김. 민음사. 32, 45쪽.
****** 그린피스. 2022.5.19 꿀벌이 사라지면 벌벌 떨어야 한다고? https://www.greenpeace.org/korea/update/22540/blog-ce-world-bee-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