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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ry night Jan 13. 2023

처음 뵈었던 그때가 아직도 선연합니다

2014.1.17

선생님,

올 겨울은 유난히 포근하다 싶었는데 며칠째 수은주가 0 아래로 큼직하게 한 칸 떨어진 채 올라오질 않네요. 오후 네 시 반.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여섯 시간 남짓 지평선에 닿을 듯이 낮게 떠 있던 북위 60도의 태양이 멀리 보이는 자작나무 숲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갑니다. 제 뺨 위로 차갑게 흩날리는 눈발에 맞서 집으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합니다. 코끝과 손끝이 아려오는 미세한 통증과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날것 그대로의 차가운 공기는 제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2010년 1월의 마지막 날 저녁. 그날의 날씨도 이랬던 것 같은데. 기억나세요?

헬싱키의 온 거리가 눈으로 뒤덮이고 발틱해마저 꽁꽁 얼어붙었던 그때를.

헬싱키의 어느 중국식당에서 선생님을 처음 뵈었지요. 

식당은 한국에서 온 서른 명가량의 북유럽 교육 탐방단 일행이 뿜어내는 체온과 열기로 데워져 있었어요. 핀란드에서 육개월째 유학을 하고 있었던 저는 테이블을 옮겨 다니며 한국에서 오신 분들께 제 소개를 하고 있었지요. 저마다 독특한 개성과 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한겨울 핀란드의 추위를 마다하고 오신 한국 분들 가운데에서 선생님은 나서서 분위기를 주도하는 분은 아니었어요. 선생님은 테이블의 맨 가장자리에 앉아 계셨죠. 셔츠 위에 니트를 입은 온화하고 점잖은 인상의 중년 남자분께서 본인을 중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교사라며 이름을 말해주셨을 때, 제 머릿속에 책 제목 하나가 스쳐 지나갔어요. 바로 선생님이 쓰신 책. 

아직도 기억해요. “혹시 저자 분이신가요?” 하고 제가 물었을 때 “핀란드에서 이렇게 독자를 만나게 되네요” 하시며 입가에 번지던 미소를. 저는 그때 선생님께서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계시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죠. 그 자리에서 나눈 대화 내용은 시간이 흐르면서 희미해졌지만 이 장면만큼은 선명하게 남아있는 이유는 아마도 제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글쓰기에 대한 열망이 선생님과의 첫 만남 중에서도 유독 이 장면을 끄집어내어 강한 기억으로 남겼기 때문이겠지요. 글 솜씨는 조악하고, 삶을 바라보는 안목은 편협하기 그지없지만 글로 자신을 표현할 때 가슴이 뛰는 사람의 눈에는 똑같은 열망을 품은 채 앞서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 보이는 법이니까요.


탐방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신 선생님은 제게 핀란드에서 겪고 느낀 것들을 글로 써 볼 것을 권해주셨죠. 교사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에 방도 한 칸 내어주셨고, 전 거기에 핀란드에서의 제 일상과 교육, 사회에 대한 글을 올리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선생님은 제 안에 있는 글쓰기의 욕구를 건드려 주셨고, 가끔씩 댓글을 제 글에 남겨주시기도 했죠. 


또 기억하실런지. 북유럽 탐방단의 마지막 밤이었던 그날 저녁. 중국식당에서 나온 탐방단 일행은 근처 호텔방에 모여 그동안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대화로 나누기 시작했죠. 한 학기 내내 서툰 영어와 씨름하던 제가 한국 사람들에 둘러싸여 한국어로, 그것도 교육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본 것이 얼마 만이었던 건지. 철 지난 농담과 수다도 얼마나 정겹고 재미있던지요. 예전에 외국에서 홀로 공부를 해 보신 것도 아닌데 제 웃음의 행간에서 유학생의 숙명일 수밖에 없는 외로움을 읽어내셨던 선생님은 저에게 도움이 될 만한 참고문헌을 따뜻한 안부와 함께 메일로 보내주시기도 했어요.


그렇게 선생님은 남들보다 더 섬세하고 예민한 감성의 촉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에 어쩌면 외로움도 더 깊게 느끼시고, 다른 사람의 외로움도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셨는지도 몰라요. 혼자 계시는 연구실에서 식물들과 대화를 하고 싶어 하나둘씩 화분을 들여놓게 되었다는 말씀을 언젠가 들으면서, 단촐한 유학생 살림에 둘도 없는 친구인 노트북과 중고 자전거에 이름을 짓고 그 이름을 불러주며 애지중지하던 제 모습이 떠올랐어요. 외로움을 회피의 대상이 아닌 성장의 원동력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관계의 소중함을 알고, 식물 심지어 사물과도 대화를 시도하며, 결국 자신의 내면과 대화를 나누기에 이르는가 봅니다. 선생님과 저에겐 글쓰기가 바로 이 여정의 산물이 아닐까요.


그동안 선생님과 저는 페이스북, 교사 커뮤니티, 그리고 이메일을 통해 적지 않은 토론과 대화를 주고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단어들을 참 좋아하는군요. ‘상상력, 영감, 공감, 대화, 존재, 사유, 성장, 글쓰기, 공간, 미학, 내면, 대화, 숲…’

그래요. 이런 공감대 덕분에 선생님을 감히 친구 삼기로 했지요.

‘만나게 될 사람은 만나게 되어있다’.

우리는 그렇게 만났고, 나이, 성별, 경험, 연륜, 그리고 시차와 공간을 넘어 서로의 글을 읽으면서 공감하고 격려해 주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 편지를 통해 이곳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는 저의 시선이 오늘보다 내일 조금 더 깊어지길 바래봅니다. 이렇게 선생님과 교류하면서 제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걸 큰 영광이자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자작나무 위로 달이 떠올랐습니다. 공동부엌에 가서 저녁을 준비할 시간이네요. 

일곱 시간 앞에 있는 한국의 벗들은 이제 잠자리에 들 시간. 

다음에 또 편지드리겠습니다.

안녕히.


핀란드 뚜르꾸(Turku)에서 J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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