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쏘.공
연말에 알림메세지가 왔다.
12월 31일에 OO항공 마일리지가 소멸됩니다.
언제나처럼 숱하게 많은 광고 메시지를 삭제하던 중 눈에 띈 메시지였다. 마일리지? 소멸?
아이들과 함께 여행 다니며 저렴하고 시간대가 맞는 항공사를 찾아 이용하다 보니 특별히 우리나라 항공사 비행기를 많이 탄 것 같지는 않은데 소멸되는 마일리지가 있다니 궁금해졌다. 얼마나 있을까 알아보려 로그인하는 동안 속으로는 '뭐 몇 푼 안 되겠지' 하는 마음도 있었다. 손가락이 기억하는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해서 조회해 보니 아시아나에는 7천 정도, 대한항공에는 3만 정도의 마일리지가 쌓여있었다. 마일리지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게 어느 정도의 가치인지 알아보니 제주도 편도 티켓이 5천 마일리지이고 그마저도 마일리지석은 편당 몇 개 없어서 얼른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마침 남편은 직장 동료들과 연말에 2박 3일 제주도 워크숍 일정이 잡혀있었다. 생각해 보니 봄에 10주년 결혼기념일을 맞이한 해인데 연말까지도 나는 혼자 자유롭게 여행을 단 하루도 간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혼자서 하는 여행은 결혼 전에도 한 적이 없기는 하다. 다만, 두 살 터울의 아이들을 낳고 기르느라 친구들과 여행을 갈 여유가 10년 동안 없었고 딱히 가고 싶다는 생각도 안 했을 뿐인데 갑자기 마일리지를 써야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불타올랐다.
여보, 나도 애들 방학하기 전에 제주도 좀 다녀와야겠는데요? 마일리지를 써야 한대요.
얼만데?
대한항공으로는 왕복도 끊을 수 있고 아시아나는 편도 끊을 수 있다네. 근데 누구랑 가지?
가요, 그럼. 친구들한테 물어봐요.
오~ 나이쓰으으
남편은 - 사실 3년 연속으로 떠나고 있는 - 제주도 워크숍을 앞두고 있어서 조금 미안했던 모양인지 흔쾌히 승낙을 해주었다. 내 친구들도 대부분 나처럼 애 둘 이상 딸린 유부녀여서 어쩌면 일행을 모으기가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제주도에 자리 잡고 사는 친한 친구 라미에게 먼저 연락을 해보았다. 나의 방학과 아이들 방학 사이에 약 2주 가량의 차이가 있기에 그 사이에 갈 수 있는 날로 물어보니 다행히 딱 맞는 기간이 있었다. 이왕 가는 거 같은 그룹의 대학 동기들에게도 날 밝으면 물어보기로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출근길에 대학 동기들 단톡방에서 이야기를 꺼내보니 여섯 명 중 두 명 정도가 곧바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워낙 남편과 번갈아 자유여행을 즐기는 쏠과 아이들이 다 커서 청소년이 된 쑤, 최근에 이미 해외여행을 다녀와서 망설였지만 시간은 낼 수 있는 뽀, 마지막까지 대답을 아끼다가 모두 다 가기로 한 뒤에 오케이를 받아낸 깽까지! 만 하루 만에 모두가 같은 날짜에 김포에서 떠나는 제주행 비행기 티켓을 끊는 데 성공했다. 제주에서 멋진 애월 하우스를 숙소로 내어주기로 한 라미의 통 큰 기부가 한몫했다.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여행 멤버 모집에 남편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홍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이네"라고 했다. 나의 작은 마일리지가 졸업 후 20주년 기념 여행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어서 무척 기쁘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다들 흔쾌히 응해줘서 고맙다고 하니 한 친구가 나에게 먼저 제안을 해줘서 더 고맙다고 한다.
고맙다고 해줘서 내가 더 더 고마워.
친구들과 잠시 통화하며 렌터카에 대해 상의하고 있으니, 자동차 러버인 둘째가 나타나 무슨 여행을 가길래 렌터카를 빌리느냐고 물어본다. 일정이 다가오기 전까지 아이들에게 비밀로 해야 하나 고민이었는데, 갑자기 당당한 오기가 생긴 나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허리에 손을 올리며 짐짓 과장되게 말했다.
"엄마가! 어? 결혼하고 십 년 동안 한 번도 친구들이랑 여행을 못 가서. 어? 이번에 한 번 가보려고. 왜?"
거실에서 영어 숙제를 하던 첫째가 그 말을 듣고는,
"몇 박 며칠?"
"음…아마도 두 밤?... 정도."
“어디로?“
“멀리는 아니고… 제주도.“
"오케이!"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여주며 쿨하게 엄마의 여행을 허락하는 첫째 아이의 모습에 괜히 마음이 몽글해졌다. 남편도 남편이지만 아이들에게도 허락을 구하는 시늉이라도 했어야 하는데, 그걸 놓친 엄마에게 흔쾌히 자유여행을 다녀오라고 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코끝이 찡했다.
예전에 스키부 생활을 하면서 시즌방에 오랫동안 들어와 있는 유부남 선배들이 참 신기했었다. 가정이 있는데 이렇게 길게 겨울 내내 스키장에 와있다니? 술자리에서 물어보면 "겨울 빼고 세 계절에 마눌리지를 열심히 쌓았지."라고 말하곤 했다. 마누라라는 말이 -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지만 - 어쩐지 아내를 하대하는 느낌이 들어서 어감이 좀 그랬지만, 나머지 계절에 그만큼 가정에 충실하게 생활해서 열심히 쌓았다는 '마눌리지'라는 말은 우리 시즌방의 비공식 표준어가 되었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 소멸 방지를 위해 -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사용하는 항공 마일리지는 마눌리지와는 조금 다르다. 쌓는 사람도 나이고, 사용하는 주체도 나이니 마눌리지라는 말보다는 '엄마일리지'라는 말을 사용하고 싶다. 10년 간 아내로 엄마로 살며 두 아이를 열심히 키워낸 땀방울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적립되어 나에게 달콤한 휴가를 선물한다. 이것은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둘 또는 셋의 작은 인간을 만들어 십 년 이상 키우고 있는 내 동기들 모두에게 쌓인 엄마들의 마일리지이다. 우리 여섯 명의 자녀를 합치면 모두 14명이다. 대한민국 저출산 시대에 표창장을 받아 마땅한 엄마들이 아닌가?
출발 직전까지 우리 '엄마들'에게는 크고 작은 이슈가 계속 발생하고 있다. 제주도 주민인 라미는 친정엄마가 갑자기 다치셔서 수술 및 입원을 돕는 보호자가 되어버렸고, 쏠은 출근 직전 짐을 싸는 도중 아들의 고열 이슈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 저녁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떠날 것이다. 비행기와 숙소, 그리고 렌터카부터 해결한 다음에는 어쩐지 아무 계획 없이도 마음이 편안했다. 다행히 우리 중에는 걱정 많은 J와 '노는 건 국가대표'인 걱정 없는 P가 공존하기에 나는 '뭐든지 다 좋아' 상태로 묻어갈 듯하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비행기가 잘 뜰지 모르겠다. 떠날 때까지 떠나는 게 아닌 여행일지라도, 거실 한 켠에 꾸려놓은 짐을 바라보며 출발 7시간을 남겨놓은 이 아침의 행복을 잊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