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에세이 과제 - 기억에 남는 중고거래
‘저 지금 출발하는데 혹시 커피 사다 드릴까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카페 스트라다를 지나는 길이라서 들렀다 가려고요.’
에코마켓 채팅창의 알람 진동이 울렸다.
스트라다라니?
‘괜찮습니다.’라고 정중하게 사양하려던 나는 염치 불구하고 ‘어머 스트라다 저도 넘 좋아해요! 그럼 아이스 바닐라 라떼 한 잔 부탁드려요.’라고 너스레를 떨며 답장했다. 만나기로 한 딩딩님의 예전 글을 찾아보니 우리 집 첫째보다 두어 살 어린 딸아이를 키우는 중이신 듯했다. ‘혹시 아이가 몇 살인가요? 저희 집 첫째가 깨끗하게 입거나 거의 안 입은 예쁜 원피스가 많은데 좀 드려도 될까요?’ 하고 물어보니 흔쾌히 ‘주시면 감사하죠.’라는 답이 왔다. 맘카페에 올라오는 글을 보면 눈치 없이 낡은 옷을 물려주는 시누이나 형님에 대해 원망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어서 무언가를 물려주고 싶을 때는 조심스럽게 상대방의 의견을 물어보는 편이다.
나 역시 딱히 필요하지 않은 영어교재 세트를 통째로 물려받은 적이 있다. 위로 한 살 많은 조카를 키우는 친언니로부터이다. 언니는 조카의 영어교육에 진심이었기에 그게 얼마나 좋은 교재인지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물려받아온 박스를 한참이나 지나서 열어보았더니 책과 DVD, 소리 나는 펜 등의 수많은 구성품 속에 터치패드가 보이지 않았다. 언니에게 물어보니 분명히 그 상자에 넣었으니 잘 찾아보라는 답장이 돌아왔다. 꼬치꼬치 캐묻자니 적반하장인 듯해서 그냥 책이나 들춰보고 펜이나 찍어보다가 중고장터에 슬그머니 올려두었다. 터치패드가 없어도 필요하다는 사람이 있겠지 싶어서 내가 가진 구성품 전체 사진을 올리고, 시세보다 조금 저렴하게 내놓았더니 금방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분이 바로 딩딩님이었다. 작은 방에 덩그러니 있던 큰 박스를 드디어 처분한 나는 기쁜 마음에 치킨을 주문했다. 버리지 않고 잘 두었다가 괜찮은 가격에 정리했음을 남편에게 자랑하면서 말이다. 쿨거래였다고 생각했다. 딩딩님과 거래 후 조심스러운 채팅을 받기 전까지는...
‘꾹꾹맘님, 안녕하세요? 혹시 구성품 중에 이렇게 생긴 판은 없나요? 친구네 집에서 이 패드를 보고 좋아 보여서 거래한 것인데 패드가 없네요.’ 라며 첨부사진으로 보내준 물건은 나 역시 없어서 아쉬웠던 그 터치패드였다.
아뿔싸! 딩딩님에게도 패드가 중요한 구성품이었을 줄이야.
‘죄송해요. 제가 가진 구성품에 터치 패드가 없어서 조금 저렴하게 올렸어요. 사진에 있는 구성품이 전부라고 설명에 쓰기는 했는데.. 죄송해서 어쩌죠?’
‘아 그렇군요. 제가 사진을 제대로 안 봤나 봐요. 알겠습니다.’
치킨을 이미 주문했는데 환불이라도 해달라고 할까 봐 조마조마했던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처음부터 터치패드가 없음을 명시했었더라면 어땠을까? 의도적으로 숨긴 것은 아니지만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니 괜찮은 걸까?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차마 내 손으로 ‘그럼 환불해 드릴까요?’라고 적어 보내지 못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짐정리를 하던 언니가 예전의 그 영어교재 터치패드를 찾았다며 사진을 보내왔다. 이미 그 교재는 중고로 팔아버렸다고 실토하지 못하고, 지금이라도 주면 좋겠다고 말해서 경기도까지 가서 물건을 받아왔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거래내역을 찾아 예전에 물건을 사 가신 분이 딩딩님이라는 것을 알아내고 떨리는 마음으로 채팅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예전에 영어교재 거래했던 사람인데요, 전에 찾으시던 그 터치패드 아직도 필요하실까요? 짐정리 하다가 나와서요.’
다행히 딩딩님은 좋다고 하셨고, 터치패드를 가지러 직접 우리 집으로 와주기로 해서 약속을 잡았다. 물어보지도 않고 어느 아파트인지 아는 걸로 보아 멀지 않은 곳에 사시나 보다 짐작했다.
약속한 시간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이스 바닐라 라떼를 들고 나타나신 딩딩님은 생각보다 푸짐한 옷 꾸러미에 놀라는 듯한 눈치였다. 예전에 못 드렸던 터치패드와 함께 승용차에 실어드리고, 커피를 받아 들고, 옷 예쁘게 잘 입혀주시라고 인사드렸더니 망설이는 듯 입을 떼시는 딩딩님.
“저... 사실은 예전에 꾹꾹맘님 집에서 머리핀 원데이 클래스 했었어요.”
뜻밖의 이야기에 깜짝 놀란 내 머릿속에는 4년도 더 된 기억이 소환되었다. 코로나가 우리 일상을 덮치기 전, 2018년 가을에 둘째 아이를 출산한 나는 육아휴직을 하고 집에서 아기를 키우다가 이듬해 봄부터 오전 낮잠 타임을 활용해서 ‘머리핀 만들기 원데이 클래스’를 열었었다. 재료비 5천 원을 받고 4~5명 정도를 초대해서 두 시간 정도 사부작거리면 아이용 머리핀 4개와 머리띠 1개를 만들어갈 수 있는 클래스의 이름은 ‘꽃핀 Day’. 월별로 디자인을 바꾸면 예전에 왔던 분이 또 오기도 했었고, 거기서 인연이 닿아 같은 어린이집 학부모로 친분을 쌓기도 했었는데 나중에는 수십 명의 손님이 다녀간 셈이라 모두를 기억하기는 어려워졌다. 2020년에 복직을 하면서 원데이클래스는 별다른 공지 없이 종료되었지만, 오며 가며 간혹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주시는 분들이 계시긴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중고거래의 인연으로 다시 만나다니 놀랍고 또 나의 불찰로 인해 다시 발걸음 하게 되었는데 맛있는 커피까지 사다 주시니 마음속에 몽글몽글하고 따뜻한 무언가가 퍼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딩딩님은 마지막 만남 이후 며칠이 지났는데도 내가 물려준 옷을 딸에게 입힌 착용샷까지 보내주셨다. 당근마켓이 유행하기 훨씬 이전부터 우리 동네 주민들이 애용하는 ‘에코마켓’은 이렇게 훈훈함이 넘치는 중고거래 카페이다. 아이들과 관련된 용품을 거래할 때에는 단순히 물건만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키우며 얻은 추억과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고충을 나누는 것이기에 언제나 소소한 금액이지만 마음이 따뜻해지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