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에세이 - 어린 시절 즐겨하던 놀이
갑자기 필요한 물건이 생겼다.
쿠팡 로켓배송으로도 해결이 안 되는 급한 물건이고, 제품의 질은 크게 중요하지 않을 때 현대인들이 즐겨 찾는 장소는 어디일까? 아마도 머릿속에 바로 떠오르는 곳은 ‘다이소’ 일 것이다. ‘무엇이든 다 있소’라고 말하는 것 같아 그 이름 참 잘 지었다 싶은 이곳은 처음의 싸구려 구멍가게 같은 이미지를 벗어나, 점점 더 점포 수를 늘려가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나도 자질구레한 것을 사러 다이소에 즐겨 가는데, 가게에 들어가는 내 머릿속에 생기는 일처리 순서도는 대략 아래와 같다. 사려고 하는 꼭 필요한 물건이 있는가 없는가 여부와 관계없이 문구류 코너에 꼭 들른다는 이야기다. 가서 조금만 둘러보면 살 것이 생기곤 한다.
‘어, 나 이런 거 꼭 필요했는데...’
‘맞다, 애들 딱풀 다 썼지.’
‘이런 예쁜 봉투는 명절에 꼭 필요하지. 찾으면 없으니까 쟁여두자.’ 하며 머릿속 소비 요정이 나를 유혹한다. 사두면 꼭 요긴하게 쓰이는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별로 쓰임새가 없는데도 꼭 한 두 개 집어 들게 만드는 메모지나 스티커 같은 것들이 나를 향해 손짓하는 것이 문제이다. 예전과 달리 가격도 착해서 나는 습관처럼 큰 고민 없이 쇼핑바구니에 챙겨 넣고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는 한다.
태어나고 자란 곳이 부산이어서 일본과 가까워서 인지, 어릴 적 동네에는 아기자기한 일제(日製) 문구류를 판매하는 가게들이 많았다. 친한 친구들 중에는 일제 학용품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도 많았는데, 일본 무역과 관련된 일을 하시는 아버지가 하나 둘 사다 주시는 기념품 같은 것이었다. ‘헬로키티’나 ‘캐로캐로캐로피’ 외에도 이름 모를 캐릭터들이 가득한 일본 제품들은 디자인이 아기자기하고 견고하기까지 해서 국산에 비해 꽤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제법 잘 팔리는 물건들이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빠듯한 주머니 사정으로 인해 평소에는 잘 사지 못하다가, 친한 친구의 생일 선물을 고를 때 큰맘 먹고 일제 문구점에 가서 귀여운 장식이 달랑거리는 샤프펜슬 같은 것을 사서 포장하곤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쯤인가? 그런 일본 제품들 중에서도 특히 점착 메모지(일명 포스트잇)를 사 모으는 것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남학생들은 그때 NBA농구 카드 모으기에 빠져서 세뱃돈을 탕진하고는 했는데, 여학생들은 대체로 농구 카드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대 유행의 분위기에 편승해 무언가 귀엽고 새로운 것을 수집하고 싶은 마음이 들던 중, 일제 문구점에서 판매하는 예쁜 포스트잇이 누군가의 눈에 들어온 게 아니었을까? 우표, 딱지, 띠부씰, 동전, 구슬, 엽서, 자석 등 무언가 나에게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을 수집하고 자랑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본성인지도 모르겠다.
일제 문구점에서 판매하는 포스트잇은 그동안 우리가 보아왔던 노랗고 네모난 것과는 전혀 달랐다. 3M에서 출시되는 노랗고 네모난 포스트잇만 보다가, 어느 날 출시된 연분홍색이나 하늘색 신제품을 보고도 열광하던 나는 일제 문구점 유리창 너머에 있는 아기자기한 포스트잇 세트에 온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솔직히 말하면 ‘메모지’라는 원래의 용도에는 전혀 맞지 않는 손가락 만한 크기였고, 어떤 것은 아예 글씨를 쓸 자리가 없기도 했다.
붙였다 떼었다가 가능하니 스티커도 아닌 것이! 귀엽고 아기자기한데, 메모할 공간도 없으니 무용(無用)하기까지!! 돌이켜보면 그것은 오로지 ‘수집’을 위한 포스트잇이 아니었을까 싶다.
당시에는 3천 원가량 하는 꽤 비싼 물건이었는데 한 장씩 떼어보면 약 10~20장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과 한 세트씩 사서 교환하면 다양한 모양을 수집할 수 있었다. 저마다 마음에 드는 A4 클리어 파일을 사서, 내지에 포스트잇을 이리저리 배치해서 부착하며 ‘나만의 포스트잇 스크랩북’을 만들어서 가지고 다녔다.
귀엽고 무용한 것을 사랑하는 나의 성향은 그 뒤로도 쭉 이어져 다이어리 꾸미기(일명 다꾸)를 하면서 스티커, 스탬프, 마스킹테이프, 각종 펜들을 수집하는 어른으로 자라났다. 다꾸 용품만으로 이케아 헬머(철제서랍)를 두 개 가득 채울 정도로 수집광이었지만, 두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이 된 후로는 다꾸에 쓸 에너지가 없어서 헬머에 먼지만 쌓여가고 있는 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다이소에서의 소소한 문구류 쇼핑은 그러한 현실의 나를 잠시나마 일제 문구점 앞의 소녀 시절로 데려다주는 타임머신 역할을 한다.
어쩌다 혼자만의 시간이 두 시간 이상 생기면 나는 다이어리와 읽을 책을 챙겨 카페에 가고는 한다. 이제는 경제력까지 갖춘 어른이 된 잡동사니 수집가는 커다란 파우치에서 그날에 꼭 맞는 스티커를 찾아내어 붙이고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딸아이가 자라면 함께 카페에서 ‘다꾸데이트’를 하는 꿈을 꾸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