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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수필기장

로봇청소기 2호 입양기

택배도둑이 될 뻔한 사연

by 계쓰홀릭


요즘 학교에서 교실 청소는 누가 할까?


학교마다 사정이 조금씩 다르지만 요즘은 보통 학생들에게 시키지 않고 청소 용역을 고용하거나 선생님들이 각자 교실을 적당히 청소한다. 1학년 담임을 할 때에는 매일 와서 청소기를 돌려주시는 할아버님이 계셨는데, 6학년 담임을 할 때에는 예산 부족으로 청소 용역을 다 쓸 수가 없어서 각 반에서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하교 후가 더 바쁜 아이들인지라 점심 먹고 난 후 10여 분간 함께 '일인일역'으로 자기 자리 쓰레기를 정리하고, 하교한 후에 담임인 내가 마저 마무리하곤 했다. 커다란 진공청소기가 반마다 있지만 지나치게 큰 소리에 비해 흡입력이 약해 잘 사용하지는 않았다. 큰 교실을 혼자 쓸고 닦는 게 버거워 다른 선생님들의 청소 요령을 검색해 보았다. 교실에 개인적으로 로봇청소기를 두고 사용한 후 신세계가 열렸다는 글이 꽤 있었다.


우리 집에도 비교적 저렴한 가격의 중국산 로봇청소기가 있어 매일 낮 12시면 "예약 청소를 시작합니다"라는 경쾌한 음성과 함께 충전기에서 출발한다. 원활한 청소를 위해 아침 출동(=출근+등교+등원) 준비 시간에 아이들의 장난감과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테이블에 올려놓거나 수납장에 정리하는 것이 중요한 사전 작업이다. 엄청나게 깨끗하게 청소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주기적으로 비우는 먼지통이 꽤나 알차게 차있는 것을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며 왜 요즘 로봇청소기가 -건조기, 식기세척기와 함께- '3대 필수가전'이 되었는지를 실감하곤 한다. 교실에 로봇청소기를 두고 사용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기존에 가정에서 쓰던 것을 기변 하면서 낡은 것을 처분하지 않고 교실에 가져와 쓴다 하셨다. 나도 교실에 하나 두고 사용하고 싶지만 그러기 위해 일부러 기변 하는 것은 과소비인 듯하여 한동안 마음을 접어둔 상태였다.


당근이나 중고나라보다 '무료드림'의 퀄리티가 높은 온라인 카페가 하나 있다. 매주 금요일이면 드림장터가 열리는데, 최근 1년 정도의 드림 이력이 있는 사람만 줄을 설 수 있고 한 주에 한 번만 기회가 있으며 자정이 넘어가면 '불발종료'가 되어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하는 - 나름의 엄격한 룰이 있는 곳이다. 매주 금요일이면 내가 설정해 놓은 알림 덕에 드림게시판의 글을 바로바로 확인할 수 있는데, 지난 금요일에 올라온 물건 중 하나가 바로 '샤오미 2세대 로봇청소기'였다. 당장은 휴직으로 6개월간 출근하지 않기 때문에 약 10초간 망설이며 물건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약하게나마 물걸레 기능도 있고 무려 박스도 있는 - 잘 보관된 - 제품이었다. 게시판에서 정한 양식대로 'O월 OO일 드림 이력 있음.'이라고 쓰기 위해 나의 예전 작성글을 확인하느라 10여 초가 더 흘렀다. 내 댓글과 거의 동시에 하나의 댓글이 더 달렸지만 순서상 내가 먼저였다! 앗싸!!


여러 가지 일정으로 가득 찬 주말, 가족들과 차로 지나가는 길에 잠시 문래동의 ㅎ아파트에 들렀다. 드림하시는 분이 알려주신 동 호수를 확인하고 입구 비번을 여러 번 되뇌며 차에서 내려 낯선 아파트 현관 앞에 도착했다. 그분은 비대면으로 문 앞에 내놓겠다 하시면서 우리 집 차량 번호로 주차등록도 미리 해주시고, 공동현관 비번까지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901#0808을 눌렀는데 틀린 번호라며 경고음이 울렸다. 두 번 더 눌렀는데도 열리지 않아 뭔가 싸함을 감지한 나는 현관문 구석에 네임펜으로 적혀있는 #2020이라는 번호를 발견했다. 0808 대신 2020을 대입해 눌렀더니 문이 스르륵 열렸다.

‘오! 천재!! 주인분이 옛날 비번을 잘못 알려주셨나 보네~’

열려라 참깨를 외치고 도둑들의 비밀 동굴에 들어간 알리바바의 기분이 이러했을까? 9층에 올라가 901호 앞을 보니 택배박스가 두 개 놓여있었다. 음? 두 개? 카페에서 보던 것과 상자의 비율이 조금 달라서 이상했다. 자세히 보니 박스에 옷 브랜드 마크가 찍혀있다. 좀 더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주소가 다르다… 108동 901호를 찾아온 것인데 109동 901호라니! 심장이 마구 뛰었다. 인기척을 느끼고 혹시나 이 집에 있는 사람들이 내다볼까 봐 손에 땀을 쥐며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1층으로 내려와 한참을 두리번거린 끝에 바로 옆동인 108동으로 넘어갔다. 알려주신 비번이 딱 맞아서 순조롭게 901호까지 올라갔더니 카페에서 본 것과 똑같은 로봇청소기 박스가 얌전하게 날 기다리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잘 찾아서 갑니다.'라는 메시지를 보내면서 무사히 물건을 찾아 가족들이 타고 있는 차로 돌아왔다. 그 순간의 나는 마치 미션임파서블 시리즈의 탐크루즈가 된 듯 비장하고 뿌듯한 마음이었다.


예전에 어디선가 나와 비슷한 실수를 한 사연을 본 적이 있다.


'아기 욕조 무료 드림' 물품을 찾아오라는 미션을 받고 남편이 아내 대신 다녀왔는데, 아내가 욕조 잘 받아 간다고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보냈더니 드림하신 분이 '아직 욕조가 집 앞에 있는데 뭘 가져가셨나요?' 하고 답을 보내신 것이다. 이상한 낌새를 느껴 남편에게 받아온 물건을 사진 찍어 보내달라 했더니 그가 보낸 사진 속 물건은 김장용 대형 고무다라이었다. 층을 착각하여 다른 층 사람들이 복도에 내놓은 김장 다라이를 아기 욕조로 쓰나 보다 하고 가져왔다는 것이었다. 하마터면 다라이 도둑이 될 뻔한 남편의 사연은, '아빠에게 아이를 맡기면 안 되는 이유' 시리즈처럼 '남편에게 당근 심부름 시키면 안 되는 이유' 시리즈로 묶여 한동안 회자되었다. 나도 똑같은 짓을 할 뻔 한 오싹한 경험을 하고 나니 '뭐 저런 멍청한 실수를 다 하냐?'라고 오만하게 생각했던 과거의 나에게 가서 정식으로 사과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질 지경이다.

해당 사연 작성자가 올린 이미지

어쨌거나 나는 우여곡절 끝에 로봇청소기 두 대를 보유한 여성이 되었다. 하마터면 택배 두 개를 훔친 도둑이 될 뻔했지만 말이다. 몇 달 뒤 복직을 앞둔 나에게 조금이나마 긴장을 덜어줄 아이템이 되어줄 로봇청소기는 비록 아직 둘 곳을 정하지 못해 트렁크에서 잠자고 있지만, 갑자기 생긴 꽁돈으로 적금을 들어놓은 것처럼 든든하고 뿌듯하다.



*찾아간 아파트 동과 호수, 비번은 모두 숫자를 바꾸어 기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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