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의 수영 입문기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어떤 친구들은 진짜 내가 운이 좋다고 여기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내가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그렇게 느끼는 것이라고도 한다. 이번에 - 경쟁률이 높기로 유명한 - 구립 스포츠센터에 두 아이를 동시에 등록할 수 있었는데, "어떻게 둘이 다 당첨됐어요?"라는 질문에 나는 별달리 할 말이 없었다. "저는 원래 운이 좋거든요."라고 말하면 너무 재수 없으니까... "이번에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겨울이라 비수기이기도 하고... "라며 조금 겸손하게 대답했다.
두 살 터울의 남매를 키우는 나는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다니던 시기부터 지속적으로 수영 입문 시기를 고민했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시작하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코로나가 터지면서 수영장이 다 문을 닫아버렸다. 초등 입학 직후에는 방과 후 교실이며 돌봄이며 적응할 것이 많아서 수영은 잠시 미뤄두었다. 동네에 다니는 수영 셔틀버스만 보면 속으로 '수영은 언제 시작하지?' 하고 숙제를 미뤄둔 아이처럼 초조해했다.
수영학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면서 지인들에게 물어보니, 사설 키즈 수영장은 가격이 비싼 만큼 아이들 씻기고 머리 말리는 것까지 ‘올 케어‘로 이루어지며 집 앞에서 셔틀을 태워준다는 큰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셔틀 시간이며 비는 자리(대기를 걸어두면 순차적으로 전화주는 방식), 아이의 나이와 수영 실력 등을 고려해 보았을 때 몇 군데 전화를 돌려보아도 딱 이거다 싶은 곳이 없었다. 시립이나 구립은 가격이 훨씬 저렴한 대신 부모가 픽드롭을 직접 해야 하고, 스스로 환복 및 씻고 나오는 훈련을 미리 해주어야 한다는 부담이 뒤따랐다. 아는 언니는 딸 둘을 월 2만 원짜리 구립에 1년 정도 보냈고 너무나 재미있게 잘 다녔는데, 나중에 보니 자유형을 할 때 ‘음파음파’를 못하더라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들려주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물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되었으니(음파음파는 나중에 사설 수영장에서 다시 배웠다고 함), 처음에는 저렴하게 시립/구립에서 시작해도 괜찮다고 했다. 관건은 거기에 등록이 가능한가였다. 처음 제비 뽑기로 당첨된 회원들에게 재등록의 우선권이 있는데 대체로 구립은 재등록으로 거의 다 채워지고, 한 두 개 남는 자리마저 새벽에 줄 서서 번호표를 받아야 한다고 하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렇게 열심히 알아보고도 아이의 수영 등록을 주저하던 이유가 사실은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두 아이가 한꺼번에 같은 수영장을 다녔으면 하는 욕심이었다. 초등학생과 유치원생이 함께 다니려니 두 아이의 피지컬 차이도 문제, 반 편성과 시간대가 모두 복잡하기만 했다. 그렇게 고민만 하다 작년 말 혹시 무슨 정보가 있나 하고 우리 동네 구립 스포츠센터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다. 팝업 내용을 잘 살펴보니 2025년 1월을 기점으로 새로운 회원을 추첨하는 제비 뽑기를 진행한다는 공지였다. 마침, 예비초 1도 1월 기준 초등학생으로 여겨주어 둘째 아이가 초등반에 지원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방학 때 다른 학원 스케줄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휴직 기간에도 부담 없이 데려다줄 수 있고, 복직 후에도 - 육아시간을 사용하면 - 불가능하지만은 않은 시간대를 찾아 깨알 같은 글씨의 시간표를 들여다보니 '주 2회 초등 소수정예반'이 안성맞춤이었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남편에게 설명해 주었더니, 둘 중 하나만 붙으면 어쩌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첫째만 붙는 건 괜찮은데 둘째만 붙으면 스케줄이 조금 꼬이게 생겼다. 하지만 미리 걱정하면 뭐 하겠는가? 나는 일어나지 않은 일은 걱정하지 말자는 주의라,
"그건 떨어지고 나서 고민해 봅시다. 추첨 때 대기번호도 뽑아서 미등록자 생기면 순서대로 연락 준대요. 나는 이거 해보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나는 그날 밤 두 아이 모두의 아이디를 만들고 원하는 반에 지원했다.
며칠 뒤, 공지사항에 있던 발표시각에 맞춰 아주 정확하게 문자가 날아왔다. 18:44의 경쟁률을 뚫고 둘째는 바로 당첨되었고 첫째는 대기번호 3번이라고 했다. 나쁘지 않은 결과라고 생각했다. 남편은 대기번호 3번까지 안 오면 어떻게 할 거냐고 했는데 나는 3번 정도면 무난하게 될 것 같다고 여겨서 등록을 강행했다. 일주일 간의 당첨자 등록 기간이 지났다. 순차적으로 대기자 등록이 시작된다던 다음 월요일에 나는 또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수영 예비 순번 대기자 등록 문자>
♥ OOO 스포츠센터 수영 소수반 대기자 당첨을 축하합니다 ♥ …
처음 합격 통보보다 더 기분 좋은 메시지였다.
수영복, 모자, 물안경, 가방, 세면파우치까지 세트로 시원하게 지르고 드디어 처음 수영하러 가는 날! 성별이 다르기 때문에 남편까지 대동해서 승용차로 10여분 걸려 수영장에 도착했다. 접수창구에 필요한 서류를 내고 회원증 두 장을 발급받는데, "등본에 있는 아이 둘 다 인가요? 어떻게 둘이 다 되셨네요?" 하고 축하 인사를 건네는 직원분 덕에 "아, 제가 좀 운이 좋거든요."라고 자랑할 뻔했지만 잘 참아냈다. 지금 생각해보니 축하 인사가 아니라 그냥 사실 확인이었을 텐데 내 귀에는 축하 인사로 들렸나 보다.
첫날이라 탈의실까지 따라 들어가서 이런저런 도움을 주고 나왔다. 1층 로비에서 커다란 모니터로 관찰해 보니 흰 모자를 쓴 내 아이들이 보였다. 열여덟 명이 어째서 소수정예일까? 수준은 어떻게 나누는 걸까? 내내 궁금했는데 그날에 가서야 의문이 풀렸다. 그 시간대에는 열여덟 명의 초등학생과 대여섯명의 유아반 수강생이 전체 레인을 다 쓰는 것이었다. (심지어 유아풀은 별도임) 주차난을 예상하고 갔는데 의외로 주차장이 한산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첫날 아이들에게 수영 강습 경험치를 물어보고 수준별로 나누어 한 강사당 네댓 명씩 데려간 후 본격 강습이 시작되었다.
"혹시 선생님이 물어보시면 꼭 손 번쩍 들고 수영 처음이라고 말해야 해!"라고 당부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진짜 처음 배우는 아이들은 우리 집 남매가 유일한 듯했다. 운 좋게도 가장 다정하신 (유일한) 여자선생님이 남매를 맡아주셨다. 문틈으로 염탐하면서 보았는데, 아이들을 바라보시는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어 안도했다. 첫 수업을 마치고 나온 아이들에게 오늘 어땠냐 물으니, "우리반 선생님은 친절하셔. 옆반에 무서운 선생님도 있던데... 우리는 운좋게 여자선생님을 만났어." 라고 둘째가 말했다. 다음엔 남자선생님을 만날 수도 있고, 무서워 보이는 선생님도 다 너희들의 안전을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거니까 열심히 하면 혼날 일이 없다고 말해주긴 했지만 속으로는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남편과 나는 유년기에 수영장을 조금 다녔지만, 수영 강습에 대해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때 초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나 말고는 모두 남자아이들과 오빠들이었고 젊은 남자선생님은 조금 무서우셨다. 두 달 정도 다니면서 겨우 자유형을 배우기는 했는데, 레인을 몇 바퀴 돌다 보면 내가 맨 마지막에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일 처음 출발했던 1등 오빠의 머리가 내 발 끝에 걸리곤 했다. 잠시 멈춰 서서 다른 남자애들이 다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다시 천천히 출발했던 나는 그때 수영을 배우는 것이 무척 힘에 부치고 괴로웠다. 선생님이 가끔 킥판으로 물 표면을 쾅 내리치는 소리나, 재미로 아이들을 물속에 던져주고 거꾸로 처박는 놀이 같은 것이 다 나를 겁먹게 했던 것 같다. 남편도 비슷한 기억으로 수영장에서는 늘 움츠러들었고 오래 다니지 못했다고 한다.
수영을 좀 더 즐기며 잘하고 싶은 마음에 사회초년생이 되었을 때 다시 초급반에 등록한 적이 있다. 수영을 처음 배우는 척했지만 발차기와 팔 젓기를 본 강사님이 "어? 수영 배우신 적 있죠?" 하셔서 깜짝 놀랐다. 잠시나마 어릴 적 '수영부진아'였던 기억을 떨치고 자신감 있게 물속을 가르며 배영까지 배울 수 있었다. 평영 발차기에서 조금씩 한계를 느끼던 중 - 때마침 수영을 그만둬야 할 서너 가지 이유가 생겨서 - 미련 없이 관뒀지만, 언젠가 기회를 마련해서 다시 수영을 배우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가지고 있다. 최종 목표는 수영을 즐기고 좋아하는 어른이 되는 것이다. 해외여행을 가서 보조 부력 장치 없이 깊은 물에 첨벙첨벙 뛰어드는 사람들을 보면 항상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내 아이들은 이번에 좋은 기회로 스타트를 잘 끊어서 수영을 평생 반려 운동으로 가지고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소수 정예반이어서 구립 치고는 꽤 비싼 가격이지만 둘이 합친 금액이 키즈수영장 한 명의 회비 정도이다. 거기에 엄마 아빠의 픽드롭 서비스까지 추가되었는데 다행히 한 달 다닌 결과 수영장에 가는 것을 좋아하고, 흔쾌히 '재등록'에 동의해 주니 부모로서 무척 뿌듯하고 고맙다. 요즘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긴 '수(水)'자를 넣은 신조어들이 많아졌는데, 우리 집 아이들은 활자 그대로 '수린이' 그 자체인 셈이다.
수린이 - 수영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 수영+어린이의 합성어.
수친자 - 수영에 미친 자.
수친 - 수영장에서 만나는 친구. 적당한 거리감과 사회에서 만나면 한눈에 못 알아본다는 특징이 있음.
아이들을 잘 출발시켰으니, 올해 봄에는 나도 새 수영복을 챙겨서 동네 수영장을 기웃거려 봐야겠다. 새 수영복과 모자, 물안경은 이미 준비되어 있는데 '적절한 몸'이 준비되지 않아서 현재는 다이어트 중이다. 30여 년 전 슬픔과 두려움을 안고 수영장을 왔다 갔다 하던 수린이에게 올해는 수영의 기쁨과 즐거움을 선물해 주는 ‘수른이’가 되어보려 한다. 그 어느 해 보다도 새 봄이 기다려지는 요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