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에세이 『단 한 번의 삶』을 읽고
서지정보
지은이 : 김영하
출판사 : 복복서가
초판인쇄 : 2025년 3월 6일
페이지 : 총 198면
가격 : 16,800원
국내에서 책 좀 좋아한다는 사람치고 김영하 작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보유한 작가인 데다 몇 편은 영화화되기도 했고, 방송에도 종종 얼굴을 내비치는 분이기 때문이다. 글쓰기 모임에 가면 처음 하는 자기소개로 좋아하는 작가에 대한 질문을 받기도 하는데, 그 대답으로 '김영하'를 내놓기는 어쩐지 좀 낯간지러운 느낌이 있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가서 다들 자기만의 취향과 개성을 드러내는 인디밴드 이름을 이야기하는데 혼자 BTS를 말하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김영하 작가의 작품을 다 읽은 것도 아니고, 대체로 베스트셀러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것들이었기 때문에 나만의 고유한 독서취향 같은 건 없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이기도 하다) 그래서 "저는 뭐 다들 좋아하시는 김영하, 정유정 소설 다 좋아하고요, 영화는 애니메이션 좋아하는 데 최근에 본 것 중에서는 '코코'와 '인사이드아웃'이 좋았어요."
그렇다. 나는 무척이나 대중적인 취향을 가진 사람이다. 유재석의 '탑 100 귀' 같은 취향을 가진, ‘탑 10 눈’의 독자이다. 좋아하는 드라마나 영화는 OTT서비스에서 늘 상위권에 링크되어 있다. 진짜 애독가 들은 베스트셀러는 읽지 않는다고 하는데 나는 베스트셀러만 읽기에도 바쁘더란 말이다.
김영하 작가는 SF에는 관심이 없나?
한창 젊은 여성 작가들의 SF소설이 유행하던 때에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그때 마침 김영하의 『작별인사』가 출간되었다. 한 인간의 뇌를 모두 업로드할 수 있는 세상, 인간과 로봇 사이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갈등이 심화되는 미래 사회에서 자신이 안드로이드인 줄 모르던 한 소년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을 다룬 소설이었다. 당시 새로 나온 책을 단숨에 다 읽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나에게 마치 작가가 "어때요? 나 SF도 잘 쓰죠? 이거나 저거나 다 설정의 차이지 결국 다 사람 사는 이야기예요."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김영하 작가는 요즘 에세이는 안 쓰나?
널리 알려진 몇 편의 소설을 읽고, TV에서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을 자랑하는 작가님을 보며 개인적인 호감이 생겼다. 인스타그램에서 작가를 팔로우하고 예전에 쓴 에세이도 찾아보게 되었는데, 에세이라는 것은 소설과는 다르게 '적시성'이 더 요구되는 장르였던 모양이다. 당시에는 상당히 트렌디하고 생생한 글이었을 테지만 그사이 작가님이 여기저기서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언급했기 때문인지 큰 감흥 없이 과제하듯 읽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료 이메일 구독 서비스 '영하의 날씨'에서 연재된 글들을 모아 새로운 에세이집을 낸다는 소식을 듣고 냉큼 구립도서관 사이트에 들어가서 각고의 노력 끝에 희망도서 신청을 완료했다. 이것은 매달 2권의 신간을 도서관 예산으로 구비해 주는 시스템인데, 유명한 작가의 신작은 이미 다른 사람이 먼저 신청해 버려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신간 소식이 들려온 날부터 날짜를 꼽아가며 매일 도서관 아이디로 로그인하고, 온라인 서점에 책 정보가 공개된 뒤에는 isbn을 직접 복사해서 입력하는 등의 정성을 기울인 끝에 도서관 바코드가 붙은 따끈한 새 책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내 손에 어렵게 들어온 이 책을 나는 단숨에 읽어버렸다. 속표지와 목차 사이에 있는 첫 글귀에서부터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힌 채로 말이다.
이 세상으로 나를 초대하고 먼저 다른 세계로 떠난 두 분에게
목차
일회용 인생
엄마의 비밀
아이와 로봇
야로의 희망
우물 정 자 천 개
기대와 실망의 왈츠
테세우스의 배
모른다
스캔들이 된 고통의 의미
이탈
사공이 없는 나룻배가 닿는 곳
무용이 용
인생의 그래프
도덕적 운
어떤 위안
후기와 감사 그리고 '인생 사용법'
부모님이 돌아가셨기에 이제야 털어놓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다. 엄마의 빈소에서 비로소 알게 된 엄마의 처녀 적 직업에 대한 이야기 '엄마의 비밀', 아버지의 기대에 못 미치는 아들이었던 작가와 아들이 기대한 다정함 같은 것을 보여주지 못한 아버지의 평행선을 보여주는 '우물 정 자 천 개'가 그러하다.
그날의 빈소는 마치 소설의 반전과도 같았다. 반전은 독자의 선입견과 자만심을 통렬히 일깨우면서 이야기 전체와 인물을 새롭게 보게 만드는 극적 장치로, 그날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엄마라는 인물에 대해 내가 별로 알고 있는 게 없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p.21 '엄마의 비밀' 중에서
첫 책을 냈을 때 아버지에게도 사인을 해서 한 권을 보냈다. 며칠 후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책을 다 읽었는데 몇 군데 오자가 있더라며 하나하나 불러주었다. 일부는 오자가 맞았지만 대부분은 아니었다. 고맙다고는 했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첫 책을 낸 아들이 듣고 싶어 할 말이 고작 오자 지적일 리가 없지 않은가. 살아생전 아버지가 바란 것과 내가 바란 것은 언제나 달랐고, 우리는 끝내 화해하지 못했다. p.50 '우물 정 자 천 개' 중에서
작가는 '아내를 너무나 사랑해요'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젊은 시절부터 겪은 몇 가지 사건들에 대한 회상을 통해 두 분이 서로를 의견을 존중하고, 실수하더라도 비난하지 않으며 잘 지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요가, 그림, 요리 등 무언가에 관심을 갖게 되면 그것을 오랫동안 꾸준히 해서 결국은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좋은 작가의 덕목에 집요함과 끈기도 빼놓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가가 되겠다고 결심할 때도, 요리를 시작할 때도, 노트에 낙서 같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도, 처음 몇 년은 모두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신은 나에게 집중력을 주지는 않으셨지만 대신 태평한 마음을 주셨던 것 같다. 지금은 이래도 오 년, 십 년이 지나면 그럭저럭 잘할 수 있을 거야,라는 마음. 나에게는 그 마음이 있었고, 참으로 다행하게도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를 때까지 참고 기다려준 사람들이 내 곁에 있었다. p.71 '테세우스의 배' 중에서
내가 쓰고 싶은 에세이, 그 추구미
2년 전 어느 날 브런치를 개설하고, 동네 도서관에서 열리는 에세이 교실과 단편소설 교실의 수강생으로 지내면서 어렴풋하게나마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의 방향을 알게 되었다. 나의 어린 시절과 현재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면서 얻은 삶의 깨달음 같은 것을 잔잔하고 따뜻하게 기록하는 것이다. 소설은 거기에 새로운 인물과 사건을 보태야 하기 때문에 조금 더 고민하고 힘써야 하는 느낌이라면 에세이는 그보다 조금은 더 편안한 일상의 과제처럼 느껴진다. 그런 면에서 『단 한 번의 삶』은 나에게 모범 답안과도 같은 책이다.
나의 고약한 버릇 중 하나는 글의 말미에 '그래서 나는 이런 것을 느꼈고 앞으로 이러저러하게 잘 살겠습니다.' 하는 사족을 붙이는 것이다. 마치 초등학생이 모든 일기의 마지막에 ‘즐거운 하루였다.‘라고 덧붙이듯이 말이다.
김영하 작가의 『단 한 번의 삶』은 그러한 사족이 없어서 뒷맛이 깔끔하다. 글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자기만의 insight를 얻어갈 수 있는 묵직하고 은근한 힘이 느껴지는 산문집이다.
단 한 번의 삶, 단 한 번의 전시
출판사에서는 초판본 몇 부에 한해서 선물로 전시회 티켓을 끼워 넣는 이벤트를 벌였다. 실물 티켓을 소지한 구매자들은 인사동의 모처에서 짧고 비밀스럽게 열리는 작은 전시회에 초대되는 것이다. 그곳에 가면 이 책에 실린 글과 관련된 일러스트 작품과 작가의 개인적인 사진 등을 볼 수 있고, 운이 좋으면 김영하 작가를 직접 만날 수도 있었다고 한다. 산책길을 따라다니는 팬들을 촬영한 영상도 작가의 인스타그램 스토리에서 엿볼 수 있었다.
한때 작가는 #김영하북클럽 을 인스타그램에서 운영하며 매달 책 함께 읽기 운동 같은 것을 펼쳤는데 이는 바로 출판업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거기서 언급된 책의 판매량이 급증하여 품절되곤 했던 것이다. 이런 영향력에 편승하려는 사람들이 해시태그를 오염시키거나 개인적 목적으로 이용하기도 해서 전처럼 갈무리하기가 어려워졌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는데, 아무튼 이 북클럽은 2년가량 이어지다 끝이 났다.
최근에는 ‘복복깜짝북’이라는 이벤트가 있었다. 복복서가 출판사에서는 김영하가 추천한다는 추천서 내용만 소개하고, 제목도 작가도 모르는 책을 일단 판매했다. 독자들은 소개만 보고 무슨 책인지도 모르는 비밀상자를 구매했고, 그 안에 들어있는 책 속 초대 링크를 통해, 등장인물에 대한 라이브 북토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일종의 블라인드 마케팅이다.
‘와, 무조건 김영하를 믿고 사본다는 건가?’ 나는 그 이벤트의 파격성과 상업성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결국 나중에 제목이 알려진 그 책을 빌려서 읽어보고야 말았다.
이렇듯 요즈음 대한민국의 출판산업에서 흥행 보증수표와도 같은 김영하 작가의 영민함과 스타성에 박수갈채와 존경을 보낸다. 글을 잘 쓰는 능력뿐 아니라 작가 고유의 매력이 책의 판매부수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임이 분명한데, 자신의 매력을 대중에게 어필하는 방법을 잘 아는 것도 대단한 재능이다. 다음에는 또 어떤 글과 이벤트로 팬들을 즐겁게 해 주실지도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