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움직이는가

당신은 자기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내고 있는가

by 김세은


1960년 1월 4일 오후

프로방스에서 파리행 기차표를 예매해 두었던 한 남자가 있었다.

그러나 친구 미셸 갈리마르의 간곡한 권유로 스포츠카에 함께 오른다.

그 길 위에서 교통사고가 났고,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가 바로 알베르트 카뮈다.


만약 그가 예정대로 기차를 탔다면 과연 살았을까.

미완으로 남은 『최초의 인간』은 완성되지 않았을까.

그것을 우리는 운명이라 부를 수 있을까!


나는 ‘운명(運命)’이라는 단어를 유심히 생각한다.

‘운(運)’은 돌다, 회전하다의 뜻을 지니고

‘명(命)’은 목숨, 혹은 하늘의 명을 뜻한다.

돌고 도는 목숨, 혹은 하늘이 내린 명령.


그렇다면 ‘명’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니라,

또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1912년 4월, 차가운 북대서양의 칠흑 같은 밤.

타이타닉호는 거대한 몸을 기울이며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누군가는 살아남았고, 누군가는 사라졌다.

생존자들은 물었을 것이다.

“왜 하필 나였는가.”


설명할 수 없는 삶과 죽음의 경계 앞에서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그 단어를 꺼낸다.

그 불가항력적 사실에 운명이라고.


부모와의 인연, 친구와의 만남, 배우자와의 동행.

몽테뉴와 라보에시의 우정처럼

한 번의 엇갈림만으로도 만나지 못했을 인연들.

우리는 수많은 우연이 교차한 그날,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서로를 만난다.


그렇다면 인생은

내가 써 내려가는 소설인가.

아니면 누군가 이미 써놓은 시나리오를

그저 연기하고 있는 것에 불과 한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오이디푸스를 떠올린다.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리라는

예언을 받은 아이. 버려졌으나 살아남았고,

운명을 피하려 도망쳤으나

도망치는 길목에서 예언을 실행해 버린 남자.


교차로에서의 분노,

마차 앞의 사소한 다툼.

그 순간 다른 선택을 할 수는 없었을까.


운명을 피해 달려간 길이

되려 운명의 문을 여는 첫 단추가 된다.


다시 돌아온 그는 왕비(어머니)와 결혼하게 되며

운명은 또다시 참혹한 결과를 낳는다.

그는 결국 자신을 벌하며 눈을 찌른다.

인간의 존재의 근원적인 무력감을 목격하게 한다.


삶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는 쉽게 말한다.

“내 팔자가 그렇지 뭐”

“이번 생은 끝났어.”

현실을 탓하며 좌절을 얘기한다.


점집을 찾고, 타로를 보고,

신문 한 귀퉁이의 오늘의 운세를 힐끗거린다.

불확실함 앞에서 인간은 참으로 나약하다.


그러나 다시 묻고 싶다.

정말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는가.


살다 보면

내가 의지로 밀어붙인 일이 전혀 다른 길로 흘러가고,

생각지도 못한 우연이 방향을 틀어 놓는다.

우리는 통제할 수 없는 영역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끝없이 바위를 밀어 올리는 인간을 말한다.

바위는 다시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그는 또 밀어 올린다.


그 부조리 속에서

그는 자신의 의지를 발견한다.


어쩌면 운명은

우리에게 주어진 ‘패’와 같을지 모른다.

어떤 패를 쥐고 태어났는지는 우리가 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패로 어떻게 게임을 할지는 우리의 몫이다.


“진인사 대천명.”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고 결과는 받아들인다.

체념이 아니라, 최선을 다한 사람의 담담함으로 말이다.


운명이 이미 쓰여 있다 해도 그것이 삶이라 한다면,

바위가 다시 굴러 떨어지더라도

“나는 또 다시 밀어 올려 주마!”


당신은 지금

자기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내고 있는가.


그 질문 앞에 서는 순간,

운명은 이미 조금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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