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목요일, 여고 동창생—이름만 불러도 정겨운 찐 친구들과 방배역 근처에서 만났다.
“우리 어디로 갈까?”
누군가 봉은사를 말하자, 망설임 없이 발걸음이 정해졌다.
추사 김정희가 마지막 숨결로 쓴 글씨도 보고,
홍매화로 물든 봄도 만나자는 제안이었다.
그날의 우리는 마치 봄바람 난 처녀들처럼 설렘을
가득 안고 그곳으로 향했다.
입구부터 사람들로 붐볐지만, 오히려 그 북적임이
봄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음을 실감하게 했다.
형형색색, 알록달록 연등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고,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둔 풍경은 마음까지 환하게 밝혔다.
오르막길을 따라 오르며 나뭇가지마다 몽글몽글 피어난 애기새싹들을 바라보며
벅찬 기쁨의 전율을 느낀다.
홍매화와 산수유, 이름 모를 꽃들까지 저마다의 빛으로 봄을 노래하고 있었다.
그 앞에 서 있자니 탄성이 절로 나온다.
우리는 어느새 나이를 잊은 채, 그저 ‘소녀’가 되어 있었다.
진분홍 홍매화 앞에는 구름처럼 모여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시간을 채집하고 있었다.
우리도 그 속에 섞여 웃음을 찍고, 추억을 담았다.
멀리 보이는 고층 빌딩과 사찰의 지붕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이곳이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자리임을
말해주는 듯했다.
다시 내려오는 길, 봉은사 현판 앞에서 한참을 멈춰 섰다.
추사가 생의 끝자락에서 남긴 글씨, ‘판전’(板殿),
그 묵직한 획을 바라보며, 한 사람의 시간이 어떻게 한 획에 담길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경내 한쪽에 자리한 거대한 미륵대불 앞에서는 발걸음이 절로 느려졌다.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고요했다.
잠시나마 나도 마음을 내려놓고 서 있었다.
따뜻한 봄볕과 살짝 스치는 바람이 어우러진 오후,
우리는 입구가 보이는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문득 학창 시절, 교정의 등나무 그늘 아래서 재잘거리던 우리 모습이 떠올랐다.
희끗해진 머리카락, 웃을 때 깊어지는 주름, 지난 세월의 흔적들,
계단을 오르내리며 절로 나오는 추임새 소리까지.
당이 어떻고, 혈압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들이 대화 사이에 끼어들었지만,
그마저도 정겹고 따뜻했다.
세월이 쌓인 만큼, 서로의 시간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손바닥을 마주치며 깔깔 웃는 우리의 모습을 보니,
그 말이 틀리지 않은 듯했다.
“인생은 60부터라잖니?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막 인생을 시작한 새내기
들인 거잖아!
누군가의 말에 우리는 한바탕 더 웃었다.
웃자, 친구야.
아직도 우리는 충분히 봄이다. 누가 뭐래도,
중고등학교 시절 이야기, 잊지 못할 선생님과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다 보니
시간은 어느새 저만치 흘러가 있었다.
“우리 모두 건강하자.”
그 흔한 말 한마디에 담긴 마음을 서로 알기에,
우리는 오래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졸업한 지 반세기가 훌쩍 넘었지만,
함께하면 우리는 여전히 봄날의 소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