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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이기 앞에서

by 김세은

문명의 이기 앞에서



창밖에는 마치 물이 가득 찬 양동이를 뒤엎은 듯, 거센 빗줄기가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토요일 아침, 가족과 함께 자동차 안에서 유리창을 때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스크린 골프장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골프는 참 변덕스러운 운동이야. “어제는 완벽한 샷을 구사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제 일뿐”이란 광고 문구처럼, 골프는 날마다 다른 얼굴을 가진다.

골프는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보여준다.


다행히 이날은 샷이 잘 맞았다. 어느새 18홀 중 마지막 홀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18홀 첫 티샷을 하려는 찰나, 강력한 폭발음이 들렸다. 동시에 마치 동굴 속에 들어온 듯 어둠이 밀려오고, 크기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잠시 후, 복도로 사람들이 몰려나오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갇혔대요!” 누군가의 외침이 공기를 갈랐다.

10년 넘게 다닌 곳이지만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많이 당황스러웠다.


‘지금 서둘러 계단으로 내려가야 하나? 그냥 기다려도 괜찮을까?’

순간, 나도 모르게 이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조금 지나자, 누군가는 변압기가 터졌다고 했고, 누군가는 음식 준비 중 전자레인지가 폭발했다고도 했다.

웅성거림 속에서 다행히 큰 화재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에 조금 안도했다.


그러나 곧 갇힌 학생에 대한 걱정이 밀려왔다.

3층 학원에 있던 학생이라는데, 혹여 이 상황이 트라우마로 남지 않을까.

‘만약 그 학생이 내 자식이였다면? 내가 그 상황에 있었다면?’

상상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다.


30분쯤 지나자 ‘한전’ 마크가 새겨진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도착했고, 구조대의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크린 골프장 안 사람들은 하나 둘 떠났고, 몇몇만이 남아 사장님과 함께 복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기도, 인터넷도 먹통, 모든 것이 멈춘 공간은 어느새 무기력한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이런 경우 업주는 누구에게 손해를 청구해야 하나요?”

“이건 손실보상인가요, 손해배상인가요?”

누군가 던진 질문들이 허공에 맴돌았지만, 별 소득 없는 말로 이어갔다.


그러던 중, 학생이 구조됐다는 환호성과 박수소리가 복도 너머에서 들려왔다.

너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3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전기가 들어왔고, 건물 옥상 변압기가 터졌다는 원인이 밝혀졌다.


단지 ‘전기’ 하나가 멈췄을 뿐인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제야 깨닫는다.

우리는 얼마나 전기에 의존해 살고 있었는지를.

또 얼마나 전기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아왔는지를.


전기뿐일까?

전화가 끊기고, 인터넷이 멈추면 우리는 외부와 단절된 고립된 존재가 된다.

문명의 이기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무력한가.

우리가 주인인 듯 보이지만, 실상은 지배당하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현실이 새삼 씁쓸하다.


이 작은 사고가 지나간 뒤에도, 여운은 오래 남았다.

삶 속의 ‘전기’와 같은 소중한 것들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잊고 살아가는가.

그 고마움을 미처 느끼지 못하고, 너무도 늦게서야 돌아보게 되는 우리의 아둔함.


문득 대학 시절 강의에서 들었던 이름,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떠올랐다.

그는 19세기 중반, 경제와 문명의 진보에 회의를 품고, 스스로 숲으로 들어가 2년간 자급자족하며 살았다.


그 실험적 삶의 기록이 바로 『월든』이다.

그는 문명의 편리를 의심하고, 삶의 본질을 바라보라 말했다.


오늘의 이 경험은 문명이 던지는 질문처럼 느껴진다.


감사의 마음은 언제나 사라진 뒤에야 찾아오는 것일까


오늘도 사유할 수 있는 마음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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