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했던 거짓말에 대하여
2014년쯤이었다.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며 뒹굴던 나를 향한 엄마의 하소연이 시작되었다.
“지난주에 누구누구 결혼식 다녀왔다. 평생 남의 자식 결혼 축의금만 내게 할 거가? 진짜 결혼 안 할 작정이가? 혼자 늙어 죽을래?”
으. 또 시작된 잔소리. 듣고 있기 힘들었던 난 대충 둘러대는 말을 뱉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주말에 소개팅 잡혀 있습니더. 걱정하지 마이소.”
“그래. 제발 좀 잘해봐라. 애미 진짜 죽겠다.”
하지만 난 그 주의 주말에 대학 동기들이랑 밤 새 술 먹으며 웃고 떠들기만 했을 뿐, 소개팅 따윈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다음 주 월요일에 엄마에게 말했다.
“이번에 만난 아가씨와 또 잘 맞지 않았네요. 좀 기다려 보이소.”
지금의 아내를 만난 것은 2016년 가을이었다. 그전까지 나는 결혼을 보채는 엄마에게 다양한 핑계를 들이대며 거짓말을 하곤 하였다.
부모님에게 한 최초의 거짓말은 오락실과 관련된 것이었다. 유치원도 들어가기 전부터 집 근처에 있는 전자오락실을 들락 거렸다. 돈이 없어도 남들이 게임하는 모습을 구경하거나 게임이 실행되고 있지 않은 오락기 버튼을 마구 눌리면서 내 몸속의 도파민 분비를 만끽하곤 하였다. 하지만 그 시절 여느 부모님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의 부모님들도 내가 오락실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참새가 방앗간에 이끌리듯 오락실로 들어가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고 죽치고 앉아서 전자 오락기 화면을 쳐다보곤 하였다. 분명 엄마나 아버지에게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왔는데 귀신같이 날 찾으러 온 아버지의 화 난 표정을 본 5살 무렵의 기억이 아직도 희미하게 남아 있다.
전자오락실을 향한 내 열정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도 여전하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왼쪽 발이 골절되어 깁스를 한 상태에서도 전자오락실의 출퇴근 도장을 자주 찍었다. 그렇게 전자오락실을 다녀온 후 집에 와서 엄마에게는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였다.
“엄마. 오늘 다리도 아픈데 학원에 너무 오래 앉아 있었더니 힘들었어요.”
이런 식의 거짓말을 하면서 발이 다 나아서도 자주 전자오락실을 갔다. 그러다 중학교 1학년 어느 주말, 오락실에 가던 날 엄마 친구가 목격하고 그날 저녁에 종아리가 터지도록 회초리를 얻어맞고서야 전자오락실 출입을 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엄마나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하는 습관은 고쳐지지 않았다.
처음 치른 교원임용고시에 낙방하고 재수를 하던 2006년. 엄마는 내 자취방에 자주 찾아와서 반찬을 챙겨주며 말했다.
“올해는 붙을 수 있겠지?”
난 사실 열심히 공부하지는 않았다. 대학 때는 빡빡한 전공 강의와 리포트가 많았고 사흘이 멀다 했던 학과 시험 때문에 도서관에서 살다 시피하며 나름 열심히 공부하였다. 하지만 막상 임용 재수를 시작하니, 하루 공부시간을 밀도 있게 보내기가 쉽지 않았다. 열 달 가까운 기간 동안 시험 준비를 하기 위해서는 체계적 학습 계획이 있었어야 했는데 2006년의 난 그다지 치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나의 공부 상태를 물어보던 엄마에게는 항상 거짓말을 하였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결국 난 2006년 12월에 치른 임용고시에도 낙방하였다. 2007년과 2008년에 치른 시험에도 낙방하였다.
임용고시 공부에 올인하기 위해 기간제 교사도 그만뒀던 2009년에는 엄마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내게 큰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그때 당시에도 난 여전히 치밀, 끈기와는 거리가 좀 멀었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사촌 형과 어울려 술을 많이 마시는 바람에 그다음 날 오후까지 책을 손에 잡지 못하기도 하였다. 사귀고 있던 여자 친구와 데이트하느라 공부를 아예 하지 않았던 날도 제법 많았다. 하지만 부모님에겐 걱정을 끼치기 싫었고 기대에 미치지 못함을 알리기는 더욱 싫었다.
“올해는 잘 될 것 같아요. 열심히 하고 있어요. 걱정 마세요. 엄마.”
그러나 이런 거짓말이 무색하게도 난 2010학년도 임용고사에서도 낙방하였다.
1차 발표에서 불합격을 확인했던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합격자 발표 시간이 지나자마자 엄마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화로 내 불합격 소식을 전하자 엄마는 나를 막 나무라면서 고함을 질렀다.
“애미는 그냥 구포다리에 올라가서 확 떨어져 죽어 버릴 거다.”
말문이 막혀 멍하니 있으니 아버지에게서도 전화가 걸려 왔다.
“너 잘하고 있다 안 했나? 그딴 식으로 하려고 다니던 학교 때려치운 거였나? 에라이!”
아버지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나의 대꾸 따위는 듣지도 않은 채 전화를 끊어 버렸다.
위로의 말을 가장 듣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가장 호된 질타를 당했다. 나의 게으름과 거짓말 때문에 벌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죄책감의 늪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
아버지는 1950년 경상북도 경주에서, 엄마는 1954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두 분 모두 한국전쟁 직후 가난한 시골의 형제 많은 집에서 태어나 내 조부님과 외조부님으로부터 온전한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하였다. 아버지 표현에 따르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애를 그저 낳기만 했을 뿐이었다고 했다. 먹고 배우고 자는 것은 아버지 형제자매들이 각자 알아서 해결했어야만 했고 그건 외삼촌 형제들이 많았던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자아 존중감(당시에는 이 용어 자체도 쓰질 않았겠지만) 같은 것은 애당초 길러질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 하나를 확대 해석하여 그것이 자신을 저격하는 것이라는 판단 하면서 전전긍긍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아무 의도 없이 한 행동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내게 몽둥이를 들며 버릇없는 놈이라 고함을 지르곤 했던 아버지가 딱 그랬다. 난대 없이 두들겨 맞지 않기 위해서는 아버지 앞에서 말 하나도 조심스럽게 해야 했고 학교에서 어떻게 지내냐는 아버지 질문에 대해서도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적당히 창작하여 답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 성적에 대한 부모님의 기대도 너무 힘들었다. 아버지와 엄마는 당신들의 삶을 아들의 삶에 투사한 정도가 높음을 내 앞에서 숨기지 않았다. 상을 받아 오면 기뻐하셨다. 하지만 시험 성적이 좋지 못하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내게 화를 내었고 몽둥이로 때릴 때도 많았다. 아들이 시험에서 문제를 많이 틀리면 자신들이 많이 틀린 것이고 자신들이 부정당한 것이라 여기며 참지 못하는 것 같았다.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학기말 성적이 중학교 때에 비해 형편없이 떨어졌음을 확인했던 아버지는, 날 팬티만 입힌 채 집 밖으로 쫓아내어버렸다. 그 후로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나는 학교에서 발송하는 성적표 봉투에 우리 집 주소가 아닌 엉뚱한 집 주소를 적었다. 그리고 부모님에게는 학교에서 더 이상 종이 성적표가 발송되지 않는다는 거짓말을 하였다.
일곱 번의 도전 끝에 임용고시에 합격했을 때 엄마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엄마와 아버지는 내게 그다음 퀘스트인 결혼을 강요하였다. 결혼 이후에는 사흘이 멀다 하고 손주 보여 달라는 얘기로 이어졌다. 그때마다 나는 부모님이 듣고 싶어 하는 거짓말을 하였다.
부모님이 하라는 대로 다하였고 지금은 부모님이 원하는 내 인생 퀘스트는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내가 부모님께 정직한 말을 하는 아들이 된 것은 아니다. 아버지와 엄마는 내가 현재 육아휴직 하고 있는 것도 알지 못한다. 부모님에게 뭔가를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어색하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부모님의 기대대로 살아왔던 시간이 많았다. 부모님의 기대를 의식하며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애썼던 시간들이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지는 않으나 그리 사는 것 역시 내가 결정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제 와서 부모님을 원망할 마음은 없다. 당신들의 기대대로 살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은 아니라는 확고한 의지를 표현하지 않았던 것도 내 선택이다.
인간은 누구나 신경 세포 속에 거울 뉴런이 있다. 상대의 행동을 따라 하면서 감정을 공유하는 능력을 갖고 있기에 상대가 변하면 자신도 변할 수 있는 확률도 높다. 이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변화의 시작을 반드시 부모부터 하라는 법은 없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나의 학기말 성적표를 보며 아버지가 때리려 했을 때 내가 만약 아버지 손을 막으며 “맞기 싫어요! 때리지 마시죠.”라고 말했다면 나와 아버지의 관계가 어떻게 변했을까? 다른 사람에게는 하지 못하는 얘기를 내 부모님에게만은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행운을 나도 누리고 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
며칠 전, 우리 집 쌍둥이들이 장난감 하나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아들이 딸의 얼굴을 손으로 밀었다. 나는 먼발치에서 다 지켜보았지만 잠깐 동안 모른 채 하고 있었다. 딸은 내게 쪼르르 달려와 울먹이며 얘기했다.
“아빠. 서준이가 또 때렸어요.”
그러자 내가 보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던 서준이가 말했다.
“아니에요. 저 안 때렸어요.”
아. 이건 아빠인 내 탓이다. 딸보다 상대적으로 힘이 센 아들이 딸에게 물리력을 행사할 때 내가 목소리를 높여 혼을 내다보니 아들 입장에서는 꾸중이 듣기 싫어서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거였다. 저라고 어찌 사랑만 받고 싶지 않겠는가. 누군가를 때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해야 하지만 부모가 그것을 아이에게 전달하는 방식이 부적 자극이면 아이는 일단 그것을 회피하는 방법부터 찾게 된다.
난 내 아들과 딸이 나이가 들어도 내게 솔직하고 편하게 대해줬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딸이 내게 고자질했던 그날, 난 아들에게 비유를 들면서 누군가를 때리는 것이 왜 위험한지를 말하였다. 최대한 부드럽게 말하려 애썼지만 비슷한 일이 또 발생할 수도 있다. 그때 아들이 또 거짓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또 아이를 통해 나라는 사람의 자존감이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하겠지.
오늘 저녁에는 밥을 먹던 아들과 딸이 서로 장난을 치다가 밥 먹던 식판을 엎어 버렸다.
나는 욱 하는 마음을 참고 걸레질을 하며 말했다.
“괜찮아. 얘들아. 이제부터 조심하면 되는 거야.”
불자(佛子)는 아니지만 마음으로 반야심경을 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