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고, 달리며, 생각하기
직장 사람들과의 회식 자리였다. 한때 친했지만 지금은 서먹해진 그가 나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다. 난 의도적으로 그와 약간 떨어진 대각선 자리에 앉았다. 그의 접시에 담긴 소고기 수육에서 김이 모락모락 났다. 먹음직스러웠지만 같이 먹자고 말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어지러운 꿈을 꾸다 눈을 떴다. 내 왼편에 누워 내 겨드랑이에 자그마한 손을 넣은 채 세근 세근 자고 있는 딸의 머리맡에서 휴대폰 진동음이 연신 울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왼팔을 쭉 뻗어 더듬거렸지만 휴대폰이 한 번에 손에 잡히지 않았다. 딸이 뒤척거리며 짜증 어린 신음을 내고 나서야 겨우 휴대폰 오른쪽 키 버튼을 찾을 수 있었다. 알람을 끄고 폰 화면을 보니 시간은 새벽 5시.
어제저녁의 일이 떠올랐다. 비가 그치고 날씨가 제법 쌀쌀했던 초겨울 날씨였지만 얇은 반 팔을 입고 낙동 강변을 14km 넘게 달렸다. 차가운 맞바람이 내 오른쪽 손등과 팔을 너무 냉각시켰던 탓에 10km 시점 이후부터 오른쪽 팔과 손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던 기억이 났다. 어제 무리해서 달렸으니 오늘 아침은 좀 쉬자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의 타협 끝에 다시 딸의 오른편에 누웠다. 하지만 20분 넘게 뒤척여도 잠이 오질 않았다.
‘그냥 오늘도 달리자.’
눈을 비비며 운동복을 입고 신발장에 있던 운동화를 꺼내어 신었다. 어제 낙동 강변을 달릴 때와 같이 반 팔과 반 바지에 운동복 상의만 걸치고 아파트 밖을 나왔더니 새벽 한기가 확 다가왔다. 어젯밤보다 기온이 더 내려간 아침부터 또 찬바람을 맞기는 싫었다. 가벼운 뜀박질로 몸을 풀며 곧장 아파트단지에 있는 헬스장으로 갔다. 작년 겨울 이후 오랜만에 온 아파트 헬스장에 왔는데 트레드밀 중에서 제대로 작동하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일찍 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트레드밀 위를 올라갔다. 그런데 그 트레드밀은 고장만 나지 않았을 뿐, 속도 표시 계기판과 러닝 벨트 회전 속도는 서로 전혀 맞지 않았다. 실내 달리기라도 내가 달린 기록은 반드시 남겨야 직성이 풀렸다. 왼 손목에 찬 스마트 워치에서 나이키 러닝 앱을 실행시켜 실내 러닝 모드로 맞췄다. 트레드밀 속도는 코로만 숨을 들이쉬고 내쉴 수 있을 정도까지만 올린 채 오늘의 러닝을 시작하였다.
달리기 시작하고 10분쯤 지났을까? 스마트 워치에서 알람 멘트가 나왔다.
“시간 12분 40초. 거리 2 킬로미터. 평균 속도입니다. 킬로미터당 6분 20초.”
슬슬 땀이 나기 시작해서 입고 있던 긴팔 운동복을 벗어 오른편 트레드밀의 손잡이에 걸쳐두었다. 남아 있던 약간의 졸음마저 사라지며 내 머릿속 의식의 흐름도 스포츠 모드로 전환되어 단순해지기 시작했다. 허벅지와 종아리에도 탄력이 붙기 시작하였다. 회전하고 있는 러닝 벨트에서 가끔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긴 했지만 러닝을 지속하는 데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어 움직임은 리드미컬하게 유지되었다. 달리는 움직임이 일정한 페이스를 찾고 들숨과 날숨의 평형화를 이루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고요한 패턴의 달리기가 지루한 느낌으로 변하려 할 때 머릿속에 지난밤 꿈의 스토리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또 간밤의 꿈에 나온 이유는 뭘까? 나와 같은 테이블의 대각선에 앉아 있던 그의 접시에 담긴 소고기 수육이 먹음직스러웠지만 같이 먹자고 말할 용기를 내지 못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최근 들어 직장에서 그와 함께 있던 순간, 같이 나눈 대화들을 떠올려 보았다. 6개월간 휴직하고 돌아온 뒤로는 그와 예전 같은 케미를 나누며 얘기한 기억은 없었다. 그래도 어젯밤 꿈이 내게 던지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는 잘 떠오르지 않았다.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 이따가 챗-GPT에게 꿈 해몽이나 부탁해야겠다 생각하며 스마트 워치를 보았다. LCD화면상으로 거리 7.5킬로미터, 속도 6분 15초/km 표시가 보였다. 심박수는 분당 160회가 넘어가고 있었다. 심박수는 최대 심박수의 60~70%까지 만으로 유지되는 이른바 존 2 영역의 달리기를 하려고 코로만 호흡을 한 것인데 새벽부터 또 오버페이스를 했나 보다. 그래도 별로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대로 10km만 달리자.’
어느덧 트레드밀 위를 달린 지 한 시간이 넘고 있었다. 눈썹 위에서 흐르기 시작한 땀은 이제 입고 있던 반 팔 티셔츠 모두를 적시고 있었다. 흙탕물의 부유물들이 돌아다니다 물아래로 가라앉으며 혼합물의 층 분리가 일어난 것처럼, 어지러운 생각들은 땀과 함께 트레드밀 바닥으로 떨어져 머릿속은 점차 깨끗해졌다. 이전 달리기를 마친 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았고 날씨도 추워서 망설였지만 역시 달리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계란 스스로 규정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스치며 간밤의 꿈을 해석하는 힌트가 떠올랐다.
‘그와 나 사이의 거리. 풀고 싶지만 해결되지 않는 감정. 이 모두가 나 스스로 만든 벽은 아닐까? 꿈속에서 그의 접시에 담긴 고기를 먹고 싶었던 것은 그와의 친밀감 상실에 의한 마음의 허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아무런 바람도 욕심도 없을 때 가까워진다는 어느 노래 가사처럼, 달리기를 통해 뭔가를 이루려고 하는 욕심이 없어지면서 달리는 행위는 나와 땔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와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도 그에 대한 나의 지나친 바람 때문이었다. 달리기가 친숙해지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 것처럼 그와 다시 가까워지려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관계가 회복되지 않는다 해도 그 역시 뭐 하는 수 없다.
‘어찌할 수 없는 것은 어찌하려 하지 말자.’
꿈과 관련된 생각을 정리하면서 스마트 워치를 보았다. 이런. 오늘은 일찍 출근해야 하는 날이다. 트레드밀 전원 버튼을 off로 돌리고 급히 헬스장 밖으로 뛰어나왔다. 바쁘게 씻어야겠지만 그래도 달린 거리 10km를 적립했다는 생각에 뿌듯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꿈 때문에 심란했지만 달리면서 어느 정도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트레드밀 땡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