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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 그리고 달리기

새벽 러닝을 하며…

by 한슨생

삐걱대는 소리를 내는 불투명 유리문을 힘겹게 열고 중국집 안으로 들어가서 가게 한쪽 구석 테이블에 엄마와 내가 마주 앉았다.

가장 먼저 나온 음식은 볶음밥이었다.

나는 너무 배가 고팠던 나머지 맛을 느낄 틈도 없이 볶음밥을 입으로 허겁지겁 밀어 넣는데 엄마는 그런 날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이어서 나온 음식은 짜장면. 곱빼기 그릇에 한가득 나온 짜장면 위에 고춧가루를 좀 뿌리고 대충 비벼서 내 입속으로 쑤셔 넣다 시피해서 헐레벌떡 다 먹어 치우기 무섭게 중국집 서빙원이 간자짱을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다. 날 쳐다만 보던 엄마는 그제야 한마디 한다.

“야. 배 안 부르냐?”

하지만 난 엄마의 말을 들은 척하지 않고 간짜장을 비벼서 쩝쩝 소리를 내며 한 그릇 모두를 먹어 치웠다. 그런데도 예상했던 만큼 배가 부르질 않았다. 포만감은 느껴지는 대신 머릿속에 걱정 하나가 피어나기 시작하였다.

‘아. 몸무게 엄청 불어나겠네. 이거 다시 빠지게 하려면 얼마나 더 달려야 하나.’

체중 증가에 대한 걱정과 러닝에 대한 고민을 하며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분홍색 극세사 베개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꿈이었다.


시간은 새벽 5시 20분. 화장실 불을 밝히고 실눈을 뜬 채 휴대폰을 들고 오늘 꾸었던 꿈에 대한 해몽을 챗 GPT에게 부탁해 보았다. 요즘 들어 부쩍 친해진 내 친구 GPT는 내가 꾼 꿈의 내용을 분석한 이후 다음과 같은 조언을 보여 주었다.


현실에서 무언가를 계속해서 추구하고 있거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감정이나 몸의 신호를 무시하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당신이 현재 누리고 있는 성취나 즐거움을 인정하면서도, 과도한 욕심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문제를 미리 대비하고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과도한 욕심?’

가뜩이나 늦가을 이후 새벽에 일어나는 게 힘들어졌고 특히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등교지도 하는 날이라 달리러 나갈까 말까 고민을 하고 있었다. 혹시나 근래 들어 10km 이상 뛴 게 여러 번이라 과도한 욕심을 경계하는 꿈을 꾼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에잇!”

눈을 질끈 감고 신발장 상단의 러닝화를 꺼내었다.


새벽에 늘 달리던 아파트 조깅 코스를 따라 달리기 시작하였다. 시간은 5시 40분. 아직 해뜨기 전이라 가로등만이 아파트 보도블록과 아스팔트를 밝히고 있다. 대략 7분 정도 지났을까. 스마트 워치에서 알림음이 들려온다.


“시간 7분 20초. 거리 1 킬로미터. 평균 속도입니다. 킬로미터당 7분 20초.”


지난주 이 시간에는 킬로미터당 5분 40초대로 달렸는데 오늘은 왜 이렇지? 어제저녁 식사 시간에 배가 고파서 밥을 여러 번 퍼 먹었지만 술은 마시지 않았다. 더구나 어제 아침에는 달리기를 생략했다. 하루 거르고 달리면 보통은 스피드가 더 빠르게 나오는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몸이 무거운 느낌도 없었는데 다리가 더 빨리 움직여지지 않았다.


“시간 14분 40초. 거리 2 킬로미터. 평균 속도입니다. 킬로미터당 7분 20초.”


뛰는 거리가 늘어도 스피드는 그대로다. 오늘은 집에서 7시에 출발해야 하니까 러닝은 6시 30분까지 밖에 못한다. 그냥 뛰는 과정 자체를 즐기자. 스피드는 포기.

11월 중순을 향하는 새벽인데도 공기가 그리 차갑지 않았다. 달리기 시작한 지 30분이 지나면서 이마에 땀이 이슬처럼 맺힌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지나가기 시작했다.


‘학급 당 35명에 14개 반을 자랑하는 1학년 과학탐구실험 과목 채점 진도가 나가질 않는데 어쩌지?’

‘어제저녁 와이프랑 밥을 먹을 때 왜 그렇게 우울한 감정이 들었던 것일까?’

‘김상욱 교수의 책을 읽고 후기를 멋지게 쓰고 싶은데 첫 문장을 어떻게 살려보나?’

‘읽고 싶은 책 리스트들 중에 어떤 책을 먼저 읽을 것이며 어떻게 읽을 것인가?’

2024년 읽은 책 중에 단연 베스트. 달릴 때 책 내용이 자주 생각난다.

한 생각으로부터 다음 생각이 논리적으로 연계되어 꼬리에 꼬리를 무는 패턴이 아니었다. 띄엄띄엄한 생각들은 서로 분절되어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이지 않고 머릿속을 제 마음대로 표류기 시작했다. 잡동사니를 다 모아놨지만 그럴듯한 물건 하나 만들 수 없는 어지러운 공구함 속 같았다.

하지만 40분을 넘기다 보니 뜀박질의 걸음을 하나씩 내달을 때마다 생각의 파편들이 땀과 함께 몸 밖으로 흩어져 나갔다. 마음이 고요해지면서 잡다한 생각들도 더 이상 머릿속에서 피어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불현듯 입에서 어떤 단어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에릭 캔델. 기억을 찾아서. 통찰의 시대. 다마지오. 느낌의 진화....”


리드미컬한 속도로 내뱉은 혼잣말은 다름 아니라 앞서 생각했던 읽고 싶은 책 리스트의 저자와 제목들이었다. 이미 한번 가졌던 생각이었지만 고민은 또다시 생기기 시작했다.


‘무슨 책을 먼저 읽는담?’


순간, 외부 도로와 아파트 주차장을 이어주는 아스팔트 러닝 코스에 웅덩이처럼 움푹 파인 지점이 나왔다. 원래 코로만 숨을 들이쉬고 내어 쉬는 존 2 러닝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넓은 보폭으로 점프하듯 웅덩이를 뛰어넘으며 심호흡을 하였고 그 탄력을 이어 스피드를 내기 시작했다. 정면으로만 향하던 시선을 잠시 오른편으로 돌렸다. 아직 해뜨기 전이라 아파트 외부 담벼락 넘어 옹기종기 모인 건물에서 다양한 크기의 무질서한 배열의 불빛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넓지 않은 비탈길에 촘촘한 간격으로 들어서있는 연립 주택 건물들. 일조권이나 주변 인프라 따윈 고려하지 않고 외딴 산비탈에 아무렇게나 지어진 집들을 보며, 부동산 관련 업자들의 욕심에 대해 생각하는 찰나 스마트 워치에서 알람이 울린다.


“시간 48분 30초. 거리 7 킬로미터. 평균 속도입니다. 킬로미터당 7분 00초.”


이런. 더 뛰다간 오늘 교문 지도 근무를 늦게 시작할지도 모른다. 뜀박질하는 걸음을 황급히 우리 집 쪽으로 옮기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부지불식간 또 어떤 상념이 떠오른다.


‘사람들 욕심으로 아무 곳에나 아무렇게 집을 짓는 것.’

‘내 욕심으로 일관성 없이 책을 아무렇게 구입하여 어떤 책들도 끝까지 다 못 읽는 것.’

‘과학 수업에서 의욕에 넘쳐 다양한 프로젝트를 시작했지만 끝까지 제대로 맺는 사례는 얼마 없는 것.’


연립 주택의 무질서한 배열을 보며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하기 전에 나부터 돌아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래서 간밤에 그런 꿈을 꾼 것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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