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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 관하여

우리 안의 파시즘을 없애려면...

by 한슨생

지난 2월 20일. ‘시간’으로 구속 실질 심사 기간을 계산한 법원(정확히는 서귀연 판사) 초유의 배려로 인해 윤석열이 석방되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이 일반 상식을 보기 좋게 걷어차 버리던 사례가 비일 비재하다 보니 ‘어휴. 이놈의 나라가 역시나 그렇지’하는 마음에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그냥 살던 대다수의 국민들에게도 윤석열의 석방은 윤석열의 계엄 선포만큼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상식이 지켜질 것이라는 믿음이 이렇게 짧은 기간 사이에 이렇게도 많이 이렇게도 어이없게 깨져 버리다니. 그리고 윤석열 파면에 대한 헌법 재판소의 최종 선고는 왜 이다지도 미뤄졌던 것인지...믿음만큼 소중한 것도 없지만 믿음만큼 허무한 것도 없다는 것을 연일 뼈아프게 확인하는 중이다. 그런데 뉴스에서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내 믿음이 헛된 것이었음을 확인하면서 깊은 실의에 빠진 적이 있다.


10여 년 전. 빌런 교장이 은퇴하고 A 교장이 취임했을 때, 나를 비롯한 다수의 교사들은 학교가 드라마틱하게 바뀔 것이라 믿었다. A 교장은 평교사 시절부터 열린 사고를 하고 있었고 나와 함께 독서 토론모임을 하며 나와 비슷한 교육 철학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A 교장이 취임한 지 6개월도 지나지 않아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우리 학교에서 근무하던 다수의 비정규직 교사들은 A 교장이 취임 직후, 불분명한 이유로 재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다. 빌런 교장과 교감의 비위를 맞추며 힘없는 젊은 비정규직 교사들에게 자신의 업무를 전가하던 늙은(그리고 젊은) 꼰대 교사들은 A 교장이 취임 이후에도 여전히 학교의 중요 의사 결정을 하는 역할에 임명되었다. 체육복을 입고 등교하던 학생들에게 교복 등교를 강요하는 바람에 학생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받아 빌런 교장도 자신의 의견을 철회했었다. 그런데 A 교장 취임 이후 다시 그 강제적인 교복 등교가 부활하였다. 교장이 바뀌었지만 교직원들의 의무적인 8시간 초과 근무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당시 나는 고3 담임에 주당 수업이 18시간이었다. 학교에 늦게까지 남아 자습하는 고3 학생들을 감독하기 위해 최소 일주일에 한 번 이상 학교에 밤 10시까지 남아야 했다. 같은 학교에 있으면서 담임 업무를 하지 않고 주당 수업이 14시간도 채 되지 않는 교사들을 보면 상대적 박탈감이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밀려 올라왔다. 그러나 교장이 바뀌어도 교사들 간의 업무 불균형 문제는 전혀 해소되질 못했다. 그 뒤로 여러 명의 교장이 새로 부임하였지만 학교 근무 환경은 크게 달라지질 않았다.


올해도 나는 고3 담임교사 업무를 맡았다. 입시 상담 때문에 3월 한 달 내내 밤 9시 이후에서야 퇴근하였다. 와이프는 3월 말의 어느 날 내게 전화를 걸어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기침이 끊이질 않는 딸과 연속되는 치과 치료를 받으며 날마다 우는 아들의 성화를 혼자서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었다. 마음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나는 상담해야 하는 학생들을 놔둔 채, 학교를 벗어났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 차 안에서 클래식 FM을 들으며 곰곰이 생각하였다. 어느 직장이나 그 직장을 다니는 직장인으로서의 소명은 저마다 다 갖고 있다. 그러나 직장의 삶이 내 가정의 삶을 잠식하고 내 개인 시간을 앗아가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면 이건 노예로서의 삶을 자인하는 꼴이다. 더 행복해지기 위해 어렵게 들어온 학교라는 직장인데 나날이 더 고통스러워지는 이유는 뭘까?


학교 사회의 구성원은 원칙적으로는 모두 수평 관계에 있어야 하지만 우리 학교와 같은 사립 고등학교 대부분의 교직원은 철저한 상하 관계의 질서하에서 일한다. 수직적 문화 형성의 원인으로는 우선 비정규직 교사의 재계약 과정을 들 수 있다. 학교는 최고 관리자인 교장과 부관리자인 교감, 그리고 회계 책임자인 행정실장이 학교의 중요 의사를 결정한다. 그리고 교장 및 교감이 임명한 특정 부서의 부장 교사(대부분이 정규직)는 학교 실질 운영을 판단하여 결정 집행한다. 일반 평교사들은 특정 부서의 계원으로서 수업 이외의 부서 업무를 부장 교사가 세운 계획에 따라 실행한다. 그런데 그 평교사들 중에서 매년, 계약을 갱신해야 하는 비정규직 기간제 교사들은 부장 교사의 눈치를 항상 살필 수밖에 없다. 특정 기간제 교사의 재계약 여부는 학교장이 최종 판단하여 결정하는데 그 과정에서 부장 교사의 평가가 중요 판단 근거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기간제 교사들은 부장 교사들을 일반 사기업의 직장 상사 대하듯 ‘부장님’이라 부르며 그가 시키는 대부분의 일을 군말 없이 수행한다. 그 부장님이 결정하는 일에 반기를 드는 기간제 교사는 사립 고등학교에서 오래 살아남기 어렵다. 그러면 부장 교사를 비롯한 정규직 교사들은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일할 수 있느냐? 그렇지가 않다. 성과급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학교 교사들은 매년, 자신의 업무 성과나 근무 태도, 교육 활동 성과 등을 평가받고 S, A, B 중 하나의 결과를 얻는다. 그에 따라 차등적인 돈을 보너스로 받는데 그 차이가 너무 크다. 그리고 성과급의 결과는 교장, 교감에 의한 평가 그리고 부장 교사 보직 여부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 아무리 정교사라 한들, 더 많은 보너스를 의식한다면 교장과 교감의 권위에 함부로 도전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이 모든 것은 내가 너무 예민해서일 수 있다. 학교의 불합리성을 다른 사람들도 다들 인지하지만 나만 유독 직장 이상의 의미를 부여해서 이런 느낌을 받는지도 모른다. 나만 나 스스로가 특별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현실과 이상의 괴리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것은 아닌가?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나의 유별성에 대해선 옳고 그름의 판단은 하지 못하겠다.

그런데 내가 유별나게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는 위와 같은 요인들은 사실 학교에서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겉보기 이유에 불과한 것 같다. 학교에서 지내는 시간이 힘든 눈에 드러나지 않는 진짜 이유. 그건 바로 입시 위주 경쟁에만 혈안 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교육 체제에 있음을 나는 확신한다. 90년대 후반,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시절에서부터 지금까지 고등학교 교육과정과 입시 제도가 여러 번 바뀌었지만 우리 교육의 거대 담론은 예나 지금이나 오직 하나다.


‘옆에 있는 친구를 밟고 올라서야 네가 더 비싼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지금 참아라.’


매년마다 우리나라의 각 대학교에서는 입학생 선발 계획을 발표한다. 대학에서 제시하는 입학생 선발의 기준을 제시하는 기본 취지는 ‘고교 졸업생 중에서 이 기준에 도달한 사람들만 입학을 허가하겠음’을 밝히기 위함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대부분의 고등학교에서는 그것을 ‘저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학생들을 더욱 몰아붙여야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에 간의 평균 임금 격차도 매우 크고 그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매우 차별적이다. 자연스럽게 대한민국 교육 환경은 좋은 대학의 좋은 학과를 입학하기 위한 경쟁 구도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런 경쟁 교육 체제하에서는 고교생들이 배움의 의미를 되새기려 하기보단 돈이 되는 대학 학과에 진학하기 위해 다른 친구보다 성적을 한 등급이라도 더 올리려는 강박증에 시달릴 확률이 높다. 학교 구성원들도 다른 학교의 학생들보다 더 많은 학생들을 명문 대학교로 진학시켜야 학교의 이름값이 올라가고 자신의 가치도 달라진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교사들 역시 강박증에 시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대한민국의 정규 교육과정 하에서 우리나라의 교육 이념인 ‘홍익인간’ 정신을 운운하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 찾기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훌륭한 교장이라 한들 대한민국의 경쟁 교육 환경의 영향을 어찌 벗어나겠는가. 10년 전의 교장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가 큰 실망을 했던 나 자신을 돌이키며 반성한다.


독일의 히틀러와 나치 독일 군국주의자들은 2차 세계대전 동안 유대인, 슬라브족,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등 1,000만 명 넘는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나치 독일과 히틀러는 사회적 다윈주의라는 잘못된 신념에 근거하여 우월한 게르만족 보다 경쟁적으로 열등한 민족들은 모두 제거해도 마땅하다 생각했기에 홀로코스트 같은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인들은 본인들이 한 잘못을 통렬히 반성하면서 히틀러 파시즘의 기본 토양이 인간을 무한 경쟁 구도로 몰아붙이는 교육임을 자각하였다. 그래서 교육 개혁의 캐치 프라이즈로 내 걸었던 것이 바로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라는 정신이었다. 그 덕분에 대학을 나오든 나오지 않든 동등한 인격체라는 인식이 현재 독일 사회의 일반적 통념이 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의 교육은 수십 년 전부터 지금까지 ‘야만적인 경쟁 구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착한 일을 하더라도 공부를 못하면 칭찬을 못 받고 아무리 나쁜 일을 하더라도 공부 잘하면 그냥 넘어가는 우리나라 학교에서 12년 과정을 마친 학생에게 과연 민주 시민 정신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 교육에서 아무리 판사, 검사가 나온다 한들 힘없는 약자를 위해 헌신할 법조인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한국의 12년 교육과정을 거쳐 의대를 진학하여 의사가 된다 한들 병든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심의(心醫)는 과연 몇이나 될 수 있을까? 2400원을 횡령한 버스 기사는 해고 판결을 하면서 판검사는 아무리 나쁜 짓을 하더라도 제대로 판결하지 않는 판사들. 그리고 의사 수를 늘리려고 하면 온갖 구실로 태업하는 의사들. 본업의 소명 의식 따윈 내 던진 친 채, 자신의 영달에만 매달려 경쟁 구도의 상위에 랭크된 자신을 뽐내며 살기에 바쁜 이들. 모두 다 우리 교육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방증의 결과물이다.

김누리 교수님의 뼈아픈 통찰.

그런데 ‘야만적인 경쟁 구도 교육’이 최악인 것은 판검사나 의사 및 저명인사로 자란 학생들뿐만 아니라 모든 교육 수혜자들의 마음속에 파시즘의 싹이 자라게 한다는 것에 있다. 윤석열의 2024년 계엄을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대한민국이 아직 민주 공화정에 의해 운영되는 국가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대한민국 경쟁 교육으로 인해 내면에 뿌려진 파시즘의 씨앗이 윤석열 탄핵 정국을 계기로 움트게 되어 파시스트 본성을 만천하에 드러낸 사람들을 우린 매우 많이 보았다. 2025년 4월 4일에 윤석열은 파면되었고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윤석열의 내란에 동조한 세력들 역시 자신들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를 것이다. 하지만 경쟁 위주의 우리 교육이 바뀌지 않는 한 또 다른 윤석열과 그를 추종하는 파시스트는 언젠가 또 우리 앞에 등장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정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믿음’이 배신당하지 않으려면 학교 교육부터 바뀌어야 한다.

윤석열은 파면되었지만 우리 안의 파시즘은 아직...

평소, 교무실에서 극우 정당이 아닌 진보 정당을 지지하는 자신의 성향을 잘 드러내던 선생님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도 담임교사를 맡은 반의 학생 중에서 학업 성적이 좋은 학생과 좋지 않은 학생에 대한 차별 대우가 심하여 학생들로부터의 평판은 좋지 않았다. “야. 공부 못하는 김 아무개 녀석도 오늘 공부하는데 나머지 너희들도 자극 좀 받아야지.”라는 말을 심심찮게 구사하는 걸 보고 나는 경악을 금치 못하였던 기억이 있다.

선거 때마다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정당을 지지한다 한들, 자신의 교실에서는 전혀 민주적이지 못하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물론 모든 변화의 정점은 정치다. 하지만 학교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은 학교 교육을 책임지는 사람들이 바뀌어야 함을 내포하기도 한다. 대한민국의 교사가 고된 업무에 시달리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생각했으면 한다.

‘이번 주, 나는 얼마나 민주적인 행동을 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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