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다른 학교에서 한참 혈기 왕성한 젊은 교사로 일할 때였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학교는 남녀공학이었다. 4월, 봄기운 탓이었는지 내가 있던 학교에서는 교내 커플로 맺어지는 남학생과 여학생들이 많았다. 연애 초반에만 느낄 수 있는 구름 위에 있는 그 감정을 학생들이라고 만끽하고 싶지 않았을까. 학생 커플들이 서로의 애틋한 감정을 공유하면서 손을 잡고 다니는 장면도 자주 포착되었다. 그 친밀한 광경을 목격한 당시의 교감은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해졌다. 남녀 칠 세 부 동석의 신념이 굳건했던 교감은 전 교직원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학생들 간 스킨십이 지나칩니다. 급식실에서 줄을 서 있을 때 특히 심합니다. 학교 구석진 곳에서도 스킨십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사고가 터지면 언론에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제재하는 선생님이 없습니다. 치마 길이에 대해서도 아무런 제재가 없습니다. 공동체 생활에서의 기본적 인성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담임 선생님을 비롯한 모든 선생님께서는 이상의 사항을 즉시 지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과 달리, 그 당시의 나는 관리자에게 항상 충성하던 교사였다. 내가 담임을 맡은 학급은 물론이고 수업 들어가는 교실마다 내 앞의 학생들에게 남녀 간의 접촉을 금하라는 교감의 메시지를 엄중하게 전달하였다. 나를 비롯한 많은 교사들이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으슥한 곳에서 민망한(?) 짓을 하는 커플은 없는지 순찰하고 다녔다. 하지만 교감의 지령으로 시작된 교사들의 학생 간 스킨십 색출 작업은 오히려 교내 커플 왕따라는 부작용을 초래하게 되어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스킨십하는 학생들을 단속하러 다니는 활동은 안 했지만 나는 학생들의 일상 행동을 감시하며 매우 깐깐한 교도관처럼 학생들을 대하였다. 엄격한 생활 지도만이 좋은 학업 성적을 보장한다고 믿는 내 신조를 학생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강요하였다. 교장 또는 교감의 지시는 곧 교칙이고, 교칙은 학생이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굳게 믿었던 나는 ‘이건 그냥 지켜야 하는 규칙이야.’라는 말이 가진 위험성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지 않았다. 왜 그리도 아둔했을까.
교장의 말이 곧 교칙이라 생각했던 것은 내 어린 시절의 수직적 위계를 따르는 문화 유전자(meme)에 의함이었다고 치자. 그런데 내가 목격한 교칙이 헌법에서 규정한 인간의 신체 자유권을 중대하게 훼손하고 있어도 이에 대해 아무런 비판 의식을 갖지 못했던 것은 뭐라 설명해야 할까? 내가 극단적인 악마였기 때문이었을까? 오히려 일상적인 상황에서 무비판적으로 행동하던 나의 ‘진부함’에 의한 것이 아니었을까? 2차 세계대전 때 예루살렘에서 수많은 유대인을 가스실로 몰아넣은 아이히만이 보인 ‘악의 평범성’과 15년 전 나의 ‘진부함’ 사이엔 얼마의 차이가 있었을까? 확실한 건 아이히만과 나는 둘 다 ‘당연한 것’에 대한 질문을 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진다. 누구든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구속‧압수‧수색 또는 심문을 받지 아니하며, 법률과 적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처벌‧보안처분 또는 강제노역을 받지 아니한다.
이것은 이른바 ‘신체의 자유권’을 명시한, 대한민국 헌법 제12조이다. 우리 헌법은 인간의 신체뿐만 아니라 사생활의 자유 및 평등권이 보장되어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이는 나이가 많거나 작다고 적용 여부가 달라질 문제가 아니다. 학생들 또한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권리를 가진 대한민국 국민이다.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경우가 아니라면 학생들 역시 개인의 신체적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학생이면서 나이가 어리며 미성숙하다는 이유로 누군가가 그들의 자유를 제한한다면 이는 명백한 헌법 정신을 위반하는 행위이다.
머리카락을 3cm 이하로 짧게 깎은 채, 교사들에게 이유도 모르고 수시로 폭행을 당했던 나의 학창 시절보다는 훨씬 나아졌지만, 지금도 여전히 대한민국 대다수의 고등학생들은 우리나라 헌법이 보유한 인간의 권리를 온전히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지금 내가 근무하는 학교를 비롯한 대한민국 다수의 중·고등학교는 학생들에게 교복 착용을 강제하고 있다. 머리 색깔을 마음대로 염색해도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는 학교는 극소수다.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옷을 입고 있거나 내가 싫어하는 색깔의 머리를 하고 있다 하자. 일면식도 없는 내가 그 사람에게 “당신 마음에 안 들어. 벌점이야.”라고 말하면 나는 아마 제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취급받을 것이다. 학교라는 공간도 구성원들의 대다수가 일반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관리자나 교사가 마음만 먹으면 학생에게 머리와 복장을 빌미로 언제든 신체 자유권을 박탈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학교는 사실상 인권의 사각지대이다. 동일한 복장을 하지 않으면 적과 아군의 식별이 불가하여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는 군대 같은 곳이라면 복장 규정이 중요한 부분일 수 있다. 하지만 학교는 군대가 아니다.
학교에서 이성 학생들 사이의 신체 접촉을 간섭하는 행위 역시 명백한 기본권 침해이다. 공원 벤치에서 키스를 나누는 커플에게 다가가서 “너희는 내 기분을 상하게 하였으니 벌을 받아야 해.”라고 할 권리가 우리에겐 없다. 그런데 학교라고 왜 달라져야 하나? 15년 전 교감은 작은 스킨십 하나를 허용하면 더 깊은 뭔가(?)가 따라올 것이라 우려하였다. 하지만 스무 살이 되기까지 3년도 남지 않은 고등학생들이 같은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키스 나 애무 행위를 하는 경우가 몇이나 있을까? 키스나 애무를 넘는 수위의 행위는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학교뿐만 아니라 공공장소에서도 하지 않는다. 남학생과 여학생이 손만 잡아도 등에 바퀴벌레가 들어간 사람처럼 소스라치게 놀라는 교사들에게 오히려 당신 머릿속에 음란 마귀가 있기 때문은 아닌가 묻고 싶다.
따지고 보면 학교 교사들이 학생들의 복장이나 스킨십을 제한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닐 수도 있다. 과거 일제가 우리나라 국민에게 노예의 도를 각인시키기 위해 학교에서부터 당시의 사람들에게 맞지 않는 예절을 강요했던 것을 떠올린다면, 앞서 언급한 학교에서의 기본권 침해 행위들도 학생에 대한 어른들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함이라는 확신이 든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하나를 허용하면 더 많은 것들을 제 멋대로 할 것이고, 학생들의 기강이 흐트러져 결국 입시 결과가 처참해지지 않을까에 대한 많은 교사들의 우려 역시 학생들을 억압하는 행위를 합리화하는 구실이 된다.
이유야 어쨌든지 간에 교사의 권위에 기대어 학생의 신체 자유권을 강탈하는 것은 학생을 제대로 된 인격체로 대하지 않던 아주 오래전 인습을 무비판적으로 따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학생을 반(半) 인간이라 전제하고 교칙을 시행하는 학교가 아직도 많다는 것은, 대한민국에는 학교 구성원들 중에서 제대로 된 민주시민 의식을 가진 이가 별로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대한민국 교육 기본법에는 학교 교육이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하고 자주적 생활 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도록 명시되어 있다.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초, 중, 고 12년의 학교 생활을 통해 민주 시민으로서의 자유와 책임, 권리와 의무를 충분히 학습해야 함을 법적으로 보장받고 있다. 그러므로 학교는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연습하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학교가 과거 병영 문화로부터 남은 의식을 답습하여 학생들의 신체 자유권을 아무렇지 않게 훼손하거나 학생들에게 그저 권위적인 억압만 가한다면 학생들이 과연 민주주의의 가치를 제대로 체험할 수 있을까? 아무리 대한민국 헌법에서 신체의 자유를 보장했다 하여도 현실에서 이를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는 교칙 집행의 현장을 목도하는 학생들 중에 장차 헌법적 가치를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어른으로 자랄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학교는 그저 시험을 준비하는 장소가 아니라 학생들이 민주주의와 자유, 책임을 배우는 ‘작은 사회’이다. 미국의 교육 철학자 존 듀이(John Dewey)는 “민주주의는 매 세대마다 새롭게 태어나야 하며, 교육은 그 산파 역할을 한다.”라고 했다. 학교가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공간이 아니라 규칙만을 강요하는 권위주의적 조직으로 남는다면, 학교는 그 존재 가치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학교는 그 학교가 속한 사회의 축소판이다. 따라서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상 하나하나가 곧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사회의 축소본이어야 한다. 그런데 학교가 감시와 통제로 가득한 공간으로 변한다면 민주적 사회의 예비판이 아닌 파시스트를 기르는 묘판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 우리 학교는 국민 누구도 부여하지 않은 초 헌법적인 권위로써 경쟁 교육을 통해 자기 계발의 이데올로기를 펼쳐 왔고 학생들의 자기 착취를 정당화하였다. 그렇게 자기 착취가 죄의식과 열등감을 키우다 보니 학교에서 행복함을 느끼는 학생은 극소수가 되었고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성적 비관에 의한 청소년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얻게 되었다. 이제 이 고통의 고리를 끊어야 하지 않겠는가.
많은 해방 중에 가장 어려운 해방이 바로 ‘자기로부터의 해방’이다. 난 과거 폭력 교사였던 시절, 학생들에게 ‘자기 착취’를 강요하였고 나 자신도 착취하면서 스스로를 미화하였다. 숱한 시행착오와 와일드한 학생들(나의 스승이었던)을 거치며 비로소 내가 타인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줬는지 조금이나마 깨달은 순간이 왔다. 그때부터 나는 나를 과거의 나로부터 조금이나마 해방시킬 수 있었다.
https://brunch.co.kr/@bc71558509ea4fa/4 (이전에 올렸던 못난 글을 첨부합니다.)
학교는 언제든 학생들을 억압하는 감옥으로 변할 수 있지만, 억압받는 자들이 자신을 해방시키는 실천의 장이 될 수도 있다. 과거로부터 해방된 시각으로 학생들을 바라보면서 교칙이 헌법의 틀 안에서 만들어져야 함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교사들이 한 명이라도 더 생기길 기원한다. 그래서 우리의 교실이, 학생들로 하여금 민주주의를 배우는 첫 번째 공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