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들은 결코 이 글을 안 본다는 믿음으로.
10여 년 전. 기숙사가 있던 학교에서 근무할 때의 이야기다.
3교시 마치자마자 수업하던 3층 교실에서 1층 급식실로 부리나케 내려갔다. 11시 25분. 잠시 뒤면 배가 고픈 사람들이 밀려올 텐데 그전에 조용히 밥을 먹고 싶었다. 비록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급식 육개장이 나왔지만 배도 워낙 고팠기에 배가 부를 양만큼 퍼서 여느 때처럼 급식실 가장 안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국그릇에 찰랑할 정도로 펐던 육개장이 생각보다 너무 뜨거웠다. 입을 모아 후후 불어가며 한 숟갈씩 떠서 천천히 입 속으로 넣었다. 하지만 그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이윽고 사람들이 밀려왔다.
멀리서부터 보였던 A 교사와 B 교사가 부디 내 옆으로는 오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육개장이 내 예상을 깬 것처럼 내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A와 B는 내 옆자리에 마주 보며 나란히 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들 옆에서 난 속으로 빌기 시작했다.
‘제발 나한테는 아무 말도 시키지 마라.’
나의 간절한 소망 덕분에 그들은 육개장 맛이 어쩌고 하며 밥만 먹었다. 그러다 한 1분이 지났을까? B 교사가 대뜸 A 교사를 향해 상기된 얼굴로 말을 꺼내었다.
“부장님!”
몇 년 전 같았으면 이 말 한마디에도 난 자리를 옮겼을 것이다. 같은 교사들인데도 맡은 일이 학년 부장 또는 부서 부장 교사라는 이유로 여느 회사처럼 ‘부장’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이 문화가 나는 너무 싫었다. 하지만 그게 입에 익은 사람들에게 내 개인 의견일지도 모르는 생각을 바탕으로 타박하는 것은 너무 속 좁은 처사일 수 있다. 이젠 호칭 정도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이번에 저희 학년 학생들 중에 전교 1, 2 등 하는 애들을 기숙사 보냈습니다. 저 잘했죠?”
칭찬을 받기 원하며 던진 B 교사의 대거리에 A 교사는 얼굴에 화색을 띠며 화답했다.
“오. 정말 좋아. 기숙사 이름값 올라가겠네. 그렇지 않아도 물 흐리는 애들은 안 받아 주려 했는데 매우 잘 되었어.”
그러면서 A와 B는 급식실에 오면 으레 해오던 패턴대로 여러 학생들을 대화 선상에 올렸다. 이 학생은 성적이 이러한 등급인데 저 학생은 저러한 등급이라 둘을 어떻게 다르게 취급해야 할지 같은 내용이 이어졌다. 그들 이야기 속에서 학생들은 사람이 아니라 품종에 따라 등급이 나뉜 죽은 소들이었다. 나를 포함하여 6명이 앉아 있었던 그 테이블에서 그 둘은 한참 동안 큰 소리를 내며 그들만의 학생 품평회를 이었다. 지들 새끼들을 남들이 저렇게 취급한다는 것을 알아도 저렇게 말할까 싶었지만 난 그들 대화에 한 마디도 끼어들지 않았다.
“인간을 단지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언제나 목적으로 대하라.”
칸트 선생이 했던 이 유명한 말을 A와 B 면전에 쏘아붙이듯 부르짖고 싶었다. 하지만 학생의 성적과 대입 결과가 자신의 공로임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그들에게 괜히 이런 말을 해 봐야 그들은 나를 헛소리나 지껄이는 이상주의자로밖에 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같은 동료 교사들끼리도 직급이 다르면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통제해도 이상할 것 없다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학생과 교사가 동등한 인격체임을 말하느니 벽에다가 소리를 지르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필이면 오늘 뜨거운 육개장을 퍼오는 바람에 여태껏...’
난 그날따라 오래 앉아 있던 나를 책망하며 밥을 절반 정도 먹은 시점에 황급히 일어나 버렸다.
학교에서 지내는 모든 순간은 다른 삶을 위한 준비이기 이전에 그 자체가 지금의 삶이다. 그건 선생이든 학생이든 모두 마찬가지다. 오지 않은 미래를 볼모로 지금의 욕망을 억누르던 삶은 내가 겪었던 학창 시절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내 학창 시절이나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 삶이 여태껏 이어지고 있는 우리네 학생들을 보면 하루에도 열두 번 속이 꽉 막힌다. 방과 후에도 고통 속에서 자신을 소모하며 밤늦게 까지 남은 학생들, 힘겨운 자기와의 싸움에 항상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기숙사생들을 보면 어른으로서 우린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싶다.
예수님이 그랬다.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나이다.」
우리나라 헌법 10조에 의하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하지만 학교 안에서 학생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다. 그들의 존엄과 가치가 휴지 조각처럼 구겨져도 선생은 물론 학생들조차도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말기 암에 걸렸는데 아무도 아픈 사람이 없는 곳. 썩어 가는 몸을 향해 모두가 박수를 치는 곳. 단테의 지옥을 다른 곳에서 달리 찾을 필요가 없다.
사마천의 사기 열전을 보면 나라의 부귀나 권세보다 자신의 의로움을 지키다가 수양산에서 굶어 죽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라는 인물이 나온다. 반면, 법을 만들어 백성들을 억누르는 상앙(商鞅), 권력에 아부하고 영달을 쫓는 이사(李斯) 같은 인물에 대한 묘사도 자세히 나타난다. 사마천이 사기 열전에서 언급하던 2000여 년 전 인간과 지금의 인간 사이에 진화학적인 차이는 거의 없다. 청렴과 원칙을 지키려 제 목숨마저 거들떠보지 않는 백이, 숙제 같은 인물은 과거에도 드물었고 현대 사회의 어느 집단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상앙이나 이사 같은 사람은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항상 흔하게 나타났던 인물 유형이다.
학교에서 근무하는 동안 상앙, 이사와 유사한 DNA를 가진 인물을 나는 숱하게도 보아 왔다. 자신이 만든 법에 의해 처형당한 상앙이나 같은 간신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은 이사처럼, 내가 겪은 현대판 상앙 및 이사들 중에서도 교직에서 파면을 당한 인물들이 있다. 하지만 내가 목격한 그들 대다수는 정년까지 관리자나 원로 교사와 같은 생활을 누렸고, 퇴직 후에도 무병장수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10여 년 전의 교사 A와 B도 그러하다.
백이나 숙제만큼은 아니라도 자신이 가진 고귀한 철학을 학교 현장에서 실현하려 애썼던 교사들도 있었다. 학교는 단순한 입시 학원이 아니라 공교육 기관이라는 신념으로 교육자로서의 교육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무던 애를 쓰던 분들도 나는 목격하였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제풀에 나가떨어졌다. 그분들의 뜻은 고귀했지만 혼자 서는 그저 찻잔 속 소용돌이만 일으킬 수 있을 뿐임을 보여주며 주변 교사들의 경각심만 일깨운 채, 그분들은 사라져 갔다.
“학생은 성적 또는 교사의 명예를 위해 있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존귀하다.”
나는 더 이상 학교에서 이 말을 내뱉지 않는다.
나도 지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