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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을 잃어버린 시간

'동무론'을 읽고

by 한슨생

술을 마시지 않은지는 67일.

직원 식당에서 급식을 먹지 않은지는 7일이 지났다.

좋은 점을 들자면.


술자리가 좋아서 맺었던 인연들의 부질없음을 깨달음.

감정의 노이즈 소멸.

인간관계의 속박으로부터 해방.

고독의 시간 동안 성찰의 심화.

매일 러닝 해도 처지지 않는 체력. 등등.


여러 가지 장점들이 있지만 가장 좋은 것은 독서 집중력이 상승했다는 것이다.


새벽녘 한번 깨었던 잠을 다시 들기 어려워 친구로부터 받은 책을 펼쳤다. 살면서 우연히 만난 좋은 사람만큼 반가운 것이 무심코 펼친 책에서 지금의 나에게 딱 맞는 글귀를 찾았을 때이다. ‘동무론’이라는 책에서 나는 지금 내가 선택한 고독의 시간을 정당화해주는 문장들을 보았다.

동무론.jpg 동화 작가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astrtidende 에게 받은 책. 땡큐!


“ “친구야, 우리가 남이가?”

한 번도 제대로 ‘남’이 되어보지 못한 관계의 기억은 완악하고 집요하고 추접스럽다. 온갖 연줄로 얽혀든 사회 속의 우리는 ‘남’이 되지 못했으므로 ‘나’가 되지 못한 채, 공동의 침체를 도덕이라 부르고, 공동의 나태를 평화라고 부르며, 공동의 타락을 질서라고 부른다. ”

- ‘동무론(김영민)’ 중에서


‘친구’는 쉽게 붙잡을 수 있다. 같이 보낸 시간, 공유한 추억이 있어서 익숙하고 편하다. 그런데 진짜 ‘동무’ 즉, 함께 살아가며 서로를 성장시키는 관계는 그렇게 끈끈하게 이어지지 않는다. 자주 봐도, 오래 알아도, 진정한 동무가 되긴 어렵다.


오늘날 사람들은 ‘기호’로 연결된 세상 속에 산다. 겉으로만 반짝이는 이미지, SNS의 관계, 말뿐인 공감이 진짜 인간관계를 대신한다. 그래서 친구라는 존재가 오히려 “인간적인 것”의 마지막 흔적으로 남아 있다. 사람들은 사실, 친구를 통해 여전히 ‘사람다움’을 증명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친구 관계란 것도 사실 서로에게 안심을 주는 ‘공동의 타락’이 될 때가 많다. 진짜 서로에게 ‘남이 되어보지 못한’ 관계, 서로를 분리해서 바라보지 못한 채 그저 익숙한 정에 기대 사는 관계 말이다.


‘동무론’의 저자인 철학자 김영민은 “서로에게 남이 되어보지 못한 관계” 안에서는 성장도, 성찰도, 진정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저 서로의 나태와 타협을 ‘도덕’이나 ‘평화’라고 착각하며 살아갈 뿐이라고나 할까.


‘친구’는 우리를 묶어두는 안전하고 달콤한 환상이고 우리는 그 ‘친구’라는 이름 아래서 진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지 못한다는 저자의 관점이 지나치게 회의적인 느낌도 있다. 그래도 직장에서의 친구 관계로 지쳐버린 나로서는, 위의 글이 친구의 의미에 대해 다른 시각으로의 접근하게 하는 화두를 던지기에는 충분했다. 해서 곧 출근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 다가옴에도 나는 계속 이 글을 끄적거린다.


친구라는 게 뭘까 생각한다.

나를 오래 아는 사람? 내 말을 끄덕이며 들어주는 사람? 아니면, 내가 외로울 때 옆자리에 앉아주는 사람?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건 나에게 편안함을 주는 사람이지, 꼭 나를 성장시키는 사람은 아니다. 우린 “끈끈한 관계”라는 말에 너무 취해 산다. 붙잡을 수 있고, 익숙하고, 잘 아는 사람 곁에 있으면 안전한 듯 느껴진다. 하지만 그 익숙함 속에서 우린 조금씩 무뎌지고, 닳고, 멈춰버리곤 한다.


40대 후반으로 접어드는 지금, 10년 이상 알게 된 사람들 중에 가끔 통화나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 인연이 대략 다섯 명 정도 있다. 그들은 내 말에 무조건 공감해 주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가끔은 나를 불편하게 하면서 내 안의 틀을 부숴주었던 경험이 다들 한 번쯤은 있었다.


이래저래 살기도 바쁜 시대에 큰 고민 없이 우린 ‘그래도 친구니까’라는 말로 많은 감정과 상황을 정리하고 싶을 때가 많다. 마치 그것이 모든 설명의 끝인 양. 하지만 그 말 뒤에는 서로에게 남이 되어보지 못한 채 기대고 안주한 시간들이 있다. 그래서 친구라는 이름 아래에서 우린 때로 도망치고, 회피하고, ‘나’를 잃어가기도 한다.


정말 소중한 사람은 나를 무작정 끌어안는 사람이 아니라, 가끔은 나를 멀리서 바라보게 만드는 사람이 아닐까? 그 거리가 있어야 나는 다시 나를 돌아보고, 그 사람도 자기 자리에서 나를 생각할 수 있다. 때로는 붙잡을 수 없는 관계 속에서 비로소 진짜 인간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려야겠다.


“친구야, 우리가 남이라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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