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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나로부터

내가 '긁힌' 이유는?

by 한슨생

[이 글은 얼마 전에 제가 이미 올렸던 것입니다. 당시 글이 너무 장황하였고 내용 오류도 있어서 수정하여 다시 올립니다.]


“야, 진짜 한번 말한 거 똑바로 기억 안 할 거야?”


탄산수소나트륨 가열에 열중하던 학생들로 가득 찬 과학실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학생들과 웃고 떠드는 편인 내가 수업 중 언성을 높인 건 거의 처음이었다.





이번 2학기에 나는 1학년을 대상으로 ‘과학 탐구 실험 수업’을 맡았다. 학생들은 A학점을 받기 쉬워 이 수업에 대한 부담이 없지만, 준비하는 교사 입장은 다르다. 매주 새로운 실험을 찾아야 하고 1학년 모든 반에서 나온 250개가량의 산출물을 확인해야 한다. 목요일에서 금요일로 넘어갈 때쯤이면 매번 고민에 휩싸인다.


‘또 다음 주에는 수업을 어떻게 진행하지?’


그래서인지 평소와 달리 이 수업 시간에는 내가 특별히 예민해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날도 오랜 고심 끝에 계획을 세웠던 실험 수업을 진행 중이었다. 빵이 부풀어 오르는 원리를 확인하기 위해 실험 모둠별로 ‘탄산수소나트륨 열분해’ 실험을 통해 이산화탄소가 생성되는 과정을 확인하였다.

열분해.jpg 위의 실험 장치에서 가열되는 부분에 플라스틱 비커를 설치하여 화재가 발생했다.

대부분 문제없이 진행됐지만, 한 실험 조의 학생들이 사고를 냈다. 석회수를 가열할 때 유리 시험관을 쓰라고 누누이 말했음에도 한 학생이 플라스틱 시험관을 불 위에 올린 것이다. 순식간에 플라스틱이 녹고, 불이 번지며 책상 전체가 용암처럼 일렁였다. 소화기를 들고 불을 끄고 나서야 상황은 진정됐지만, 내 속의 뚜껑은 이미 열려 있었다.


“대체 누가 이런 거야. 단체로 빵점 받아보고 싶어?”


나도 당황스러울 만큼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안 그래도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던 그 실험 조의 학생들은 좀처럼 화를 내지 않던 내가 얼굴색이 변하면서까지 고성을 내자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한번 말한 거 똑바로 들 기억 안 할 거야?”


나는 고함을 계속 지르며 다른 실험 테이블의 학생들에게도 분노가 담긴 눈빛을 쏘아 보냈다. 학생들 모두 당황한 눈치였다. 수업 시간에 자기네들이 뭘 하든 간섭하지 않고 농담이나 주고받던 선생이 저렇게 불같이 화를 내다니. 나는 학생들의 표정에도 아랑곳없이 경고성 멘트를 계속 날렸다.


“유의 사항 잘 지키지 않다가 이 실험 조처럼 또 불을 내면 이번 수행평가는 0점을 받을 겁니다.”


더 이상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으름장을 놓으며 겨우 실험을 마무리하였다. 이후에도 다른 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같은 실험 수업이 이어졌다. 모든 수업을 마치고 나는 젖은 가을 낙엽같이 땀범벅이 된 채 실험실 테이블 의자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았다.


‘이젠 누군가에게 이렇게 화를 내지 않아도 되리라 자신했건만.’


폭력 교사였던 과거의 나와 단절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그 성깔은 남아 있었음을 확인하게 되어 씁쓸하고 초라하였다.


그런데 사실, 내가 이런 ‘격한 분노’에 휩싸였던 적은 오늘만이 아니었다.

지난해 육아휴직 중 아들에게 양치질을 시키다가 분노를 표출한 적이 있었다. 이전 브런치 글에서 나는 아들에게 화를 낸 이유가 사실은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과거 기억이 깨어났기 때문이라 언급하였다.(https://brunch.co.kr/@bc71558509ea4fa/18 ) 어린 시절 나는 내 아들과 유사한 상황에서 나의 아버지에게 호되게 혼이 났었고 그 경험은 무의식 속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아들의 행동을 보고 그때의 기억이 불안감으로 살아나 이내 곧 분노로 표출된 것이라 보았다. 그런데 이런 이유만으로는 나의 분노가 설명되지 않는 사례가 근래에도 있었다.

내가 담임을 맡은 반의 학생 A는 다른 학생들이 다 앉아 있을 무렵, 지각 직전에 교실로 유유히 들어온다. 그리곤 자기 자리에 가방을 던져둔 채, 곧바로 양치질을 하러 밖으로 나간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든 전혀 아랑곳하진 않는다. 그 모습을 보면 내 안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금세 올라온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학생 A는 그저 자기 방식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학생 A는 나를 화나게 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행동을 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 학생의 행동이 내 감정을 흔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화를 내어도 내 앞의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하면 화를 참는 것까지는 가능하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화가 나는 것 자체는 피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나는 그 이유가 바로 화를 내는 내 안에 그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음’이라는 욕구가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다. 그런데 나와 주변 학생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학생 A의 행동을 보는 순간, 내 안에 이와 유사한 공통의 요소는 ‘나도 하지 못하는 것을 네가 감히.’라는 감정으로 변질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곧 분노로 이어져, 내 몸속의 신경 물질의 흐름과 내 얼굴 표정에 변화를 야기하였을 것이다. 만약 나의 의식 또는 무의식 속에 늦게 오거나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에 대한 욕망 자체가 없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를 자제해야 한다는 도덕률도 없었을 것이고 학생 A가 그리 행동한들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을 이유도 없다. 그냥 그러나 보다 했겠지. 내가 화가 났다는 것은 학생 A의 행동과 내 안의 어떤 부분 사이에 교집합이 있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실험실에서 학생들에게 화를 낸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나 역시 수업 중 집중하기보다 딴생각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학생들이 주의 사항을 흘려들을 때, 나는 내 안의 그 ‘앞에서 누가 뭐라 하든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살아온 나의 옛 세월이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도 못했던 것을 감히 너희들이’하는 심정은 ‘선생님의 말을 항상 집중해서 듣기’라는 도덕률로 포장되어 내 마음에 남아, 자기 욕망대로 하는 학생의 행동을 제재하고픈 브레이크 장치로 작동한 것이다.


분노는 언제나 나의 내부에서, 나의 인지구조 안에서 만들어진다. 외부 사건은 단지 방아쇠 역할을 할 뿐이다. 나는 오랫동안 가진 것이 망치밖에 없어 모든 학생을 못으로 보던 교사였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화를 내지 않는 날이 드물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나의 이런 분노에도 결코 변화하지 않던 학생들은 나에게 중요한 진리 하나를 가르쳐 주었다.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이성복.jpg 많은 성찰을 일으킨 책.

내가 아무리 화를 내도, 학교와 학생은 큰 변화 없이 제자리였다. 그때부터 나는 누군가의 잘못에 화를 내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에너지 소모인지 조금씩 알게 됐다.

누군가는 학생 A의 행동이나 실험 주의사항을 잘 듣지 않던 학생들을 보고 ‘이건 교사를 무시하는 행동이다.’라 해석하여 화가 날 법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학생 A는 내 성질을 돋우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늦게 온 것이 아니다. 실험실에서의 1학년 학생, 그리고 내 아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냥 본인이 그게 좋으니 그렇게 한 것이다.


스토아학파의 창시자로 유명한 에픽테토스는 숱한 강연을 통하여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화를 낸다는 것이 얼마나 무용한 것인지를 논증하였다. 에픽테토스는 모든 사람은 자기 나름의 생각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며 이는 타인이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라 했다. 어떤 일이 ‘옳다’고 생각하면 그 일을 하고, ‘틀리다’고 생각하면 하지 않으며, 잘 모르겠으면 판단을 미루게 된다. 내가 보기에 그는 잘못된 행동을 한 것 같지만, 그 사람은 ‘그게 옳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자기 기준에서 옳다고 믿는 대로 행동한 사람에게 타인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 다가 아닐까? 누군가의 잘못에 분노한다는 것은 그래서 의미가 없는 감정 소모인 것이다.


'의지의 영역 밖에 있는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현혹되지 않는 사람.'


에픽테토스의 스토아학파가 추구하는 위의 인간상을 고려할 때, 누군가에게 화낸다는 건 결국 ‘내 기준’을 강요하는 일이다.


그런데 나는 그 고매한 스토아 철학을 추구한 에픽테토스 같은 철학자가 아니다.

며칠 전 아침 시간. 3학년 우리 반 학생들에게 간단한 안내 사항만 전하고 수업을 하기 위해 앞 문을 나서는 찰나였다. A 선생이 복도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던 우리 반 학생 B에게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나만 나무랄 수 있는 나 자식에게 남이 뭐라 할 때 드는 심정이 들기 시작했다. 교실 앞 문에서 내가 나가는데도 A 선생의 잔소리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교실 밖을 나오면서 있는 힘껏 앞문을 세게 닫았다.


“꽝~!”

그제야 A 선생은 화들짝 놀라며 퍼붓던 잔소리를 멈추었다.


의지의 영역 밖에 있는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현혹되지 않을 준비가 아직은 멀었나 보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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