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슝"하고 떠난 수학여행

53년 전 초등학생들이 가오슝을 흔들다

by 홍삼이

[기억이 흐려지기 전에

추억을 붙잡아야 한다]


해외여행에서 돌아온 날.

늦잠을 잤지만 마음과 몸은

이미 도서관으로 와 있었다.

머릿속에서 하나둘 지워지고 있는

장면들을 글 속에 붙잡아 두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여행 1일 차

- 비행기 안의 소동


60대 중반의 남녀 스물한 명.

초등학교 동창들이 둥그렇게 모여

인천공항 제2터미널을 들썩이게 했다.

이천 촌놈의 티는 사라지고

멀끔하게 멋을 낸 얼굴들.

하지만 웃음만큼은 53년 전 그대로였다.

인천공항 2터미널 내부 및 출국전 친구들의 모습

가난하여 아산 현충사 수학여행도

가지 못하던 시절.

그때의 한(恨)을 풀기라도 하듯

대만 가오슝으로 "슝"하고

날아올랐다.


서로 이름을 부르는 표정은

주름과 허연 머리칼만 지웠다면

영락없는 초등학생들이었다.

출국 안내방송마저 들떠 있는 듯했다.


해외여행을 수없이 다녀봤지만

오늘의 비행은 그 모든 여행과 달랐다.

창밖 햇살은 내 마음과 닮아 반짝였고

점점이 퍼지는 구름은 우리 일행을

환영하듯 반겼다.

비행기 밖의 모습

이륙 후 한 시간쯤 지났을까.

갑자기 은숙이가 기내 통로를 뛰어나갔다.

가이드를 찾고, 승무원들이 모여들고,

중간좌석 친구들은 웅성거리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선자가 감기약 탓인지

잠시 혼절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다행히 곧 회복되었다.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 야, 우리 뉴스에 나올 뻔했어! "


" 제주도 회항해서 제주 여행

할 뻔했네. "

웃자고 한 말이었지만

방금의 아찔했던 순간은

이웃집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이것이 '신문에 날 뻔한 일 ' 1탄.


1일 차 오후

- 우리들만의 세상


3시간 남짓 날아 도착한

가오슝 국제공항.

현지 가이드 왕ㅇㅇ이 우리를 맞았다.


"양평, 서울, 인천에서 살아봤고요.

누구 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라고 했지만

내 눈에는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였다.


태풍 때문에 어제까지 비가 많이

왔다며 세 가지 주의사항을 전했다.


•여권 상시 휴대

•시간 엄수

•휴대폰 잘 보관하기


첫 일정은 치진섬 페리왕복이었다.

" 편도 6분 "이라는 말에

성곤이가 실망했는지,

빙수를 먹고 난 후에는

갑자기 웃옷을 벗고

' 난닝구 맨 '으로 돌변했다.

치진섬 페리 왕복선 및 '난닝구 맨'의 등장

멀리서 보면 술 취한 현지인이

누구랑 실랑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다행히 경찰이 없었기에 망정이지ㅡ

성곤이가 대만 경찰에 연행되는

상상을 하니 괜스레 등골이 서늘했다.


이 장면이 '신문에 날 뻔한 일' 2탄.


'신문에 날 뻔한 일' 3탄은

그 이후로 발생하지 않았다.


● 보얼 예술 특구 & 육합 야시장


보얼 예술 특구의 밤,

그리고 대만 3대 야시장 중 하나인

육합 야시장, 우리들의 재잘거림이

거리를 가득 채웠다.

'보얼 예술 특구 및 육합 야시장 전경

흥이 많은 미경•영애•효옥은

거리 공연의 바이올린 소리에 맞춰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외국인, 현지인, 친구들의 박수와

환호가 뒤를 이었다.

흥겨워 춤추는 친구들과 환호하는 사람들

●호텔 2267호, 첫날밤


호텔에서 짐을 풀자마자

2267호에 다시 모였다.

안주와 술을 언제 준비했는지 한가득.


좁은 호텔방.

누군가는 침대 끄트머리에,

누군가는 바닥에,

또 누군가는 벽에 기대 서서

술을 권하고 안주를 건넸다.

효옥이가 직접 만들어 온 고추튀각과

총각김치 볶음은 인기 최고였다.

어머니가 해주시던 밑반찬 같은 맛.


대만 과일 ' 석가(釋迦) '.

부처님 머리를 닮았다 해서 붙은 이름.

크리미 한 식감에 서로 한 조각씩

먹여주는 친구들의 친근함에

왠지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이야기와 웃음으로 깊어가던 첫날밤.

아쉬움을 남긴 채 각자 방으로

돌아갔다.


룸 메이트인 성만이와 늦게까지

떠든 탓에 옆방 친구들이

잠을 설쳤다 하니 미안할 따름이다.


여행 2일 차

- 대만의 최남단을 향해


친구들의 권유로

내가 마이크를 잡았다.


" 하룻밤의 만리장성을 쌓는다ㅡ "


어디서 들은 말 한마디 했을 뿐인데

친구들은 초등학생처럼 귀를 쫑긋 세웠다.


●컨딩 사정자연공원


컨딩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검은 모래와 검은 자갈이 널린 바닷가.

넓적한 돌을 주워

제비 수제비를 뜨는 모습은

어릴 적 개울가에서 하던 짓과

다르지 않았다.

제비 수제비 뜨고, 기차놀이 포즈로 한 컷

잘 정리된 산책길,

협곡 위에 걸린 바위,

골프장처럼 펼쳐진 초원.

2km도 안 되는 길이었지만

걸으며 떠드는 모습은 봄소풍 나온

초등생 그 자체였다.


그러나 뒤에서 바라본

느려진 걸음과 처진 어깨는

세월을 숨길 수 없었다.

문득, 또 눈앞이 흐려졌다.

커닝 사정자연공원 협곡 및 초원에서의 하늘 만세

●등대 어롼비 공원


버스로 20분 남짓 달려

도착한 대만 최남단 어롼비 공원.

하얀 등대가 우뚝 서 있었다.


열대나무, 푸른 바다, 멀리 솟은 산봉우리.

이국의 정취가 한눈에 들어왔다.

어란비 공원의 등대 및 주변 전경

1833년 청나라 시대에 세운

'무장 등대'.

지금은 끝없는 평온을 밝히며

우리를 맞아주었다.


야자나무와 등대를 배경으로

추억을 남기는 친구들의 모습이

앙증맞기까지 했다.



●모래언덕 펑췌이샤!


에메랄드빛 바다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시야 가득 펼쳐졌다.


언덕 위로 거친 바람, 새파란 하늘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바람에 깎인 언덕 표면은

대머리 독수리처럼 반질반질했고

우리는 팔짱을 끼고, 옷깃을 붙잡으며

동심을 활활 태웠다.


모래가 입에 들어가 물양치질을

하면서도 우리는 그저 행복했다.

모래언덕 펑췌이샤에서 재선,윤수와 함께

● "연옥"이 이야기

- 호텔이 뒤집히다.


둘째 날 밤도 2267호에 모여

하루를 정리했다.


눈에 띄는 과일 하나.

축구공에 맞아 부어오른 '불알' 같은

기묘한 모양.

선자가 " 이건 연옥이래! " 하며 건넸다.

한 입 베어 물자 수분만 많고

맛은 그저 그랬다.

그래서 무심코 말했다.


" 연옥이는 물은 많은데...

맛은 없어."


순간 방 안이 뒤집어졌다.

우리 일행 중 '연옥'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연옥'이라는 과일은 없다.


살아오며 이렇게 웃은 날이

또 있었을까.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일 것이다.


여행 3일 차

- 전용버스가 타이난으로


어젯밤 그렇게 달렸는데도

모두 생생했다.

만보기를 보니 전날 13,949보,

이날도 13,904보.

꽤 힘든 일정이었다.


● 치메이 박물관


서구풍 조각상, 넓은 길이 인상적인 곳.

유럽 어딘가에서 본 듯한 전경.


준비해 온 플래카드를 들고

6학년 때 반별로 사진을 찍었다.


" 이천남 17회 여행자 모임.

대만 가오슝 "


내가 속한 1반이 7명으로 가장 많았다.

치매이 박물관에서 6-1반, 단체사진을 찍다

박물관 안에는

서양예술, 음악, 자연사, 병기등

다양한 전시물이 한데 모여 있었다.

동물표본과 화석은 마치 그림책 속

세상을 펼쳐 놓은 듯.


사진을 찍다 제지를 받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개인재단이 만든

사립 박물관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타이난 안평지구

안평고보ㆍ안평수옥ㆍ안평노가


안평고보는 비록 작은 성(城)이지만

네덜란드 지배를 끝내고

정성공이 승리한 곳.

망루에서 보이는 타이난 시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안평고보 일부분 및 망루에서 본 타이난 市

안평수옥으로 가는 길,

무심코 조각상을 잡았는데

그가 라이브 스태츄(Live statue)였다.

후원함에 1달러를 넣었다.


안평수옥은 오래된 건물 위로

뱅골 보리수나무가 벽과 지붕, 통로까지

뒤덮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안평수옥의 친구들, 뱅골보리수 나무 아래의 경준

안평노가로 가는 길,

한 초등학교 앞에서

윤수•효옥은 그네를

성만•미경•칠환•은숙•미자•

영택이는 시소를 타며 아이처럼

웃었다.

그네와 시소를 타는 친구들

한 음료 가게에서 주문을 하고

한참을 기다리다가,

" 아직도 멀었다."는 말에

결국 다음 여정을 위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중국의 '만만디(慢慢地, 천천히)'와

한국에 '빨리빨리' 문화가

부딪힌 현장이었다.


●연지담

-용호탑에서 용으로 들어가

호랑이로 나오다


연지담은 절반이 인공 저수지라고 했다.


주차장에서 잠시 걸으니

원색의 용과 호랑이, 누각과 정자가

호수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연지담의 용호탑과 멀리 보이는 누각,정자

용호탑의 웅장함은 말 그대로 압도적.

용의 입으로 들어가 호랑이 입으로

나오면 길운이 따른다는 속설이 있다.


누군가는


" 호구라는 말이 여기서 생겼나 봐! "


" 호구될 친구 없나? " 하고 외쳤다.


발마시지로 하루의 피로를 풀고

E-DA 로열 호텔 앞 관람차에서

야경을 즐겼다.

관람차 및 호텔 옆 야경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

3일 차 밤 역시

2267호실에서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오늘은 진짜 연옥이가 많이

웃겼는데


이날의 기억은 조금 희미함이

너무 아쉽다.


여행 4일 차

- 마지막날의 아쉬움


어제 늦게까지 떠들었는데도

친구들은 여전히 씩씩했다.


마지막 일정은 대만 4대 사찰 중

하나인 불광산 불타기념관을

둘러본 후,점심을 하고 귀국길에

오른다.


입구부터 108m의 거대한 불상이

우리를 압도했다.

세계에서 단 세 곳에만 있다는 부처님

치아사리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불광산 불타기념관 앞 단체사진과 전경

점심 후 가오슝 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밟고 15시 45분 에바항공으로

인천공항 1 터미널에 도착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사건을 만드는

이가 있었으니ㅡ

스튜어디스가 커피를 쏟아

담요를 뒤집어쓰고 입국장을 나온

미경.

끝까지 우리를 웃게 했다.


저녁은 공항 내 식당에서 먹고

이천행 전세버스로 떠나는

18명의 친구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명희, 영애와 나는 각자 공항버스와

전철을 탔다.


그렇게 우리는 3박 4일의

53년 전 수학여행을 마쳤다.

단체사진의 일부분

● 친구들을 떠올리며

-한 명 한 명의 특징을

적어보다


1. 듬직하고 말없이 할 일 하는 경준

2. 여행을 좋아하고 패션감 있는 명오

3. 정 많고 어릴 적 옆집 살던 명희

4. 흥 많고 커피 세례까지 받은 미경

5. 체력 방전이 빠른 미자

6. 덩치만큼 믿음직한 상만

7. '신문에 날 뻔한 1탄' 주인공 선자

8. ' 난닝구 맨 ' 성곤

9. 아침마다 전화하는 자상한 남편

성만

10. 버스만 타면 조는 승대

11. 연이틀 뒤풀이의 주인공 연옥

12. 야시장 춤판을 이끈 수원댁 영애

13. 색시 같은 남자 영택

14. 마음씨 좋은 동네 아저씨 같은 윤수

15. 버스만 타면 술 권하는 여자 은숙

16. 그림자처럼 조용한 주돈

17. 김튀각처럼 고소하고 털털한 재선

18. 맨 정신에도 잘 노는

시니어 치어리더 칠환

19. 살림꾼 효옥

20. 소주가 허리 진통제라는 희철


"친구들아!

건강하고 행복하거라."


-2025년 11월14일~17일,

대만 가오슝여행을 정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