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잔상(殘像)

그리운 아버지

by 홍삼이


아카시아 항기 진한

넓은 대청마루에

라디오 안테나 쭉 뽑고

귀 쫑긋 세운다.


"와~"하는 함성소리에

박장대소하시던

헐렁한 러닝셔츠 차림의

그 모습이 그립다.


초등학교 입학하는 날,

깡마른 등짝을 선뜻 내주시며

엉덩이를 토닥이던

그 손이 그립다.


체한 배를 문지르며

"내 손이 약손이다"를

가만가만 부르시던

그 소리 또한 그립다.


교정 한가운데,

꺼꺼부정한 노인이 잽싼 어린놈에게

손에 든 뭔가를 낚아 채인다.

환하게 웃으시며 손짓으로

어서어서 가라며 만족해하는

표정이 눈에 삼삼하다.


꼬장꼬장하고 강직한 성품이

트레이드 마크였지만,

가족들에게는 한없이 다정하고

약한 분이셨다.

여덟 남매 키우느라 체면과 자존심을

얼마나 내동댕이 치셨을까?


'테스형' 가사에 동(動)하여

불현듯 찾아간 묘소엔 제비꽃만

고개 숙여 반기는지라.


무릎 끓고 용서를 구하고

기도함이 전부였다.

부정(父情)은 어디 가고

동그란 봉분에는 흰나비만

나래 펴고 맴돌고 있을 뿐이다.

나는 아버지의 젊은 모습을

본 적이 없다.

53세에 내가 태어났으니~


아버지의 잔상은 언제나 노인이셨다.

아버지는 대구가 고향이셨다.

1908년생, 대구상고 2회 졸업생이다.

초ㆍ중학교 다닐 적인 1970년대에는

아버지가 졸업한 대구상고 야구부가

좋은 성적을 거두던 시기다.


당신이 졸업한 모교가

야구중계 할 때면 대청마루에

삼 형제를 앉혀 놓고

라디오 볼륨을 높여 응원하셨다.


앞마당에는 아카시아 꽃 향기가

진하게 퍼졌고

아버지는 어린아이처럼

환한 얼굴로 좋아하셨다.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아버지 사진(어머니.큰누님,둘째, 셋째누님과 함께)

초등학교 입학식, 며칠 전이었다.

친구가 던진 돌멩이에 머리를 다쳐

병원에서 봉합 수술을 한 적이 있었다.

몹시 추웠던 입학식이었다.

나를 손수 업고

학교에 가던 일이 생각난다.


환갑이 다되신 아버지,

나를 업고 가는 것이 그렇게 좋으셨는지

엉덩이를 두드리며 기뻐하시던 모습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아침을 굶고 간 나를 위하여

3km나 되는 먼 길을 점심을 싸가지고

오신 적이 있었다.

2교시 수학시간(김ㅇ문 선생님)

이었다.

우연이 창밖을 봤다.


운동장 한가운데 낯익은 모습이

꾸부정하고 느릿느릿하게

교실 쪽으로 걸어오신다.

한 손에 뭔가를 들고 계신 아버지가

운동장 한가운데에 계셨다.

점심 도시락이었다.


순간, 친구들에게 연로한 아버지를

보이는 게 싫었다.

알량한 자존심이 발동했던 것이다.


화장실이 급하다며 선생님에게

거짓말을 했다. 꾸중으로 허락을

받고는 잽싸게 뛰쳐나갔다.

도시락 가방을 낚아채며 고맙다는

말도 없이 도망치는 나를 보며

온화하게 웃으시며 모습이

너무나 생생하기에 눈물로

후회한다.


어릴 적 비슷한 연배의 어르신들에게

'별칭(別稱)'을 얘기하면

모르는 분이 없을 정도였다.


강직하고 대쪽 같은 성격을

가지신 분이셨다.

청렴하게 공직 생활을 하셨기에

경제적으로 빈궁했지만

남들에게 손가락질은 당하지

않으셨다.


대학교 1학년 때 별세 하셨다.

돌아가신 지 1년도 채 안되어

어떤 형사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서에 간 일이 있었다.

어머님도 경찰서에 급하게

오셨다.


수사를 책임지던 경찰 간부가

어머님을 보시고는 웬일로 오셨냐며

인사한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적에

부하 직원으로 사건을 잘 해결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후광이 아니었으면 낭패를

봤을 것이고, 인생이 어떻게 꼬였을지도

모르는 큰 사건이었다.


아버지가 그저 고마울 뿐이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힘없이 걸으시던 뒷모습을 생각하니

눈앞이 희미해진다.

아버지를 등에 업고 잠시라도

그 따뜻한 체온을 나누고 싶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더욱 가슴을 저민다.


아버지 감사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그리고 너무나 사랑합니다.


- 2022년 어느 늦은 봄날 아버지를

그리며 적다-

청보리 익어가는 늦은 봄, 아버지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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