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닿을 그날에 띄워 보내는 조각배
언젠가는 닿을 그날에 띄워 보내는 조각배
그 첫 번째 편지
안녕하세요 원장님
"어서 오세요 혜인 씨~"라고 진료실에 들어설 때마다
듣던 원장님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게 될 날을 상상하며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아마 이 편지는 마지막 진료일에 전하게 될 편지인 것 같습니다.
정신과에서는 환자와 주치의 관계를 동반자라고 표현한다고 하던데
저는 그 표현에 정말 든든했습니다.
제가 위에 올라가지도 않고 밑에 있지도 않은 함께 걷는 사람이구나라는 사실이 주는 위안이
얼마나 컸는지 모릅니다.
컴퓨터 앨범을 뒤적거리다가 치료를 받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즈음에
제가 먹던 알약들을 찍어둔 사진을 봤는데 8~10알 정도 됐던 것 같아요.
사실 조금 이질감이 났었던 것 같아요. 내가 저렇게 많이 먹었다고? 하면서 바로 외면해 버렸습니다.
과거의 저는 더 이상 돌아가면 안 되는 그래서 외면해야 하고 잊어버려야 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저는 그 시간들을 용감하고 멋지게 기억해주고 싶습니다.
시내에 많은 정신과 간판을 보며, 그리고 네이버 검색에 뜨는 수많은 정신과들을 보며
어디로 가야 하지? 하던 불안, 혼란을 느끼다가 처음 들어선 정신과는
그냥 사람 사는 곳이었습니다.
정신과 진료를 받는 환자의 표정은, 그리고 몸짓은 뭐가 다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환자들에게 관심도 없이 핸드폰을 만지며 진료를 대기를 하지만요.
생각해 보면 정말 용감하고 멋졌던 것 같아요.
제 생애 이렇게 용기를 내고, 또 꾸준히 노력해 온 시간들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요.
그거 아세요?
제 허벅지에는 제가 제 몸에 낸 상처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어요.
유독 흉터가 사라지지 않아서 그냥 그대로 두었습니다. 한 때는 타투 스티커를 붙인 적도 있습니다.
지금은 그냥 내 몸의 흉터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냥 제 몸의 일부요.
제가 언제 진료일인가, "원장님께 꼭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저 요새 너무 행복합니다."라고 말씀드렸던 것 기억하시나요?
그 말에 그 말을 듣는 저도 너무 행복하다고 답해주셨던 것 기억합니다.
사실 산다는 건 너무 행복한 일의 연속이 아니라, 그다지 불행하지도 않고 한 번씩 아주 작은 행복의 순간들을
눈 크게 뜨고 찾아보다 보면 만날 수 있는 그런 것 같아요.
그 사실을 알게 된 요즘은 무척이나 덤덤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약이 또 줄었고, 다음 진료일은 평소보다 더 긴 시간을 지나야 잡혀 있습니다.
진료 일 때마다 할 말이 줄어드는 요즘,
상담 시간 때마다 멋쩍은 웃음만 짓는 요즘,
"보통의 삶"에 다가가고 있구나 생각합니다.
보통의 하루, 보통의 일주일이 모여
보통의 삶을 만든다는 것이
기적이라는 것을 저는 지난 몇 년간 직접 몸소 경험하고 깨달았습니다.
비로소 이 길고 어둡지만 빛이 있었던 터널이 마지막이 보인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원장님이 진료실에서 매일 살고 있는 그 보통의 하루들 덕분에
얼마나 많은 이들의 하루들이 다시 일어서고 있는지를
저는 알고 있습니다.
원장님도 기억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을 적어 보냅니다.
저는 이 앎을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할 것 같습니다.
보이는 것 너머의 세상이 있다는 것도 잊지 않고 살겠습니다.
다음 진료일에 편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원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