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3(수정). 삶의 의미를 좇는 것은 하나의 문화다

문화에 뿌리 박은 목적론이라는 인간관

by 수민

사실 그 무언가란, 문화의 내용 그 자체이다. 인간의 삶은 그 지향점을 추구하는데 쓰여야 한다는 문화는 그것을 추종하는 집단의 존속에 기여했기에 결과적으로 그 집단에 기생하는 그 문화 역시 존속하고 퍼지게 되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집단이 곧 존속을 위해 확장시킨 ‘나’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나’의 형태는 세포(구성원) 핵 안에 있는 ‘나’에 관한 설계도로 인해 정해진다. 마찬가지로 확장된 ‘나’의 형태는 각 구성원이 믿는 집단(확장된 나) 정체성 즉, 문화(혹은 그의 일부 내용)로 인해 정해진다. 한편 설계도나 문화는 그들이 빚어 놓은 개체, 집단과 그 명을 함께하게 된다. 따라서 그 개체, 집단이 존속이라는 목표를 향하는 데 있어서 내부와 외부 상호작용 요소로부터 받는 방해를 이겨내기 위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야만, 존속할 수 있다. 즉 결과적으로 현존하는 문화는 그것을 따르는 집단이 외부 집단 간의 갈등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기여했거나, 여러 변화로 인해 구성원이 결집하지 못하고 스스로 와해되는 일을 막았던 과거가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설계도와 문화를 ‘나’의 존속을 위한 형태를 정하는 것이라는 공통선상에서 올려놓고 보면 그 내용에 무엇이 포함되었어야 현존할 수 있는지가 명확해진다.


즉 집단에서 오랫동안 공유해 온 신념은 집단의 정체성과 형태(구조)가 정해지는데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결과적으로 집단 내부에서 발생하는 온갖 상호작용과 집단 외부에서 발생하는 온갖 변수에도 불구하고 해당 집단 속 개체들이 해당 집단을 유지하겠다는 선택을 이어나가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실 자세히 살펴보면, 인간을 정신적인 주체로 보고 더 나아가 그 삶이 그 주체가 원하는 추상적인 가치이자 공통 가치를 향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내용은 집단존속 및 집단생활에 기여하는 내용이 듬뿍 포함되어 있다. 일단 그 정체성이 가진 내용 그 자체가 우리가 구조상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메타인지, 통제, 동조 기능 등으로 삶의 지향점을 추론하기 위한 단서를 경험하기에 삶의 지향점에 관한 내용을 포함시킨 집단 정체성에 동조할 수 있다. 따라서 누구나 경험할 수 있거나 동조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닌, 다른 내용으로 집단 정체성을 구성한 집단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시간이 흐르며 기존의 집단 정체성을 정면으로 부정할 이가 출현할 가능성이 낮았을 것이다. 그래서 집단 확장 및 유지에 유리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인간으로 정의하고 그 인간을 정신적인 주체를 지닌 자로서 정의하는 일은 인간이라는 내집단에게 정신적인 주체가 지닌 두 가지 특성을 부여하는 것과 같은데, 결과적으로 그 두 가지 특성은 집단 존속에 기여할 수 있다. 먼저 우리는 메타인지 기능을 통해 우리 안의 주체가 신체로부터 독립적인 위치에서 그것을 관조하거나 통제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물질(신체)이 정신(주체)에 속박되어 있고, 반대로 정신은 물질에 거의 속박되지 않은, 이 비대칭적인 관계는 곧 한쪽이 더 우월하다고 여기게 될 단서가 된다. 즉 우리는 주체가 신체에 비해 더 우월한 입장에 있는 것만 같은 경험을 하게 되고 그 우월함을 ‘정신’ 혹은 ‘정신적인 주체’라는 개념을 정립(추론)하는데 포함시킨다. 따라서 집단 정체성을 정신적인 주체를 지닌 자로 정의하는 일은 곧 그 구성원을 물질적인 것 그 이상의 존재로 정의하는 일과도 같다. 이는 반대로 그 집단 밖에 있는 존재를 물질로부터 자유로움, 우월함을 얻지 못한 자로 여기는 일이 된다. 즉 우리를 정의하는 일은 곧 우리와 밖을 나누는 선을 긋는 일인데, 그 선을 물질로부터의 자유로움으로 둔다는 것은 그 선 밖에 있는 존재, 우리 집단 밖의 존재를 물질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결정과 행동을 담당하는 주체가 신체에 얽매인, 그래서 상대적으로 기능이 저열한 못한 존재로서 바라보는 일이 된다. 이는 결국 내집단에 우월함을 부여하고 외집단에 열등함을 부여하는 일이 되기에, 집단 정체성에 정신적인 주체를 명시하는 일은 집단 내부와 외부 존재들로 하여금 해당 집단의 정체성에 동조하도록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동조는 집단 존속의 훌륭한 재료가 된다.


정신적인 주체라는 개념이 가진 또 다른 특성은 확장 혹은 연결이다. 우리는 동조라는 기능을 통해 상대방이 경험하는 바를 똑같이 경험하는 것만 같은 느낌에 휩싸인다. 이와 같은 경험은 우리가 가진 주체가 피부라는 물리적인 장벽을 넘을 정도로 확장될 수 있고 더 나아가 상대방이 가진 주체와 연결되어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추론의 단서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정신적인 주체라는 개념을 정립하면서, 동조 기능과 그것이 주는 경험을 응용해, 다른 정신적인 주체와 연결될 수 있다는 특징을 포함시킨다. 이처럼 우리를 연결 가능한 존재로서 정의하고 그 내용을 공유하는 일은 여러 변수로 인해 해당 집단의 구성원이 어쩔 수 없이 단절감을 느끼고 그 단절감을 표출해 사회적인 비용이 발생하는 경우를 어느 정도 예방하거나 대응하는데 기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이와 같은 연결성을 명시하지 못한 집단은 구성원이 경험하는 단절감과 그로 인한 영향을 방지할 방법이 더 적기에, 와해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더 컸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주체가 갖는 물질 이상의 우월함과 연결 가능성이라는 특징은 집단 존속에 크게 기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공통 지향점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지는 기반을 마련한다. 구체적으로 정신적인 주체라는 개념과 통제 기능이 주는 경험이 만나게 되면, 공통 지향점에 관한 논리가 만들어질 수 있다. 통제 기능은 우리가 추구할 것과 추구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그 이정표를 따른 결과가 매번 성공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가끔 그 이정표를 따르다가 예상치 못한 위험을 마주할 수도 있고 또 이미 확보한 생존 보상을 잃게 될 수도 있다. 통제 기능은 이와 같은 실패를 학습해 실패를 반복하지 않도록 이정표(예측 편향)를 수정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일관성 없는 이정표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그 이정표는 지금 당장 우리가 가진 유일한 이정표이기에, 그 불규칙해 보이는 것을 어떻게든 뚫고 그 이정표 나름의 규칙을 찾아 긍정할 수 있어야 삶을 이어나갈 수 있다. 이렇게 통제 기능과 메타인지 기능이 상호작용하며, 우리는 납득하기 어렵지만 납득해야만 하는 문제를 가지게 된다.


이 난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바로 스스로가 정신적인 주체라는 믿음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정신적인 주체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스스로가 추구하는 것 역시 정신적인 것이기에 물질 그 자체에 관한 판단(이정표)은 변덕이 있을 수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저번에는 특정 물질을 그토록 갖고 싶어 했지만, 이번에는 멀리하고 싶은 이유는 우리는 정신적인 주체로서 그 물질 그 자체가 아니라 물질 속에 존재했던 가치를 추구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우리는 타인의 신체라는 물질적 대상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추상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음식이라는 물질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맛있음이나 만족감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곤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주장은, 스스로를 정신적인 주체로 여기는 다른 이들에게도 쉽게 동조된다. 이는 실제로 동조 기능을 통해 서로가 느낀 바를 공유하는 것만 같은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 뇌는 자신이 마주한, 사랑에 흠뻑 빠진 사람을 보고 그 뇌가 하고 있는 활동을 자신도 똑같이 재현해보려고 하거나 음식을 먹고 온갖 미사여구와 행복한 표정을 남발하는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의 뇌에서 벌어지는 일을 똑같이 재현해보려고 한다. 이처럼 우리는 대상이 다르더라도 사랑이라는 감각만은 사람이 동일하게 겪는 것만 같은 경험을 하거나, 그 음식이나 음식을 맛보는 감각 기관과 뇌가 다르더라도 똑같은 종류의 맛있음을 겪는(공유하는) 것만 같은 경험을 하곤 한다. 그러면서 결국 우리는 서로가 같은 것을 좇고 있었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그렇게 정신적인 존재가 물질보다 우월한, 추상적인 가치를 좇는다는 명제는 연결 가능한 정신적인 존재는 우월함에 관한 기준도 공유하기에 공통 가치를 추구한다는 명제로 변하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정신적인 주체에게 공통 지향점이 있다는 생각은 우리의 행동의 틀이 일정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과 이어진다. 삶의 지향점을 공유한다는 이야기는 곧 그 지향점을 향하기 위한 삶의 계획들, 즉 삶의 이정표를 공유한다는 것과 그 의미가 같다. 이는 그 이정표를 통해 해 나갈 행동들 역시 같다는 뜻이기에 행동의 원리 혹은 지향점이 같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서로 공통 지향점을 지닌 존재라는 믿음은 서로 이해 가능한,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만 행동을 이어나갈 것이라는 믿음의 근거가 된다. 혹은 반대로 서로 통제를 벗어난, 배신에 가까운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즉 신이라는 지향점을 공유하든, 돈이라는 지향점을 공유하든, 진리라는 지향점을 공유하든, 우리는 같은 지향점을 공유한다는 타인을 만나고, 그 사실로부터 일정한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행동을 기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다방면으로 집단 존속에 기여할 수 있는데, 특히나 서로의 행동이 일정한 틀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이러한 믿음은 오랫동안 함께 일하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 따라서 공통 지향점이라는 개념은 함께 일함, 즉 공동 생산 체계가 유지되는데 꾸준한 영향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집단 존속에 기여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동조를 통해 집단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그것이 결과적으로 개체의 존속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집단이란 곧 존속을 위한 다양한 과제를 같이 헤쳐나가기 위한 공동체 혹은 생존 자원을 공동으로 생산하기 위한 모임이다. 이처럼 집단을 이룬다는 것은 곧 공동 생산을 한다는 것이며 혹은 같이 일하고 나눠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는 자신의 피와 땀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구성원을 먹여 살리는데 쓰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한편, 이러한 공동 생산은 현실적으로 다양한 걸림돌을 마주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이 맡은 바를 하면서 동시에 상대방이 얼마만큼 일하는지 알 수 없고, 또 만약 그 상대방이 맡은 업무의 종류가 다르다면 상대방이 공동 생산에 있어서 얼마만큼이나 기여했는지 측정할 방법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남 혹은 남이 하는 일이 나만큼 서로를 위해서 피와 땀을 흘려주는지를 확인할 수 없다. 그래서 그러한 상대방이 포함된 ‘우리’를 위해서 얼마만큼 헌신적으로 공동 생산에 참여해야 하는지를 두고 고민하게 된다.


따라서 분업과 협업 그리고 분배가 포함된 공동 생산 체계는 그 구성원끼리 서로 다른 곳에서 서로 다른 종류의 일을 하더라도 결국 같은 집단 속 구성원이기에 같은 마음으로 헌신할 것이라는, 상호 간의 믿음을 계속 주입해 줘야 작동할 수 있고 또 유지될 수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믿음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할 방법 중 하나가, 서로의 행동 원리가 같은 범주 내에 있다는 믿음의 근거가 되는, 삶의 지향점이라는 내용을 포함한 집단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정신적인 주체가 그 삶을 사용해 지향하게 되는 공통적인 지향점이 존재한다고 믿음으로서 공동 생산에 필요한, 서로 어느 정도는 같은 마음으로 일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될 수 있다. 그렇게 공동 생산 체계를 유지하고 집단으로서의 삶을 유지해 왔다.


한편 공동 생산은 반대로 그 구성원에게 서로가 정체성과 지향점을 공유하고 있다는 경험을 제공할 수도 있다. 그래서 반대로 공동 생산을 하다 보니 공통 지향점에 관한 내용에 닿았다고 추측해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엄밀히 따지자면 선후관계가 명확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이처럼 공동 생산과 공통 지향점은 서로가 유지되거나 강화되는데 기여한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집단이 다양한 변화를 겪으면서도 집단을 유지해 내고 공동 생산이라는 생활양식까지도 유지했다는 것은 어느 시점에서 공동 생산이 문화를 강화하고 문화가 공동 생산을 강화하는 순환을 성공적으로 형성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현존하는 집단은 결국 그 순환의 재료가 되는, 공통 지향점이라는 개념을 어느 시점에서 발명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너와 내가 유사한 방식으로 겪는,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는 무언가를 통해 너와 나의 실체를 찾으려고 노력했고, 그 끝에서 ‘우리’를 같은 추상적 가치를 추구하고 함께 일하며 살아가는 존재, 인간이라고 정의했다. 기록상으로도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의 본질을 공통 지향점을 추구하는 정신으로 여겨왔고, 그 생활양식을 공동 생산 체계에 소속되어 기여하는 것으로 여겨온 것으로 보인다. 즉 반대로 공통 지향점을 지닌 인간이라는 집단 정체성과 공동 생산이라는 생활양식을 문화에 포함시키지 못한, 집단은 역사라는, 다양한 상호작용이 넘쳐났던 무대 안에서는 결과적으로 그 명맥이 유지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인류라는 집단이 오랫동안 환경 속에서 유리한 입지를 유지하며 존속한 이유를 설명하는 한 가지 가설 역시, 공동 생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또한 그 공동 생산의 기반이 되는 것이 서로가 서로를 같은 존재로서 바라보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가 같은 존재인지를 확인하고자 하는 일이 바로 어떤 추상적인 대상을 신뢰하고 있는 지를 확인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해당 가설에서도 특정 추상적 가치를 믿는다고 증명하거나 약속하는 일이 곧 그 믿음과 약속을 지닌 자를 특정 행동 범주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제한시키는 일과 같다고 바라보는 것이다. 즉 우리는 신, 국가, 법, 화폐, 진리 등등 물질적인 실체가 없는 추상적인 대상을 믿음으로써 그 밖을 벗어나는, 인간답지 않다고 여겨지는 행동을 스스로 제한하거나, 하지 못하도록 사회적인 압박을 받는다. 그래서 그러한 이들이 모인 공동 생산에서는 그런 믿음이 없는 집단에 비해 배신이 상대적으로 드물다. 반대로 그 배신이 드문 그 기간 동안 신뢰가 학습되기 때문에 공동 생산 집단 내에 믿음의 유무로 인한 격차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커진다. 이처럼 유리한 입지는 지속되거나 재생산될 확률이 높기에, 결과적으로 추상적 가치에 관한 믿음을 공유한 집단만이 환경에서 존속해 냈을 것이다.


즉 정리하자면 인간의 삶에 지향점이 존재한다는 말은 곧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인간은 물질적인 신체를 갖고 있음에도 그것보다 우월한 주체를 가진다. 마침 그 주체는 어떤 지향점을 갖는데, 그 지향점 역시 당연히 물질보다 우월한 것이다. 또 그 주체는 신체를 넘어 서로 연결되어 정보를 공유할 수 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각 주체는 그 우월함에 관한 가치관 역시도 공유하며, 결국 주체는 공통 가치관을 추구한다. 이처럼 주체를 가진 인간은 누구나 유사한 가치를 추구하며 살기에, 그들이 해나갈 행동은 서로 일정한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처럼 삶에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는 사실상 이와 같은 내용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삶의 지향점을 믿으며 기꺼이 서로를 믿고, 또 다른 나로서 여기며, 공동 생산할 수 있었다.


즉 삶의 지향점이란 사실상 우리가 상대방과 물리적으로 나뉘어 있고, 또 우리가 상대방의 속마음과 미래 행동의 규칙을 알 수 없다는, 눈으로 확인 가능한 명백한 사실을 기능이 선사하는 느낌과 경험을 통해 복잡한 가설을 만들어 반박하는 개념이다. 결국 삶의 지향점이란 아주 치밀하게 쌓아 올린, 인간이라면 누구나 사회적인 가치를 따라야 한다는 논리이다. 그래서 우리가 본능적으로 해오던 집단생활을 더 강화하거나 유지하는데, 적지 않게 기여해 왔을 가능성이 크다. 즉 우리가 과대한 이상과 자아상을 유지했던 이유는, 그 하얀 거짓말이 지금까지 우리가 발명한 다양한 개념들 중에서도 집단과 그 집단에 속한 개체의 존속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것 중 하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와해되지 않고 일정 기간 일정 이상의 규모로 유지되며, 역사와 문화를 후대에 남길 수 있었던 집단은 그 문화 안에 삶의 지향점이라는, 우리의 정체성과 공통 지향점을 명시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다만 특정 문화가 존속했다는 것이 꼭 다른 문화를 제거한 끝에 살아남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 당연히 그 문화를 가진 어떤 집단이 꼭 다른 집단을 제거하거나 흡수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문화의 존속 양상은 그것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갖는다. 이는 우리가 한 번에 다양한 집단에 속하고 다양한 정체성을 지닐 수 있으며, 또한 상황에 따라서 그 소속을 바꿀 수도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동조 기능은 우리 의식의 통제 밖에서 발생하고, 우리는 그 영향으로 마음의 울타리를 넓히곤 한다. 우리는 그렇게 경험한 소속감을 통해 그 감각이 느껴지는 대상을 묶어 집단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 이처럼 집단이라는 것 역시 우리가 스스로의 머릿속에서 소속감이나 배척감과 같은 느낌을 단서 삼아 그려 놓은 개념이다. 즉 물질적인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종의 개념이자 특정 정체성을 공유하자는 약속으로서 존재한다. 그래서 회사도, 국가도, 독서 모임도 실재하는 물질이 아닌 약속으로 탄생한 개념(정체성)이기에 그것에 참여한 구성원들이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그것이 존재한다는 약속을 하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처럼 동조라는 기능의 결과물로서 소속감과 그 느낌으로부터 유추한 개념인 집단은 물질적인 실체가 아닌, 우리가 가진 변덕스러운 예측 방식에 의해서 생기고 없어지고를 반복한다. 우리를 묶어주는 무언가가 물리 세계의 제약을 받는 물질적인 울타리가 아니라는 것이며, 심지어 자주 제멋대로 나타나고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상황에 따라 자신이 소속되었다고 느끼는 집단, 즉 소속감과 정체성, 공통 지향점을 달리 경험하게 된다. 예를 들어 나는 집에서는 가족이며, 국가 대항전을 볼 때는 한국인이고, 심리학을 공부할 때는 인류이며, 생물학을 공부할 때는 생명체로써 그 소속을 경험하거나 명시한다.


이처럼 집단 정체성은 유연한 개념이기에,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집단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반대로 하나의 집단 안에도 여러 종류의 정체성이 섞여 공존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국가 구성원, 즉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명시하면서 지금껏 다뤄온,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포함시킬 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 관한 내용이나, 역사, 거주민의 외관과 같은 내용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즉 예를 들어 한국인은 공통 가치관을 인지하고 따를 수 있는 인간이며, 한국 역사에 동조하는 존재이고, 소주나 매운 것을 상대적으로 잘 먹는 존재 등등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처럼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는 인간이라는 정체성, 특정 역사를 따르는 정체성, 특정 식문화를 따르는 정체성 등등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현존하는, 우리가 만든 집단의 존속과 번영의 핵심이 공동 생산이기에, 공동 생산의 기반이 되는 공통 지향점이라는 집단 정체성은 어떻게 보면 존속에 있어서 가장 우월한 집단 정체성 중 하나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설명했듯 집단 정체성은 공존이 가능하다. 따라서 공통 지향점과 관련된 집단 정체성이 우월하다고 해서 그것이 살아있는 생물 마냥 다른 집단 정체성이나 그것을 지닌 집단을 모두 잡아먹고 존속해 냈다고는 볼 수는 없다. 실제로 현존하는 모든 집단 정체성이 외부 집단과의 마찰로 인한 결과라는 역사적 근거는 없다. 따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집단 대부분이 삶의 지향점과 관련된 내용을 집단 정체성 안에 포함하고 있는 이유는, 엄밀히 따지자면 그러한 내용을 완전히 배제한 집단 정체성, 문화를 가지고 있는 집단이 내부와 외부 변수를 견디지 못하고 일찍이 와해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즉 공동 생산 체계를 가동하고 유지하기 위한 큰 규모의 집단적 정체성 형성이 필요한 집단 단위, 예를 들어 국가와 같은 집단이 만들어질 때, 공통 지향점을 집단 정체성 안에 포함시키지 못했다면, 즉 그 국민에게 생활양식이나 역사적인 정체성을 부여하기 이전에 인간을 정의하고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아예 심어주지 못했다면 오래가지 못하고 와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처럼 결과적으로 온갖 종류의 집단 정체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언젠가 발명된 공통 지향점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을 정의하고 그것을 통해 공동 생산을 유지한 집단만이 역사에 남아, 인류라는 집단 정체성에 영향을 끼치기에, 현존하는 집단 구성원,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의 삶에 추구해야 할 지향점이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우리 세포가 존속을 위해 작동하는 방식과, 존속해 낸 문화가 품고 있었던 정체성은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얽혀 우리가 스스로를 정의하는 데 있어서 같은 결론에 다다르도록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 결과, 자신의 경험에 귀 기울이며 탁월한 추론을 해내는 이들도, 그러한 추론을 못하더라도 사회적인 정보에 영향을 받는 나머지 이들도 모두 삶에 지향점이 있다는 결론에 닿는다. 특히 공교육이 활성화되어 있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 대부분은 삶의 지향점에 관한 논리를 명시한, 고대 그리스에 살았던 선조의 지식이 기초가 되는 내용을 교육받기에, 우리에게 삶의 지향점을 좇는 일은 더욱 당연한 일이 된다.


그래서 우리 존재와 삶에 관한 정의는 시대에 따라 그 단어만 바뀔 뿐 결국 그 뜻은 바뀌지 않는다. 옛날에는 인간에겐 영혼이 있으며, 그 영혼이 원하는 것은 낙원이기에, 그 낙원 입장 심사에 충족하고자 카르마(인과, 사회적 평판)를 신경 써야 한다고 설명하며 그 구성원이 결과적으로 사회적인 가치를 추구(동조)하도록 유도했다. 과학이 발전하고 유물론이 득세한 21세기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와 같은 오래된 인간관과 세계관에게 냉소를 날리며, 영혼과 낙원이라는 개념을 부정한다. 하지만 실재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영혼과 거의 동일한 개념인 정신, 존재, 자아, 의지, 의식, 마음과 같은 개념을 인간을 정의하는데 여전히 사용한다. 뿐만 아니라 그 존재에게 삶의 의미가 있다고 설명하는 일을 통해 공통적으로 지향할 바를 설정하며, 결국 사회적인 가치를 좇아야 한다는 논리를 만들어낸다. 냉소가 무색할 정도로 우리가 스스로와 그 미래 행동의 규칙을 그리는 방식은 아무것도 바뀐 게 없다. 오히려 섣불리 지은 냉소 때문에 우리의 오만하고 논리적이지 못한 부분이 과거에 비해 더 부각될 뿐이다.


기능과 문화는 그토록 강력하다. 우리는 그토록 사회적이다. 지금까지 다뤄온 내용은 우리의 추론 능력이 기능이 주는 경험과 문화, 사회성을 넘어서서 전혀 다른 답에 도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우리가 도달한 삶의 지향점이라는 답은 기능과 문화의 결과이지, 정신적인 주체가 지성과 합리성을 통해 도달한 이 세상의 본질이자 진리, 이상이나 답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과대평가했고, 세상을 과소평가했다. 그렇게 엉성하지만 존속해 왔다.


이번 장에서는 현존하는 사람 대부분이 인간에게 삶의 지향점이 있다고 믿는 현상을 뇌의 작동 방식, 메타 인지, 통제 기능, 동조 기능, 문화라는 다섯 가지 요소로서 설명하는 가설을 소개했다. 즉 동시에 삶의 지향점이 실존하기에 우리 대부분이 삶의 지향점을 좇는다는 가설을 반박했다. 다음 장부터는 이번 장에서 소개한 가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더 세세하게 다룰 것이다. 뇌의 작동 방식, 메타 인지, 통제 기능, 동조 기능, 문화라는 다섯 가지 요소를 한 장씩 다루면서, 해당 가설에서 각 요소를 특정한 방식으로 소개한 이유가 되는 심리 과학 연구들을 소개해볼 것이다. 예를 들어 다음 장에서는 이번 장에서 소개한 뇌의 작동 방식에 관한 가설의 근거가 되는 연구를 다루며, 그러한 가설이 형성되는 과정을 함께할 것이다.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있던 기존의 가설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본 가설이 과연 더 엄밀한 근거를 갖고 충돌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함께 확인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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