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목표 혹은 의미라고 불리는, 삶의 지향점이라는 개념은 아마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면서도 낯선 개념이 아닐까 싶다. 모두가 알지만 모두가 모른다. 많은 이들이 그 존재를 인지하고 그 실체를 밝히고자 노력하지만, 그 누구도 그 일을 성공하지 못한다. 매번 실패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실체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자체는 의심하지 않는다. 이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지향점이 있을 것이라고 추론할만한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체 속에 독립적인 주체를 경험하고 그 주체가 무언가를 강렬히 원하는 듯한 경험을 한다. 신체를 조종하는, 신체보다 상위의 존재인 그 주체가 원하는 것이라면 아마 물리적인 세상에 속한 것들보다 더 우월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우리는 정신적인 지향점이나 삶의 정답, 즉 삶의 지향점이 실재한다고 상상한다. 한편, 이러한 경험과 추론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이 경험해 온 바이며, 그중에서는 마땅히 따를만한, 대단한 권위를 가진 위인들도 있었다. 이 사회적 단서를 다시 근거 삼아 우리는 삶의 지향점이 실재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삶의 지향점이 뭔지는 모른다.
무언가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오점을 심리 과학으로 접근해 찾아본다는 것은 우리가 근거로 삼는 경험과 인지를 의심해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애초에 독립적인 주체에 관한 경험을 한다고 해서 그 경험을 있는 그대로 해석해 우리 안에 주체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 맞는지를 검토해 보는 것이다. 이처럼 심리 과학은 경험과 행동을 둘러싼 인과 관계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지식 체계이기에 오래된 실패를 극복하고자 심리 과학을 통해 삶의 지향점을 바라보는 일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삶의 지향점을 추론하는데 영향력을 행사하는 다양한 경험과 행동의 인과를 과학을 활용해 더 엄밀하게 분석함으로써 그 개념 혹은 과정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
하지만 무턱대고 그와 같은 주장을 펼쳐놓을 수는 없다. 먼저 우리는 일단 이 복잡한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애초에 삶의 지향점이라는 개념이 다른 여러 개념이 복잡하게 얽혀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도 모를 만큼, 개념의 표면적인 부분만을 알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의 경험과 수많은 타인의 지지가 있기에 당연히 삶의 지향점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어왔다. 반복된 실패에도 그 원인이 잘못된 지향점을 찾아서라고 생각했지, 지향점의 존재 가능성 자체를 의심해 본 적은 없다. 무엇보다 ‘나’는 당연히 존재한다고 생각해 왔고 그러한 믿음에 구조에 관해서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자아, 의식, 마음 등)를 경험을 통한 추론의 결과로써 여겨본 적이 없으며 또 더 나아가 그러한 추론이 틀렸다고 생각해 본 적은 더더욱 없다. 이처럼 절대적인 것처럼 느껴졌던 여러 개념이 인간의 경험과 그로 인한 추론에서 발명되었다는 사실도 몰랐고 또 그 발명이 허술하다는 사실은 더더욱 몰랐기에, 삶의 지향점을 심리 과학으로 다뤄야 한다는 주장이 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삶의 지향점이라는 주제를 심리 과학으로 접근하는 방법에 관한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간과 지식(개념)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 했고, 또 그에 앞서 우리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납득시켜야 했다. 그리고 과학이 뭔지를 설명할 필요도 있었다. 따라서 앞선 1장은 그 실패에 관한 분석이 담기게 되었고 2장은 인간과 지식(개념) 그리고 과학에 관한 이야기가 담기게 되었다. 해당 내용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면, 이제는 드디어 삶의 지향점을 추론하기까지의 여러 요소를 심리 과학으로 파헤쳐볼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하나 짚고 가자면, 기존의 삶의 지향점이 완전히 틀렸고(존속에서 벗어났고) 그래서 무조건 고쳐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전 장에서 기존의 삶의 지향점이 존속의 구체적인 수단에 해당한다고 해석했다. 즉 경험을 있는 그대로 분석한 끝에 삶의 지향점을 믿고 따르는 일은 분명 존속에 기여하고자 생겼던 일이고, 또 일부 장면에서는 실제로 기여한다. 개인적으로는 애초에 의문 자체가 없는 사람이라면, 모호한 삶의 지향점을 따르며 사는 것이 오히려 존속에 알맞을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그래서 무턱대고 기존의 개념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주장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 책의 입장은 그 개념이 유효하지 않게 되어버린 일부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에게는 다른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설계도에 따른 구조에 영향으로 존속을 이뤄내고자 구체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과정을 똑같이 경험하면서도 누군가는 적절히 만족하며 살 수 있고 누군가는 반복된 실패와 의문 끝에, 방황에 휩싸일 수 있다. 이는 생명체가 공통적으로 존속을 추구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짐에도 개체마다 처한 환경이 다르고, 확보할 수 있는 정보가 제한적이며, 무엇보다 의사결정에 있어서 정보에 가중치를 주는 방법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즉 ‘나’의 존속을 지향하는 일과 그 목표를 이루는 일은 엄연히 별개의 일이다. 특정 목표를 지향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고 해서 어떤 상황에서라도 목표를 완수할 단 하나의 완벽한 방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은 주어지지 않는다. 이는 모든 물리적 존재에 적용되는 당연한 한계이다. 우리가 구조적으로 존속을 지향한다고 해서 또 그 영향으로 대다수가 삶의 지향점이라는 개념을 따른다고 해서, 매번 온전히 존속을 향해 순항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생명체는 존속을 추구한다고는 하지만, 직접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게 휩싸여 있다. 그리고 그 결과 생명체의 존속 추구 활동은 가끔 실패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생명체는 엉성해 보인다. 아니 우리는 엉성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실 모두가 삶의 지향점에 관한 과학적 지식을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삶에 관한 기준과 평가는 주관적이고 또 엉성하기 때문이다. 엉성한 우리가 엉성한 삶의 이정표를 만들고 그것을 기준 삼아 스스로의 삶에 관한 엉성한 평가를 내리기에, 누군가는 그 모호한 기준과 평가 속에서 충분히 만족하며 삶을 보낼 수 있다. 자신이 무엇을 좇으며 사는 지를 확실히는 모르지만, 어쨌든 삶에 전반적으로 만족할 수 있다. 이들에게 다가가서 굳이 그 만족 속의 엉성함이나 무지를 지적하며 그 만족을 짓밟을 필요는 없다. 개인적으로 이는 지양해야 할 행동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다만 엉성하다는 것이 완전히 비이성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인간에게 기대하는 이성 혹은 통찰 수준이 실제에 비해 지나치게 높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에 비해 엉성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엉성하다고 하더라도 우리 대부분은 실패를 마주하고 나서 반성하고 그 실패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낼 수준은 된다. 삶의 지향점을 추구하다가 실패했을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실패한 이는 엉성한 이정표에 실패로부터 얻은 반성을 충분히 덧칠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덧칠을 반복하다가 보면 도저히 그 이정표를 알아볼 수 없는 경우까지 오게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그 당사자는 망가진 이정표와 반복된 실패로 인한 상처만이 남아 더 나아갈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방황하는 이들은 단순한 덧칠에서 벗어나, 삶의 지향점이라는 기존의 이정표를 완전히 해체하고 그 과정에서 얻은 교훈을 응용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 필요가 있다. 즉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들의 방황은 삶의 지향점에 대한 얕은 거부로 인해 나타난다. 그들은 실패를 반복하고 그때마다 반성을 덧칠한, 새로운 삶의 지향점을 찾는 일을 반복하다가 결국 지쳐서 그 일을 관두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그러한 행동의 깊숙이에 있는, 인간이란 삶의 지향점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믿음과 그 논리로부터 벗어난 것은 아니다. 이처럼 더 이상 지향점을 찾기 싫지만, 사람의 삶은 지향점을 추구하는 내용으로서 채워야 한다는 생각에 갇혀 있기에 그 틀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삶을 채운다는 대안에는 닿을 수 없고, 결국 그저 방황하게 된다. 따라서 다시 일어나고 싶다면, 이들은 보다 깊숙이에 존재하는 그 틀을 해체해야 한다. 그래야만 스스로에게 실패라는 낙인을 찍었던 일이 오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꼭 거창한 지향점을 추구하지 않더라도 삶을 채워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어서서 나아갈 수 있다.
방황을 극복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이와 같이 복잡하기에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은 좁아진다. 새로운 이정표는 기존의 믿음을 대체할 내용을 가져야 하고 동시에 실패를 극복할 수단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기존의 믿음과 다른 방식으로 사람과 삶을 설명해야 하고 또 한편으로는 삶의 지향점을 추구하다가 실패한 지난날을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 복잡해 보이는 문제이지만 사실 답은 명쾌하다. 지향점이 절대적이지 않고, 우리의 선택 또한 절대적이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엉성한 우리가 나름의 최선을 다해 지향점을 따라가게 되었지만, 좀 잘 안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심리 과학 지식만이 체계적으로 우리와 그 삶의 지향점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설명해 준다.
이전 장에서도 다뤘듯 삶이라는 흘러간 시간의 뭉치를 들여다보면, 아마 두 가지 관점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시간 뭉치의 내용 속 일정함을 찾아내고 그 일정함이 어떤 궁극적인 지향점을 추구하고자 한 흔적이라고 해석하며, 삶을 곧 지향점을 추구하는 과정이라고 바라볼 수 있다. 반면에 시간 뭉치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일정한 행동을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행위로써 해석하며, 그저 그렇게 계속해서 존속을 위해 노력해 왔기에 그 결과로써 삶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바라볼 수도 있다. 즉 삶이라는 것은 주어지는 것으로서 바라볼 수 있고, 남겨낸 결과로써 바라볼 수도 있다. 과학이란 지식 체계가 쌓아온 것, 특히 그중에서 우리가 엉성하지만 치열한 존재라는 관점에 의하면 과학에서의 삶이란 아마 후자에 가까울 것이다.
그래서 방황을 극복하고 싶은 이에게는 심리 과학을 통해 삶의 지향점을 구성하는 요소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는 일이 필요하다. 과학이라는 지식 체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우리의 그릇은 작고 세상이란 그릇은 너무 방대하다. 그렇기에 모든 상황,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절대적인 답 역시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당연히 과학 지식이나 기존과 다른 삶의 지향점이 모두에게 답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을 정해진 레일로 바라보고 스스로를 그 레일에서 낙오한 이로 바라보는 이에게는 이와 같은 관점이 분명 도움이 된다. 촘촘한 레일로 이뤄진 세계관에서 벗어나, 세상과 자신을 답이 없는 방대한 세상과 그 속의 작고 엉성한 존재로 바라보게 된다면, 지금까지의 실패가 별거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 심리과학은 작고 엉성한 이가 방대한 세상 속에서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최선까지 제시해 줄 수 있다. 이 책의 목표는 딱 여기까지 이다.
여기까지 함께한 방황했던 이라면, 이전 장까지 과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가 세상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이 생각보다 제한적이라는 것까지는 납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인간과 그 삶에 관하여 무지한 것을 넘어 특정한 고정관념을 강하게 형성하게 된 과정은 여전히 의문스럽기만 할 것이다. 우리는 대체 왜 ‘내’가 어떤 궁극적 지향점을 좇아야만 한다는 추론을 하게 되는 것일까? 뿐만 아니라 대체 왜 모두가 이와 같은 추론을 하는 것일까? 이처럼 삶의 지향점과 관련된 요소는 그 출처, 혹은 발생 원리를 알 수 없고 그저 우리 마음을 강렬하게 흔들어 놓는다. 그래서 머리로는 과학이라는 지식 체계의 인간관과 인생관이 납득이 가더라도, 삶의 지향점은 여전히 미지 속에서 우리를 강렬히 끌어당기기에 기존의 인간관과 인생관을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관점의 전환을 위해 앞으로는 지금까지의 인간관을 바탕으로 두고, 즉 심리 과학 지식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지금과 같은 형태로 삶의 지향점을 추구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할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추론을 하거나 다음과 같은 공통 믿음, 문화를 가진다. 우리는 우리가 엉성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보 처리에 있어서 물리적인 제약을 받지 않고 진리를 추론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에 가까운 답을 찾는 것이 삶에 부여된 진실된 목적이라고 믿는다. 이는 과학이 설명하는 인간이나 답 혹은 삶과는 다르다.
따라서 과학적 세계관이 맞는다면, 우리는 존속을 위한 구조를 따라 작동했지만, 그 결과로 실제 구조와 상충하는 내용을 추론한 것이 되어야 한다. 이처럼 실재하는 우리의 자기 자신의 관한 왜곡된 믿음을 과학적인 인간의 작동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과학적 인간관이 기존의 인간관에 비해 더 충분한 근거를 갖고 만들어진 더 엄밀한 지식임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와 같은 괴리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 심리 과학에 의하면 우리는 엉성하기에, 존속을 위해 사람과 삶을 정의하면서도 실제와 다른 내용을 포함시킬 수 있고, 또 그래서 특정 상황에 처한 누군가는 그 내용을 응용한 결과 오히려 존속을 방해받을 수 있다.
크게 다섯 가지 요소를 통해서 지금의 삶의 지향점이 인공적으로 생겨난 과정을 심리 과학적으로 설명할 것인데, 우선 뇌의 작동 방식에 관해서 설명할 것이다. 본격적인 내용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생기는 강렬한 의문, 즉 내부 관측으로 형성한 과학 지식과 경험 분석으로 형성한 경험적 지식의 커다란 차이에 관한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자신의 내부에 관해 느낄 때, 뇌와 신경이라는 통제탑 대신에 신체 전체에 뻗어 있는 영혼이 신체를 통제하는 것에 가까운 상(이미지)을 경험한다. 또한 동기와 그 끝에 지향점에 관해 느낄 때, 반복된 학습으로 형성된 편향적인 추구 대상이 아니라 손에 넣으면 구원이 이뤄질 것만 같은, 경이로운 대상에 가까운 상을 경험한다. 이처럼 다양한 도구를 통해 외부에서 내부를 들여다보고 유추한 지식과 우리가 그저 자신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일에 귀 기울이며 유추한 지식은 거의 정반대의 내용을 갖는다. 두 가지 내용이 이렇게까지 다르다는 것은 외부에서 도구를 써서 관측할 수 있는 내용이, 내부 판단에는 전혀 고려되지 않을 수 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즉 밖에서 타자가 볼 수 있는 내용을 우리 내부의 ‘나’(뇌 혹은 그 속의 의사결정자)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가진 지성체 혹은 판단 주체에 관한 기존의 생각과 전혀 맞지 않는다. 신체의 아주 일부에 해당하는 머리 안에서 모든 정보를 주무르는 뇌라는 존재가, 또 인간의 찬란한 문명과 삶을 일궈내는 뇌라는 존재가 신체 내부에서 생기는 모든 일을 관조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즉 반대로 신체 내부의 일을 총괄적으로 관조하지 않으면서도, 내부 정보 처리를 수행하고 탁월한 외부 상호작용 결과를 보여준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신체 내부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세세한 정보까지 모두 관조할 수 있는, 마치 회사의 총괄 의사결정자와 같은, 총괄 관리자는 없다. 또 그런 기능 없이도 충분히 지금 우리 정도의 기능은 구현될 수 있다. 이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하고자, 우리 편견과는 거리가 있는 내용을 가진, 뇌의 작동 방식에 관한 하나의 가설을 다룰 것이다. 그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우선 우리 뇌는 하나의 주체가 아니라 정보를 주고받는 다양한 신경 세포의 집단이다. 따라서 우리가 경험하는 정신 활동은 이들 신경 세포가 하는 집단적인 의사결정의 과정 혹은 결과로 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 혹은 결과에는 우리가 그 과정을 꿰뚫어 보거나 관조한다고 여길만한 근거가 될, 각 주장의 구체적인 근거나 의도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즉 해당 집단적 의사결정의 참여자는 구체적인 근거나 의도 없이 주로 주장만을 펼친다.
학생 사회나 직장 사회에서의 합리적인 회의에 익숙한 우리는 근거나 의도 없이 주장만이 넘쳐나는 회의가 어색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끼리의 모임에서 이러한 회의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실제로 나나 다름없을 만큼 소중한 존재와의 회의, 예를 들어 아주 친한 친구와의 회의나 끈끈한 가족 간의 회의에서는 자주 근거나 의도가 생략되기도 한다. 이러한 관계에서는 각자의 주장 속에 결국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의도나 근거의 공유가 생략될 수 있다. 그래서 그저 주장만 어느 정도 강력하다면, 바로 동조하고 집단행동으로 이어진다. ‘나’를 이루는 세포 집단도 보통 비슷한 형태의 회의를 하기에 아마 이처럼 서로의 정체성(이해관계에 관한 믿음)을 아주 깊게 공유하는 집단에 가까울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처럼 우리를 이루는 구성요소는 주장하고 동조하고 실행하기를 반복하기에, 그 구성요소의 일부에 해당하는 우리 의식이 인지할 수 있는 내용은 전체 과정의 인과과정이 세세하게 포함된 보고서가 아니라, 대부분의 것이 생략된 오직 결론(주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순해 보이는 자동화 기계가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것은 발생하는 주장 자체는 다채롭기 때문이고 또한 상반되는 주장을 조율하는 기능정도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응할 수 있는 상황의 폭이 넓어질 수 있다. 어쨌든 이 때문에 세포들끼리의 회의 과정을 차근차근 볼 수 있는 외부 관조자의 지식과 그 일부에서 삐져나오는 몇몇 강력한 주장만을 인지할 수 있는 당사자의 지식은 달라지게 된다.
가끔 발생하는 신체 내부에 관한 혹은 자신의 결정에 관한 정보의 공백은 이와 같은 가설을 지지하는 근거가 되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가끔은 뇌 안에 모든 정보를 관조할 수 있는 상위의 의사결정자가 있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경험이 거짓이나 착각이라는 것일까? 만약 착각이라면, 그것도 문제가 된다. 만약 그러한 경험이 완전한 착각이어서 실제로 그런 의사결정자가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뇌 속에서의 일을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일까? 정리하자면, 그래서 뇌라는 집단에 관한 이와 같은 가설은 다시, 두 가지 의문을 만든다. 그렇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총괄 관리자, 의지 혹은 자아라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이처럼 뇌가 매번 충분한 정보 없이 의사결정을 하는 기관이라면, 그러한 뇌의 일부에 해당하는 우리 의식이 이렇게 책을 읽고 삶을 바꿔나가고자 노력하는 것이 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따라서 두 번째로 의식(의지, 자아, 정신, 마음 등)이라는 개념을 심리 과학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정확히는 의식이라는 개념에 씨앗이 되는 경험이나 행동을 심리 과학적으로 살펴보며, 그것을 구체적으로 어떤 기능으로서 여겨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다시, 결론만 간략히 다루자면 실제 의식은 영혼보다 메타인지에 가깝다. 의식과 같은 의사 결정 주체는 신체로부터 독립되지만, 신체를 관조하며 통제하는, ‘나’라는 존재의 본질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의사 결정 주체의 형태는 마치 선조가 제시한 영혼이라는 개념에 가깝다. 심리 과학은 이러한 경험이 실제로 결정 주체의 형태가 그렇기 때문에, 사실을 경험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여러 종류의 정보를 조합해서 만들어낸 일종의 착각에 가깝다고 설명한다.
그 목적이자, 인지되는 의사 결정 주체(의식)의 실제 기능이 메타 인지라는 개념이다. 과학적인 인간관에 의하면, 우리는 ‘나’의 존속을 향해 작동하는 자동화 기계이다. 마치 스마트 카에 운전자가 필요 없듯, 이러한 자동화 기계에는 굳이 결정을 내려줄 존재가 따로 필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결정 주체를 추가해 놓을 수는 있는데,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자동화 기계의 알고리즘을 벗어나는, 아주 드문 경우를 대비하기 위함 일 것이다. 의식의 존재에 관한 가설 중 하나는 의식이 이와 같은 이유로 자동화 기계에 탑재된 결정 주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의식은 영혼이나 총괄 관리자가 아니다. 실제로 의식은 대부분의 경우 인지만 할 뿐, 선택하지 않는다. 가끔 자동화 기계가 그 구조와 학습의 영향으로 형성된 관성에서 벗어나야 할 때, 의식은 결정권을 행사할 기회를 갖는다. 의식이 이와 같다면, 우리의 의문은 모두 해소된다. 의식은 그 역할에 충실하고자 신체를 소유하고 통제하지만, 그것으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져 관조하는, 마치 총괄 관리자 같은 감각을 지녀야 한다. 그래야 자동화 기계가 엇나갈 때, 그때가 언제라도 기꺼이 관여할 수 있다. 한편, 우리의 의식적인 노력 또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의식은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작동하더라도 분명 뇌의 관성적 결정에서 벗어난 선택을 하는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뇌와 의식에 관한 더 엄밀한 지식은 신체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적인 단 하나의 의지가 내부의 모든 정보를 검토하고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또 그럼에도 자기 자신의 내부 의사결정 주체를 그와 같은 방식으로 인지할 가능성이 높은 이유를 알려주며, 외부에서 관조한 근거를 토대로 만든 과학적 지식과 내부 경험만을 근거가 차이가 날 수 있음을 알려주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 구조는 우리가 기대하는 만큼 합리적인 구조가 아니고, 따라서 그 기능도 어딘가 엉성하다. 그럼에도 존속을 위해 그 한계 있는 구조, 기능을 운용하다 보면, 당연히 합리성을 깨뜨리는 정보의 공백이나 왜곡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뇌와 의식에 관한 실제 구조로부터 벗어나 의지 혹은 영혼이라는 의사결정 주체에 관한 왜곡된 그림을 인지하게 되곤 한다.
이어서는 영혼과 같은 왜곡된 의사결정 주체에 지향점이 부여되는 과정을 다룰 것이다. 일단은 인지되는 동기의 출처를 잘못 해석하다가 자신에게 절대적인 지향점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에 다다르는 과정을 설명하고자, 세 번째로 그 내면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자 뇌의 기능인 통제 과정에 관해 다룰 것이다. 간략히 결론부터 요약하자면, 지향점은 우리 영혼의 진짜 바람이나 영혼이 포착한 계시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지 못하는 통제 과정의 결과이다. 존속을 이루기 위해서는 존속의 이로운 것을 취하고 존속에 해로운 것을 제거해야 한다. 따라서 ‘나’의 존속에는 끊임없는 외부 변수 통제가 동반되어야 한다. 그래서 신경 세포는 늘 외부 환경을 자신이 원하는 데로 통제하고자, 보상(이로운 것)과 위험(해로운 것)을 예측하고 그에 관한 대응을 만든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처한 환경에 최적화된 예측 방식과 대응 방식을 구축하고자, 매번 통제로부터 피드백을 하고 그 내용을 학습한다. 이 과정은 늘 자동적으로 이뤄지고, 우리는 그 영향으로 해당 환경에 서서히 최적화(편향)되어 간다.
하지만 메타인지는 그 과정에서 아주 일부만을 인지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특정 대상을 향한 끌림이나 거부감을 끈질기게 경험하거나, 혹은 어느 정도 뚜렷해진 최적화의 결과로써 강렬한 끌림이나 거부감을 경험하게 된다. 출처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동기와 긴장의 끈질긴 반복과 그중에서 아주 드물게 발생하는 아주 강렬한 동기와 긴장은, 자신이 꼭 추구해야 하는 엄청난 대상으로부터 평생 동안 어떤 실마리가 주어지고 있고 자신은 그것을 따라 유인되고 있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이처럼 우리는 자각 없이 환경 통제를 위해 스스로를 최적화하면서 스스로가 그 환경에서 꼭 추구해야 할 것을 점점 더 선명하게 그리게 된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이 계시 같은 생각은 곧 영혼과 같은 의사 결정의 주체가 떠올리거나 혹은 포착한 것으로서 여겨진다. 이렇게 자신(의지)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 혹은 지향할 바라는 개념이 생겨날 수 있다.
이러한 개념은 타인과 삶의 방식을 나누고 그 내용에 동조함으로써 더 구체화되고 그 개념에 관한 믿음은 더 뚜렷해진다. 그 과정을 설명하고자 네 번째로, 동조라는 기능을 다룰 것이다. 간략히 설명하면, 동조 역시 생존에 큰 기여를 하는 기능으로 인지 밖에서 자동적으로 활발히 이뤄지고,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주장, 특히 집단의 주장에 생각보다도 쉽게 동조한다는 것이다. 동조라는 기능은 사실 앞서 다룬 통제라는 기능과 관련이 많은데, 사회적인 정보를 얻는 일, 특히 같은 집단의 구성원과 정보를 공유하는 일은 그 자체가 신경 세포에게 보상으로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양한 정보를 공유하고 동조한다. 그러나 단순한 동조 기능만으로는 사람(정신적인 주체)이라면 삶의 목표(공통 지향점)를 가져야 한다는 구체적인 내용의 믿음이 공유되는 일을 모두 설명하지 못한다. 해당 과정을 설명하고자 마지막으로, 문화의 내용이 어떤 암묵적인 압력을 통해 정해지는지에 관해 다뤄볼 것이다. 요약하자면, 집단의 생각과 행동의 방향을 정해주는 문화는 마치 개체에게 있어서 그 생각과 행동의 방향을 정해주는 설계도와 같다. 따라서 문화도 설계도처럼 그 내용에 그것을 지닌 존재의 존속에 기여하기 위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야 존속할 수 있다. 즉 문화는 집단 간의 자원 경쟁에 기여할 수 있는 내용을 품고 있어야, 해당 문화의 동조한 이들이 생존할 수 있고 그 집단과 함께 그 문화도 존속할 수 있다. 반대로 결과적으로 지금의 문화는 그러한 내용을 품고 있었기에 지금까지 존속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문화가 이와 같은 내용을 갖기 위해서는 두 가지 내용을 꼭 포함하고 있어야 하는데, 우선 그 구성원을 정의해야 하고 또 그 구성원의 지향점을 설정해야 한다. 이때, 그 구성원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 최대한 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하면, 확장성이나 포용성에 있어서 유리한 입지를 갖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그 내용이 분명치 않으면서(주관적)도 분명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으로 그 구성원을 정의해야 하는데, 바로 그러한 것들 중 하나가 의사결정의 주체에 관한 경험이다. 의사결정의 주체는 마음, 영혼, 의식, 의지 등 유사한 여러 개념으로 표현되는 만큼 뚜렷하게 정의되는 개념이 아니지만, 자신과 동족에게 그런 것이 있다는 것만큼은 뚜렷하게 경험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혼과 같은 개념이 기초가 되어 집단 구성원 정의에 활용되었을 확률이 높다. 또 공통 지향점을 설정하고 명시하는 일은 구성원 간의 이해관계가 불확실할 때 발생하는 다양한 비용을 감소시킬 수 있다. 따라서 지향점에 관한 경험과 동조 경험이 기초가 되어 만들어진 공통 지향점에 관한 개념이 문화에 명시적으로 포함되었을 확률이 높다.
사실 이는 현존하는 결과, 문화를 보고 반대로 그 과정을 유추한 것에 가깝다. 우리가 공유하는 문화 또 그것을 구성하는 철학의 깊은 곳에는 인간을 정신적은 존재로 정의하는 주장과 그 정신체가 공통적으로 지향해야 할 바가 있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따라서 해당 구체적인 내용이 개체의 존속과 집단의 존속을 위한 과정에서 발생했고, 또 실제로 존속에 기여했기에 지금까지 남았다고 해석한 것이다. 이처럼 삶의 지향점을 개체와 집단의 존속 활동의 결과로써 바라보는 가설을 간략하게 다뤄봤다. 다음 장부터는 각 요소마다 구체적인 근거를 들어가면서 가설을 다뤄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