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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2(수정). 삶의 의미의 기원에 관한 가설

세포 뭉치는 제한적인 구조를 갖고 살고자 발버둥 친 결과, 착각한다.

by 수민

삶의 지향점을 대하는 책의 태도가 이해됐다면, 이제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올 차례이다. 여기까지 함께한 방황했던 이라면, 이전 장까지 과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가 세상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이 생각보다 제한적이라는 것까지는 납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잘못된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는 것을 충분히 납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모두가 삶의 지향점이라는 것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고 추구하는 이 현상은 여전히 너무 신기하기에 섣불리 부정이라는 결론으로 향하기는 어렵다. 만약 과학적 인간관과 인생관이 맞는다면, 우리는 존속을 위한 구조를 따라 작동했지만, 그 결과로 우리 모두가 실제 구조와 거리가 있는 내용을 추론한 것이 되어야 한다. 이처럼 실재하는 자기 자신의 관한 왜곡된 믿음을 과학적인 인간의 작동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과학적 인간관이 기존의 인간관에 비해 더 충분한 근거를 갖고 만들어진 더 엄밀한 지식임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심리 과학에 의하면 이 현상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심리 과학에 의하면 우리는 엉성하게 ‘나’의 존속을 추구한다. 이는 험한 환경 속 당장의 존속을 이뤄내는 일조차 매우 어렵고 복잡하기에, 우리가 완전무결한(모든 상황에 대처가능하기에 최장기간 응용 가능한) 존속 방법을 지향할 확률이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더 많은 근거를 통해 자신과 세상을 더 엄밀히 파악하고 그것을 통해 의사결정을 하면 당연히 좋겠지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환경 속에서 의사결정 체계를 철저하게 벼리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단 적당히 의문에서 벗어나 수행하고 그때마다 의사결정 체계를 최적화시킨다. 그렇게 의사결정의 기반이 되는 자기 자신과 세상에 관한 그림은 특별한 기준 없이 덧칠되어 간다.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존속이 낮지 않은 빈도로 이뤄진다면, 이 과정은 반복되고 또 그 덧칠범벅의 엄밀하지 않은 인간관과 인생관은 기꺼이 채택된다. 즉 환경에 비해 엉성한 우리는 착각이고 실제와 다른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낮지 않은 빈도로 존속에 기여하기만 한다면 기꺼이 믿고 의사결정에 활용한다는 것이며, 애초에 그렇게 존속에 기여할 수 있는 내용조차 아주 흔하진 않기에 오히려 이와 같은 정보 활용은 존속에 있어서 유효한 전략에 가깝다는 것이다.


따라서 계속해서 이야기해 왔듯, 앞으로는 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을 구체적인 과정으로 설명할 것이다. 즉 ‘나’의 존속을 추구한 결과가 어떻게 개체가 삶의 지향점(인간관, 인생관)을 떠올리는 일로 이어졌는지, 또 더 나아가 어떤 과정을 통해 그것이 집단적인 믿음 즉 문화로서 정착되었는지를 설명할 것이다. 총 다섯 가지 존속과 관련된 요소를 다룰 것인데, 우선 뇌의 작동 방식에 관해서 설명할 것이다. 본격적인 내용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생기는 강렬한 의문을 해소하기 위함이다.




우리 뇌는 어째서 스스로가 생존을 위해 삶의 지향점이라는 개념을 발명해 놓고서는 그 사실을 까맣게 잊은 것일까? 심지어 그것이 원래부터 존재했다는 왜곡된 믿음을 형성하고 더 나아가 그것이 삶에 있어서 무조건적인 답이라고 믿을 정도로 빠져버려서, 그것을 좇다가 삶이 오히려 애초에 목표로 했던 생존에서 멀어지더라도 포기하지 못하기까지 한다. 우리가 아무리 엉성하다고 해도 다양한 일을 이뤄온 지성체인데, 이처럼 스스로가 하는 일의 최초 의도조차 망각하고, 또 그래서 잘못이 일어나도 반성하지 못하며 엇나간다는 사실은 쉽게 납득할 수 없다.


이와 같은 황당한 일이 생겨난 이유를 세 가지 정도 추측할 수 있다. 우선 첫 번째, 스스로 온전히 삶의 지향점이라는 개념을 만든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의 내면을 볼 수 없는 우리는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원하는 삶의 형태 역시 온전한 형태로 파악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와 똑같은 형상을 가진 존재인 타인, 그중에서도 주로 믿음직한 이웃이나 어른을 보며 그 답을 찾고자 한다. 그런데, 이때 우리가 참고하게 되는 사회적인 정보인, 생활양식이나 문화에는 그들이 최초에 어떤 의도를 갖고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내용이 되었는지 설명하는 내용이 보통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탐구하기보단 선택하고 행동하는데 급급하기에 그 원리나 출처를 깊이 따지지 않고 동조한다. 이렇게 우리가 비판적인 탐구 없이 사회적인 정보가 제시한 삶의 이정표를 거의 그대로 가져오기 때문에, 즉 애초에 자신이 의도를 갖고 이정표를 만든 것도 아니며 이정표 제작자의 의도를 굳이 탐구하지도 않기에, 삶의 지향점이 사실 사람이 존속하고자 만든 것이라는 생각에 닿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두 번째, 최초에 그런 의도와 기획을 갖고 삶의 지향점을 추구하게 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실제로 뇌가 한 일이란 삶의 지향점을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데 있어서 재료가 되는 것들이다. 각각의 행동들이 얽혀 결과적으로 삶의 지향점을 추구하게 되었지만, 분명 처음부터 기획한 일은 아니기에, 삶의 지향점이 최초에 어떤 의도로서 형성되었는지 알지 못하고 더 나아가 존속이라는 의도에 벗어나는 것을 굳이 경계하지도 않는 것이다.


신체는 그 부위마다 구조에 따른 존속 지향 활동, 즉 기능하게 된다. 그리고 그 기능의 일부는 경험되고 우리는 그 경험을 근거 삼아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자신의 내부나 해당 내부 활동(경험)의 원인이 될 만한 외부 요소를 추론하게 된다. 그렇게 확보한 정보 중 일부는 자신과 환경에게 더 알맞은 존속 방법을 찾을 단서가 되어 다음 기능에 반영된다. 우리가 존속하는 동안, 이와 같은 순환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그동안 다양한 기능이 여러 경험과 개념을 쌓아 놓는데, 예를 들어 메타 인지라는 기능이 이뤄지는 동안 우리는 스스로를 신체로부터 독립적인 결정 주체로 여길만한 경험을 하고, 그 경험을 토대로 스스로를 신체에 구속되지 않은, 정신적인 존재로 정의하게 된다. 또 통제라는 기능이 이뤄지는 동안 우리는 동기가 인지되고 해소되는 경험을 반복하게 되고 그래서 시간이 흐를수록 추구할 것과 말아야 할 것을 더 뚜렷하게 구분하게 된다. 그리고 동조라는 기능이 이뤄지는 동안 우리는 타인의 주장이나 경험이 자신에게 그래도 복사되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되고 그래서 특정 타인과 자신의 삶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 버린다. 순환이 반복되면서 이처럼 기능이 남긴 다양한 정보가 쌓인다. 이렇게 세상과 자신에 관한 정보가 계속해서 덧칠된 결과, 우리는 정신적인 존재인 인류에게는 공통적으로 추구할 정신적인 의미 혹은 가치가 있다고 믿으며 결정하고 행동하게 된다.


즉 우리가 처음부터 존속을 위해서 삶의 지향점을 추구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한 없이 작은 우리는 너무나 방대한 환경에 어떻게든 대응해 보고자 활발한 피드백, 학습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기능의 결과로써 나타나는 다양한 정보를 응용하는 일을 반복했고, 그렇게 쌓인 정보를 통해 해당 환경에 최적화된 이정표를 제작했다. 그렇게 완성된 그 이정표 중 하나가 인간의 삶을 생존이 아닌 의미라는 추상적 가치와 묶는 내용을 지닌, 어찌 보면 모순적인 내용의 존속 이정표이다. 이처럼 삶의 지향점이라는 이정표는 메타인지, 통제, 동조, 학습 등의 기능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일이 반복되어 나타난, 기획되지 않은 결과일 수 있다. 처음부터 각 기능의 본래 의도인 존속으로부터 엇나갈 가능성이 있는 경우를 배제한 결과물을 만들어야겠다는 의도나 기획을 갖고 시작한 일이 아니기에, 그 복잡한 과정 내내 진행과정을 관조하며 각각의 구성 요소들의 본래 의도와 충돌하지 않을 결과물이 나오도록 신경 쓰는 일이 이뤄지진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이유는 앞선 이유와 이어지는데, 뇌 속에 우리가 딱히 의도하지 않더라도 알아서 각 활동을 관조하고 조율하는 존재가 없다는 것이다. 즉 하나의 뇌 안에서 다양한 기능이 발생되는 동안 그 모든 과정을 총괄하는 단 하나의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사실 두 번째 이유를 설명하면서 다루지 않은 내용이 있는데, 바로 애초에 각각의 기능을 경험하면서 그 의도가 존속이라는 것을 의식적으로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독립적인 주체를 경험하도록 기능했고, 지향점을 경험하도록 기능했으며, 동조를 경험하도록 기능했다. 문화와 교육의 도움을 받아 각 경험을 연결해 삶의 지향점이라는 개념을 떠올렸다. 그런데 우리는 각 경험과 개념이 존속이라는 의도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인지할 수 없다. 그래서 삶의 지향점이라는 개념은 계획적이지 않은 복합적인 결과물로서 애초에 그 최초 의도를 추적하기 어렵지만, 만에 하나 삶의 지향점이라는 복잡한 이정표를 성공적으로 해체한다고 해도 애초에 각 부품의 제작 의도 추적이 어렵기 때문에 결국 존속이라는 최초 의도에 닿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 지식이 제시하는, 일반적으로 접하기 어려운, 우리 내부에 관한 다양한 근거를 통해서는 겨우 존속을 향한 경향을 추론할 수 있다. 이처럼 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의 흐름은 외부에서 도구를 사용해 관조할 수 있지만, 내부에서 스스로 관조할 수는 없다. 이는 뇌 안에서의 모든 과정을 관조하며 파악하는 존재, 즉 총괄관리자와 같은 존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애초에 우리는 뇌 안에 그 활동을 주도하는 하나의 총괄 관리자가 있다고 믿었기에 뇌가 스스로의 활동을 반성하지 못하는 현상을 의아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뇌가 모든 것을 총괄하는 관리자 아래에서 작동한다는 생각은 틀렸을 가능성이 크다. 혹은 하나의 총괄 관리자가 존재하는 대신에, 각 구성원에게 모든 정보가 세세하게 공유되는, 모두가 총괄 관리자가 될 수 있는 민주적인 형태로도 운영되지 않을 것이다. 뇌는 그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 특이한 작동 방식의 일환으로 보통은 기능을 제안 혹은 수행하면서도 의도와 같은 정보까지 세세하게 나누지 않고 그래서 결국 우리는 삶의 지향점이 어떤 의도와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 인지할 수 없게 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세 가지 이유 모두 다 삶의 지향점에 관한 추론을 왜곡시키는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이유가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면서도,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상식과 어긋나는 내용이기에, 뇌의 작동방식을 우선적으로 다루고 넘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우선 잘못된 상식이 만들어진 이유를 짚고 넘어가자면, 그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이전 장에서 다뤘던 주체에 관한 인지 편향이다. 이전 장에서 우리는 칩이나 전선 혹은 세포와 같은 단순한 물질이 협업을 통해서 고도의 기능을 구현하는 것을 납득하지 못해, 그 단순한 물질이 뭉친 것에 기능을 조절할 주체를 부여하는 인지 편향을 갖는다고 했었다. 그래서 컴퓨터의 소프트웨어를 기능을 조절하는 주체로 여기고, 뇌에 그 기능을 조절하는 의식 혹은 총괄관리자와 같은 주체가 있다고 여긴다. 이때, 뇌 기능을 조절하는 일은 사실상 자신을 이루는 모든 요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는 그 주체를 곧 ‘나’(혹은 나의 본질이자 핵심)로 여긴다. 결국 이 때문에 우리 혹은 그 뇌는 실제로는 수많은 세포가 뭉친 집단이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나’라는 하나의 개체로 여기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 혹은 그 뇌가 ‘나’라는 주체이자 독재자가 모든 것을 총괄해 의사결정 하는 구조로 오해하곤 한다. 그러나 앞서 설명했듯, 이 모든 것은 인지 편향의 결과물이다. 실제로 우리 혹은 뇌는 회사나 동아리 같은 집단으로서 집단적인 의사결정 과정을 겪는다. 이것이 우리의 첫 번째 오해를 걷어내고 마주한, 특정 과학적 가설이 소개하는 뇌의 실제 작동 방식이다. 해당 가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번째 오해를 걷어내야 하는데, 그 오해란 바로 우리 세포가 회사라는 집단에서 하는 것과 같이 소통할 것이라는 오해이다.


가족이나 회사 혹은 뇌와 같은 집단은 늘 함께 할 일을 정하고자 각자의 주장을 듣는 일, 즉 집단적인 의사결정을 위한 소통을 진행한다.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하나의 주장을 채택하거나 여러 주장을 조율하는 일을 거쳐야 하는데, 그래서 각 주장은 채택당하거나 최소한 조율 안에 포함되기 위해 다른 구성원을 설득할 타당성, 즉 타당한 근거와 의도를 지니고자 한다. 특히 내부와 외부 구성원 모두를 치열하게 설득하는 일을 반복해야 존속할 수 있는, 회사의 경우 근거와 의도를 준비하고 검토하는 일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곤 한다. 우리는 회사 생활이나 민주적 의사결정에 익숙한 현대 도시 사회의 민주 시민으로서 회사(업무)에서 하는 것과 같은 집단적 의사결정 과정에 익숙해하고 또 그렇게 도출된 답이란 곧 다수가 합의한 답이기에 그 소통 방식이 가장 합리적인 답에 도달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 여기곤 한다. 그래서 이와 같은 방식이 지성체의 내부에서도 일어날 것이라고 오해하곤 한다.


그러나 이처럼 의도와 근거를 꼼꼼히 따지는 방식은 분명 구성원 다수의 합의가 필요로 하는 상황을 전제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구성원의 합의가 굳이 필요 없는, 예를 들면 서로 신뢰가 깊기에 보통 서로를 늘 믿고 따르는 집단에서는 이와 같은 집단적 의사결정 방식이 필요 없다. 실제로 사이가 끈끈한 가족의 경우, 집단적 의사결정을 하는 데 있어서 굳이 주장의 이유나 근거를 따지지 않는 경우가 존재한다. 이와 같은 집단적 의사결정 방식은 얼핏 보기에는 합리성과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여러 이유로 충분히 채택할만하다. 예를 들어 소통 과정에서의 에너지와 시간의 소모를 최소화할 수 있다. 또 환경이란 늘 불확실성을 갖고 있기에 좋은 결과라는 것은 꼭 다수를 설득한 안건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즉 실제로는 다수의 합의가 꼭 좋은 결과나 합리성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그래서 회사에서 하는 집단적 의사결정이 곧 유일하고 절대적인 의사결정이라는 생각은 편견이자 오해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정황상 뇌는 회사보다는 끈끈한 가족과 같은 방식으로 소통하고 결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는데, 뇌 세포끼리는 서로가 또 다른 나이다. 이처럼 통일된 집단 정체성을 강력히 공유하고 있기에 어찌 보면 가족보다도 더 끈끈한 관계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한 그들의 소통은 주로 의도와 근거가 생략된 주장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럼에도 서로 믿고 따라준다. 이처럼 우리를 이루는 구성요소는 주장하고 동조하고 실행하기를 반복하기에, 그 구성요소의 일부에 해당하는 우리 의식이 인지할 수 있는 내용은 전체 과정의 인과과정이 세세하게 포함된 보고서가 아니라, 대부분의 것이 생략된 오직 결론(주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순해 보이는 자동화 기계가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것은 발생하는 주장 자체는 다채롭기 때문이고 또한 상반되는 주장을 알아서 조율하는 기능정도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응할 수 있는 상황의 폭이 넓어질 수 있다. 어쨌든 이 때문에 세포들끼리의 회의 과정을 차근차근 볼 수 있는 외부 관조자의 지식과 그 일부에서 삐져나오는 몇몇 강력한 주장만을 인지할 수 있는 당사자의 지식은 달라진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 총괄 관리자와 같은 존재를 경험한다. 바로 신체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적이면서 신체에서의 일을 통제하는 결정자, ‘나’ (의지, 의식, 자아, 마음으로도 불리는)라는 주체이다. 뇌에 총괄 관리자와 같은 존재가 없다면, 우리는 어째서 그러한 추론을 하게 될 만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일까? 경험 넘어 존재하는 것이 총괄 관리라는 기능이 아니라면, 그 넘어 존재하는 실제 기능은 무엇인 걸까? 무엇보다 ‘나’가 그러한 총괄 관리자이자 결정자가 아니라면, 지금 우리 의식이 하고 있는, 삶의 방향을 바꾸고자 하는 노력은 삶의 방향을 정하는 결정에 반영될 수 있는 것일까?


이와 같은 의문을 해소하고자 뇌의 작동 방식에 이어서 ‘나’라는 주체를 둘러싼 경험과 뇌 활동을 다뤄볼 것이다. 또한 ‘나’라는 주체와 관련된 경험은 우리가 스스로를 비물질적으로 바라보게 해서 결과적으로 삶의 지향점과 같은 추상적인 가치를 좇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이다. 따라서 삶의 지향점이라는 개념을 과학적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라도 ‘나’를 둘러싼 경험을 과학 지식을 통해 분석할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과대해석을 했다. ‘나’는 신체의 구조적 관성으로부터 벗어난 독립적인 결정을 내리기 위한 기능의 일부로서 경험되는 것이 맞다. 그 일환으로 늘 다양한 정보를 받지만 모든 정보를 관조하지는 못하기에 총괄 관리자인 것은 아니다. 또한 관성을 깬 의사결정을 할 수 있지만 독립적인 위치에서 모든 의사결정에 관여하는 것은 아니기에 신체로부터 독립적인 정신체이거나 혹은 신체보다 상위(우선권이 있는)의 의사결정자인 것은 아니다. 이 애매한 독자적인 결정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자동화 기계라는 사실(전제 조건)을 상기해야 한다.


과학적인 인간관에 의하면, 우리는 ‘나’의 존속을 향해 작동하는 자동화 기계이다. 그렇다면, 마치 스마트 카에 운전자가 필요 없듯, 이러한 자동화 기계에는 굳이 결정을 내려줄 존재가 따로 필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결정 주체를 추가해 놓을 수는 있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자동화 기계의 알고리즘을 벗어나는, 아주 드문 경우를 대비하기 위함 일 것이다. ‘나’라는 주체 혹은 의식이 존재하는 이유에 관한 가설 중 하나는 의식이 이와 같은 이유로 자동화 기계에 탑재된 결정 주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의식은 영혼이나 총괄 관리자가 아니다. 실제로 의식은 대부분의 경우 인지만 할 뿐, 선택하지 않는다. 가끔 자동화 기계가 그 구조와 학습의 영향으로 형성된 관성에서 벗어나야 할 때, 겨우 의식은 결정권을 행사할 기회를 갖는다. 의식이 이와 같다면, 우리의 의문은 모두 해소된다. 의식은 그 역할에 충실하고자 신체를 소유하고 통제하지만, 그것으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져 관조하는, 마치 총괄 관리자 같은 감각을 지녀야 한다. 그래야 자동화 기계가 엇나갈 때, 그때가 언제라도 기꺼이 관여할 수 있다. 한편, 우리의 의식적인 노력 또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의식은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작동하더라도 분명 뇌의 관성적 결정에서 벗어난 선택을 하는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또 무엇보다 우리는 이제 삶의 지향점을 향한 논리의 첫 단추가 어째서 잘못 껴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내부를 제대로 볼 수 있기 전까지, ‘나’를 정신체이자 상위 의사결정자, 총괄 관리자로 여기게 될 만한 경험 반복하며 그 경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우리는 ‘나’의 실체를 그리면서 그것이 신체로부터 독립적이며, 우월할 것이라는 특성을 부여하게 되었고, ‘나’ 자신이 추구하게 될 바를 신체적이고 물질적인 차원 이상의, 정신적인 가치이자 절대적인 가치로 여기기 위한 포석을 깔았다.




이러한 정신체에게 살아가면서 지향할 바를 부여해 주는 것은 예측에서 학습까지 이어지는 통제라는 기능과 그것이 주는 경험이다. 지금까지 숨이 붙어있다는 것은 지금껏 온갖 외부 변수 속에서 자신의 삶이 온전할 수 있도록 그들과 상호작용 했다는 것이고, 그러한 행동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행동의 내용을 정하기 위한 예측과 결정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예측과 상호작용의 반복적인 성공은 지금까지의 경험을 잘 학습하며 예측 방식을 환경에 맞게 최적화시켜 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처럼 온갖 변수와 공존해야 하는 삶이란 끝없는 예측, 대응, 학습, 즉 통제 기능 위에서 겨우 성립될(연장될) 수 있다.


이러한 일이 늘 반복되며 삶이 연장되는 동안, 우리 의식은 그 만연한 기능의 일부를 경험하곤 한다. 외부 통제, 즉 행동이 이뤄지기까지 신경 세포끼리 나눈 주장의 일부가 전달되기도 하고, 혹은 뇌에서 내려진 명령을 수행하고자 신체가 에너지 소모 상태로 전환될 때의 느낌이 경험되기도 한다. 이처럼 행동 이전에 존재해 마치 행동의 원인이 되는 것만 같은,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한 경험들을 하게 되는데, 우리는 그 내부에서의 일을 두루뭉술하게 묶어 동기라는 개념으로서 정의했다. 즉 정리하자면 그래서 우리 의식은 살아가면서 통제 기능의 영향으로 동기(로 인한 경험)가 생성되고 사라지는 경험을 계속해서 마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끈질긴 경험을 통해 ‘나’가 얌전히 쭉 만족하지 못하고 늘 무언가를 요구하는 모습을 그리며 그 욕심쟁이이자 변덕쟁이를 진정으로 만족시킬,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나’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무언가를 찾아봐야겠다는 추론을 하게 된다.


하필 통제 기능의 일부인, 학습은 동기가 가리키는 것을 점점 더 뚜렷하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긴 과정을 통해, 처음에는 모호하던 ‘나’의 요구가 점점 더 구체화되어 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나’가 원하는 것은 완전히 명확해지지는 못한다. 변화무쌍한 환경을 완벽히 통제하기 위한 단 하나의 답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답이라고 믿었던 것에 배신당한다. 예를 들어 뚜렷한 동기가 느껴지는 대상으로 향하던 과정에서 안 좋은 경험을 하게 될 수도 있고, 또 고생 끝에 얻은 대상으로부터 기대한 만큼의 만족이 경험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처럼 필연적으로 실패를 마주할 수 있고 그 실패 경험 역시도 학습의 대상이 되기에, 마음이 요구하는 바는 뚜렷해지다가도 한 번씩 지우개질을 당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나’가 지향하는 바가 있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 변덕쟁이가 원하는 게 명확하게 무엇인지 속 시원하게 알 수는 없다. 하필 ‘나’를 정신체이자 상위 의사결정자로 여기는 일은 이 답답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며 우리에게 어느 정도 답을 마련해 줄 수 있다.

“‘나’는 물질보다 상위의 존재이니 원하는 바가 눈에 명확하게 보이는 물질이 아닌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즉 그 정신체가 원하는 것이란 곧 추상적인 가치이기 때문에 우리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명확히 인지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모호했던 지향점은 그것을 추구하는 존재를 정신체로 정의함으로써 그 정체가 추상적인 가치로 밝혀지게 된다.




물론 모두가 ‘나’와 지향점에 관한, 이와 같은 뚜렷한 추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단서가 되는 경험을 할 뿐, 더 이상 추론을 이어나가지 않는 이도 존재할 것이고, 또 추론을 어느 정도 진행시켜 삶의 진행 방향에 관한 실마리를 잡았더라도 확신이 없어 실행하지 못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우리 대부분이 스스로를 정신적인 존재로 바라보고 또 스스로에게 추상적인 지향점이 주어진다고 믿는다. 이는 우리가 자신이 추론한 바를 적극적으로 나누기 때문이며, 뿐만 아니라 그렇게 공유한 정보를 깊게 신뢰할 만한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관적인 경험과 그에서 유래한 추론을 적극적으로 나누고 또 그것을 적극적으로 믿는다. 그 결과, 집단은 특정 믿음을 공유하게 된다. 즉 인간의 생태에는 문화가 존재한다. 우리가 이처럼 타인이 믿고 주장하는 바를 받아들이며 사는 것은 동조라는 기능이 작동하기 때문이며 또 그 기능이 주는 경험을 그대로 믿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렇게 동조라는 기능이 우리가 서로를 믿게 했기에 우리는 거칠고 고독할 수 있었던 존속이라는 과제를 헤쳐나갈 수 있었다.


하나의 개체는 수많은 세포가 뭉쳐서 만들어진다. 이들은 피부를 기준으로 그 내부 구성요소를 모두 ‘나’라고 정의해서, 즉 같은 정체성을 공유하기에 하나의 개체가 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 그들이 하는 일이란 ‘나’에 해당하는 피부 속 모두의, 즉 공동체의 존속이다. 각 개체, 즉 피부라는 울타리를 두고 정체성을 공유하는, 하나의 세포 집단은 자신의 집단이 존속하는 것을 목표 삼아 피부 밖의, 자신과 구별되는 존재들과 상호작용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러한 개체들이 모인 환경이란 각자의 존속을 좇고자 한 일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장소이기에, 포화가 쏟아지는 전장으로 비유해도 모자람이 없다.


이 무한히 반복되는 개인전에서 삶은 어디까지 연장될 수 있을까? 아마 길게 연장될 확률은 매우 낮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동조라는 기능은 그야말로 게임 체인져이었다. 동조는 개체가 개인전이 아닌 집단전을 하도록 유도해 결과적으로 개체의 삶을 더 연장시켰기 때문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동조는 피부를 넘어 ‘나’를 확장시키고 그 확장된 정체성이 유지될 수 있도록 기여한다. 그래서 개체는 자신이 속한 집단까지 ‘나’로 여기게 된다.


그 방법을 아주 간략히 설명하자면, 동조 기능을 주관하는 세포 뭉치는 타인에게서 나온 언어적, 비언어적 단서를 참고해 현재 타인의 뇌 활동을 모방해보고자 한다. 우리는 그 결과로써 타인과 동조화된 것만 같은 경험, 즉 우리가 그 경험을 추론의 근거 삼아 만든, 공감이라는 경험을 하게 된다. 공감은 자신이 곧 공감의 대상이 된 것만 같은 경험을 선사하며, 자신과 해당 타인의 경계를 어느 정도 허물어 버린다. 즉 자신을 확장시키는 경험을 선사한다.


또한 동조는 그 자체가 존속하고자 외부 환경에 대응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즉 동조 역시 예측하고 대응하며 학습하고 다시 그 내용을 응용해 예측하는 순환 속에서 작동하게 된다. 그 결과, 우리는 ‘나’라는 울타리에 들어오기 시작한 타인을 모방하고, 동조하며, 정보를 공유하고 싶은 동기를 발현하게 되고, 다시 그 경험을 학습하며 타인에게 다가가는 순환에 들어가게 된다. 물론 몇몇 순환(관계)은 통제 성공으로 유지되고 몇몇 순환은 통제 실패와 함께 무너질 수 있기에 정체성이 무작정 확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처럼 우리가 가진 ‘나’라는 울타리의 형태는 처음의 형태에 머물지 않고 쭉 변화하도록 하는 힘의 영향 아래에 있게 된다.


그 영향으로 결국 마치 ‘나’로 이루어진 것만 같은 집단이 만들어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갖고 있던 목표 역시 피부 내부에 존재하는 것들의 존속이 아니라, ‘나’만큼 믿고 사랑할 수 있는 또 다른 ‘나’와 함께 존속하는 것으로 변화한다. 즉 우리는 마치 우리를 이루는 세포가 각자의 정체성을 ‘나’라는 집단으로 정의하듯,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이 속한 집단으로서 정의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외로운 싸움이라는 선택지만이 존재하던 전장 역시 ‘나’만큼 믿을 만한 이들과의 협력이 가능해지면서 더 다양한 선택지가 존재하는 곳으로 변화한다. 결과적으로 개체는 늘어난 선택지를 통해 존속이라는 목표를 이룰 확률이 올라가게 된다.


한편, 이처럼 동조는 우리가 피부라는 물리적인 경계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마음이 연결된 것만 같은 경험을 선사하기에, 우리가 신체라는 물질의 한계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의 근거가 된다. 즉 또 한 번 물리적 한계를 넘는 경험을 제공해 ‘나’가 정신체라는 믿음을 더 강력하게 만든다. 아주 엄밀하게 표현하자면, 신체로부터의 독립성과 신체보다 우월함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던 정신적인 주체는 동조로 인한 경험을 통해 다른 주체와의 연결 가능성, 혹은 확장 가능성이라는 특성을 추가적으로 갖게 되는 것이다. 즉 실재하지 않는 정신체나 정신세계는 이처럼 우리가 경험하는 바로부터 유추하는 내용이 쌓이면서 지금과 같은 형태로 구체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 이처럼 동조와 집단화를 하게 되면 그 구성원과 주로 존속 방식(존속이라는 목표와 그 수단에 해당하는 생활양식)을 공유하게 되는데, 그래서 지향점을 좇는 삶의 방식을 공유할 확률이 높아진다. 특히 그뿐만 아니라 그 지향점의 구체적인 내용까지도 공유하도록 기여하기에, 그 추상적인 지향점을 개체라는 울타리에 제한되지 않는, 집단의 공통 지향점으로서 재정의 시킨다. 그래서 결국 동조는 인간(인류)의 삶이 지향점을 추구하는데 쓰이는 것이라는 믿음을 더 뚜렷하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


이렇게 메타인지, 통제, 동조라는 기능과 그것이 주는 경험이 쌓여 우리는 스스로가 누구이며, 그래서 그 존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관한 실마리를 잡는다. 뇌의 특유의 작동 방식 때문에 우리가 굳이 스스로가 하는 추론의 의도나 근거를 꼼꼼히 따지지도 않기에, 그 과정은 거침없이 진행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밀히 따지자면 모든 집단이 그 모든 실마리를 꼼꼼하게 응용해 인간(인류)의 삶이 지향점을 추구하는데 쓰이는 것이라는 답에 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먼 옛날 조상이 이뤘던 어떤 집단을 보면, 곰과 호랑이의 후예와 같은, 딱히 추상적이지도 않고 애초에 인간만을 그 울타리에 넣기 위해 고민한 흔적도 없는, 집단적인 정체성을 형성한 집단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분명 스스로를 물질적인 존재의 울타리를 넘어선 존재로 여기고 그 삶을 규정하는, 공통 신념이 주류가 된 집단에서 살아간다. 이는 해당 공통 신념, 즉 문화가 존속하고 퍼질 수 있도록 기여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무언가가 삶의 지향점이 지금과 같은 형태가 되는데 기여한 마지막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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