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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1(수정). 심리 과학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 이유

by 수민

삶의 목표 혹은 의미라고 불리는, 삶의 지향점이라는 개념은 아마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면서도 낯선 개념이 아닐까 싶다. 모두가 알지만 모두가 모른다. 많은 이들이 그 존재를 인지하고 그 실체를 밝히고자 노력하지만, 그 누구도 그 일을 성공하지 못한다. 매번 실패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실체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자체는 의심하지 않는다. 이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지향점이 있을 것이라고 추론할만한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체 속에 독립적인 주체를 경험하고 그 주체가 무언가를 강렬히 원하는 듯한 경험을 한다. 신체를 조종하는, 신체보다 상위의 존재인 그 주체가 원하는 것이라면 아마 물리적인 세상에 속한 것들보다 더 우월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우리는 정신적인 지향점이나 삶의 정답, 즉 삶의 지향점이 실재한다고 상상한다. 한편, 이러한 경험과 추론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이 경험해 온 바이며, 그중에서는 마땅히 따를만한, 대단한 권위를 가진 위인들도 있었다. 이 사회적 단서를 다시 근거 삼아 우리는 삶의 지향점이 실재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삶의 지향점이 뭔지는 모른다.


무언가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오점을 심리 과학으로 접근해 찾아본다는 것은 우리가 근거로 삼는 경험과 인지를 의심해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애초에 독립적인 주체에 관한 경험을 한다고 해서 그 경험을 있는 그대로 해석해 우리 안에 주체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 맞는지를 검토해 보는 것이다. 이처럼 심리 과학은 경험과 행동을 둘러싼 인과 관계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지식 체계이기에 오래된 실패를 극복하고자 심리 과학을 통해 삶의 지향점을 바라보는 일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삶의 지향점을 추론하는데 영향력을 행사하는 다양한 경험과 행동의 인과를 과학을 활용해 더 엄밀하게 분석함으로써 그 개념 혹은 과정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


하지만 무턱대고 그와 같은 주장을 펼쳐놓을 수는 없다. 먼저 우리는 일단 이 복잡한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애초에 삶의 지향점이라는 개념이 다른 여러 개념이 복잡하게 얽혀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도 모를 만큼, 개념의 표면적인 부분만을 알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의 경험과 수많은 타인의 지지가 있기에 당연히 삶의 지향점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어왔다. 반복된 실패에도 그 원인이 잘못된 지향점을 찾아서라고 생각했지, 지향점의 존재 가능성 자체를 의심해 본 적은 없다. 무엇보다 ‘나’는 당연히 존재한다고 생각해 왔고 그러한 믿음에 구조에 관해서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자아, 의식, 마음 등)를 경험을 통한 추론의 결과로써 여겨본 적이 없으며 또 더 나아가 그러한 추론이 틀렸다고 생각해 본 적은 더더욱 없다. 이처럼 절대적인 것처럼 느껴졌던 여러 개념이 인간의 경험과 그로 인한 추론에서 발명되었다는 사실도 몰랐고 또 그 발명이 허술하다는 사실은 더더욱 몰랐기에, 삶의 지향점을 심리 과학으로 다뤄야 한다는 주장이 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삶의 지향점이라는 주제를 심리 과학으로 접근하는 방법에 관한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간과 지식(개념)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 했고, 또 그에 앞서 우리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납득시켜야 했다. 그리고 과학이 뭔지를 설명할 필요도 있었다. 따라서 앞선 1장은 그 실패에 관한 분석이 담기게 되었고 2장은 인간과 지식(개념) 그리고 과학에 관한 이야기가 담기게 되었다. 해당 내용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면, 이제는 드디어 삶의 지향점을 추론하기까지의 여러 요소를 심리 과학으로 파헤쳐볼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하나 짚고 가자면, 기존의 삶의 지향점이 완전히 틀렸고(존속에서 벗어났고) 그래서 무조건 고쳐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전 장에서 기존의 삶의 지향점이 존속의 구체적인 수단에 해당한다고 해석했다. 즉 경험을 있는 그대로 분석한 끝에 삶의 지향점이라는 개념에 다다르고 그것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일은 분명 존속에 기여하고자 생겨난 일이고, 또 일부 장면에서는 실제로도 기여한다. 개인적으로는 애초에 해당 개념에 관한 의문 자체가 없는 사람이라면, 모호한 삶의 지향점을 따르며 사는 것이 오히려 존속에 알맞을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그래서 무턱대고 기존의 개념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주장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 책의 입장은 그 개념이 유효하지 않게 되어버린 일부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에게는 다른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설계도에 따른 구조에 영향으로 존속을 이뤄내고자 구체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과정을 똑같이 경험하면서도 누군가는 적절히 만족하며 살 수 있고 누군가는 반복된 실패와 의문 끝에, 방황에 휩싸일 수 있다. 이는 생명체가 공통적으로 존속을 추구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짐에도 개체마다 처한 환경이 다르고, 확보할 수 있는 정보가 제한적이며, 무엇보다 의사결정에 있어서 정보에 가중치를 주는 방법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즉 ‘나’의 존속을 지향하는 일과 그 목표를 이루는 일은 엄연히 별개의 일이다. 특정 목표를 지향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고 해서 어떤 상황에서라도 목표를 완수할 단 하나의 완벽한 방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은 주어지지 않는다. 이는 모든 물리적 존재에 적용되는 당연한 한계이다. 우리가 구조적으로 존속을 지향한다고 해서 또 그 영향으로 대다수가 삶의 지향점이라는 개념을 따른다고 해서, 매번 온전히 존속을 향해 순항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생명체는 존속을 추구한다고는 하지만, 직접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게 휩싸여 있다. 그리고 그 결과 생명체의 존속 추구 활동은 가끔 실패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생명체는 엉성해 보인다. 아니 우리는 엉성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실 모두가 삶의 지향점에 관한 과학적 지식을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삶에 관한 기준과 평가는 주관적이고 또 엉성하기 때문이다. 엉성한 우리가 엉성한 삶의 이정표를 만들고 그것을 기준 삼아 스스로의 삶에 관한 엉성한 평가를 내리기에, 누군가는 그 모호한 기준과 평가 속에서 충분히 만족하며 삶을 보낼 수 있다. 자신이 무엇을 좇으며 사는 지를 확실히는 모르지만, 어쨌든 삶에 전반적으로 만족할 수 있다. 이들에게 다가가서 굳이 그 만족 속의 엉성함이나 무지를 지적하며 그 만족을 짓밟을 필요는 없다. 개인적으로 이는 지양해야 할 행동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다만 엉성하다는 것이 완전히 비이성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인간에게 기대하는 이성 혹은 통찰 수준이 실제에 비해 지나치게 높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에 비해 엉성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엉성하다고 하더라도 우리 대부분은 실패를 마주하고 나서 반성하고 그 실패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낼 수준은 된다. 삶의 지향점을 추구하다가 실패했을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실패한 이는 엉성한 이정표에 실패로부터 얻은 반성을 충분히 덧칠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덧칠을 반복하다가 보면 도저히 그 이정표를 알아볼 수 없는 경우까지 오게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그 당사자는 망가진 이정표와 반복된 실패로 인한 상처만이 남아 더 나아갈 수 없게 된다.


구체적으로 그들의 방황은 삶의 지향점에 대한 얕은 거부로 인해 나타난다. 그들은 실패를 반복하고 그때마다 반성을 덧칠한, 새로운 삶의 지향점을 찾는 일을 반복하다가 결국 지쳐서 그 일을 관두게 된다. 하지만 이처럼 반복되는 반성이 소진으로 이어지는 동안, 보다 근본적인 원인에 해당하는, 인간은 삶의 지향점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믿음과 그 논리까지 비판하고 다른 인간관이나 인생관을 수립하지는 않는다. 그저 새로운 지향점을 찾는 일을 반복할 뿐이다. 결국 이들은 사람이라면 지향점을 찾고 추구해야 한다는 굳건한 믿음에 갇혀 있지만, 반복된 실패의 경험으로 지향점을 찾기 위한 동기 자체는 훼손된 상태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믿음에서 벗어난 다른 대안에 닿을 수 없고, 또 기존의 방식을 따라서 삶을 채워갈 동기는 없기에 그저 방황하게 된다.


이처럼 방황하는 이들은 단순한 덧칠에서 벗어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그 방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들이 해야 하는 일이란, 반복된 실패로 어렴풋이 의심했지만 감히 검증해보지 않았던, 삶의 지향점이라는 개념을 검증하는 일이다. 다만 우리의 목표는 방황으로부터의 회복이기에, 그 검증이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섣불리 마무리되어서는 안 된다. ‘사실 그런 개념은 허상이었고, 그렇기에 지금까지의 삶은 허상을 좇아온, 실패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결론은 지금까지의 선택과 그것이 쌓인 삶을 다시금 실패로서 정의하게 하고 그로 인해 새로운 선택을 향한 동기를 또다시 전반적으로 훼손시킬 수 있다. 또 무엇보다 이와 같은 단순한 반박은 삶을 채울 더 나은,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지도 않기에, 방황에서 벗어날 목표를 수립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지향점을 검증하거나 반박하는 것을 넘어,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 과정을 분석한다는 것은 해당 결과(사건)가 나타나기까지의 변수와 그 영향력을 더 엄밀하게 파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각 변수의 통제가능성이나 영향력을 다시 계산해 볼 수 있고, 또 결과의 기댓값을 수정할 수도 있다. 즉 실패를 극복할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하거나 실패나 성공을 가르던 기준점 자체를 재정의할 수 있고, 따라서 동기 훼손의 원인이었던 실패가 남긴 것들을 극복하기 위한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또 이처럼 삶의 지향점을 둘러싼 자신의 판단과 결정 과정을 엄밀히 살펴보는 일은 다음 목표를 수립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보통 그러한 것들을 살피지 않고 비교적 직관에 의지하며 목표나 의사결정 체계를 수립해 왔기 때문이다. 삶의 지향점과 같은 장기 목표이자 의사결정 체계를 만드는 데에는 당연히 복잡한 과정이 수반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그 복잡한 과정을 합리성과 지성이 주도하는 과정 정도로만 묘사하며, 그 안의 규칙을 제대로 파악해보지 않았다. 즉 우리는 삶의 지향점을 설정하는 과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의식적, 무의식적 요소와 그들의 구체적인 상호작용을 엄밀히 분석해 본 적이 없다. 이처럼 지금까지 목표이자 의사결정 체계를 만들면서 영향받아왔던 변수나 규칙을 제대로 명시하지 못하기에,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또 의식적으로 목표나 의사결정 체계를 만든다고 할 때, 기준을 명시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했다. 따라서 우리는 삶의 지향점을 수립하기까지의 과정에서의 변수와 규칙을 더 엄밀하게 파악하고 명시하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응용한 새로운 목표 설정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방황하는 이에게 필요한 것이란, 삶의 지향점을 추론하는데 영향력을 행사하는 다양한 경험과 행동의 인과를 파헤쳐보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심리 과학 지식이 체계적으로 그 인과를 파헤쳐준다. 그 지식이 해당 과정을 파헤치면서 알려주는 내용이란, 우리와 그 삶이 실제로는 기존의 편견과 다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기존의 우리는 우리가 시간과 공간이라는 물질적인 제약에서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존재로서 물질적인 제약에서 오는 목표인 생존을 넘어 의미나 가치라는 정신적인 목표를 좇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학 지식이 설명해 주는 우리는 엉성하게 ‘나’의 존속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스스로의 삶에 관한 판단을 내리는 과정을 살펴보니, 물질적인 제약에 깊게 얽혀있는 것을 넘어 잘못된 판단까지 남발하더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이상에 못 미치는 실패한 존재라기 보단 실제 우리의 모습은 엉성하며 이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자화상은 우리가 해온 실수를 충분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어줌과 동시에, 우리에게 진정으로 알맞은 목표를 설정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또 사람에 관한 관점의 차이는 그 삶에 관한 관점의 차이로도 이어진다. 이전 장에서도 다뤘지만, 인간과 그 삶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관점이 존재할 수 있다. 우선 인생이라는 시간 뭉치의 내용 속 일정함을 찾아내고 그 일정함이 어떤 궁극적인 지향점을 추구하고자 한 흔적이라고 해석하며, 삶을 곧 지향점을 추구하는 과정이라고 바라볼 수 있다. 반면에 시간 뭉치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일정한 행동을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행위로써 해석하며, 그저 그렇게 계속해서 존속을 위해 노력해 왔기에 그 결과로써 삶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바라볼 수도 있다. 즉 삶이라는 것은 주어지는 것으로서 바라볼 수 있고, 남겨낸 결과로써 바라볼 수도 있다. 전자의 인생관은 인간을 정신적인 존재로 여기는 관점과 이어질 것이고 후자의 인생관은 인간을 물질적인 존재로 여기는 관점과 이어질 것이다. 이렇게 인간관과 인생관이 연결되면, 다시 그들 각각의 삶의 지향점에 관한 관점도 더 뚜렷해진다. 전자에서 삶의 지향점이란 곧 정신 존재에게 있어서 삶의 유일한 답이고, 후자에서는 엉성한 존재가 존속을 지향한 결과, 실제로 삶이 잘 연장되기만 해도 성공적인 일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후자에 해당하는 과학적인 인간관과 인생관은 다시, 현재와 다른 과거의 행보를 포용할 수 있게 해 준다. 한편, 그래서 후자에 해당하는 타인을 인정할 수 없는 전자와 달리, 후자의 경우 전자에 해당하는 타인까지 포용해야 한다.


그래서 과학적인 인간관, 인생관에서 삶의 지향점에 관한 진실을 추적하는 일이란, 오직 방황하는 이에게만 간절하다는 것이다. 즉 현재와는 다른, 과거 자신의 행보를 포용하는 일은 현재 자신과 다른 태도를 가진 타인을 인정하는 일과도 같다. 과학이라는 지식 체계에 의하면, 우리의 그릇은 작고 세상이란 그릇은 너무 방대하다. 그렇기에 모든 상황,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절대적인 답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당연히 과학 지식 그 자체나 그것을 응용한 기존과 다른 삶의 지향점이 모두에게 답이 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하나의 답이 있다는 관점에 갇혀서도 잘만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을 정해진 레일로 바라볼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그 레일에서 낙오한 이로 바라보는 이에게는 과학적인 관점이 필요하다. 촘촘한 레일로 이뤄진 세계관에서 벗어나, 세상과 자신을 답이 없는 방대한 세상과 그 속의 작고 엉성한 존재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면, 그는 비로소 지금까지의 실패가 별거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심리과학은 작고 엉성한 이가 방대한 세상 속에서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최선까지 제시해 줄 수 있다. 이 책의 목표는 딱 여기까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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