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주변의 변수와 그 움직임을 예측하고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내부 정보 처리를 하기 위한 자원은 무한하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빠르고 효율적인 정보 처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때, 효율적인 내부 정보 처리를 위한 기반이 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분류다. 즉 에너지를 더 투입해 정보 처리할 것과 덜 투입해 정보 처리할 것을 미리 분류해 놓은 다면, 빠르고 효율적인 처리를 할 수 있다. 이렇게 자원의 효율적인 사용을 위해서, 초기에 파악된 몇 가지 단서를 가지고 미리 형성한 분류 체계를 따라 빠른 대응을 하는 것, 그것이 인지 편향이다.
해당 인지 편향 구축 과정을 구체적으로 그려보면, 주체와 움직임에 관한 연결고리 형성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우선 다시, 움직임을 구분하는 기준부터 살펴보자. 더 신경 써서 대응할 것과 덜 신경 써서 대응할 것을 가르는 몇 가지 기준에 관해서 생각해 보자면, 일단 영향력이 충분히 커야 한다. 그 크기 자체가 작거나 혹은 매우 희귀해서 우리 삶에 주는 영향력이 적다면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다. 또는 충분히 크더라도 움직임이 거의 없거나 미미해서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역시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만약 영향력이 충분하다면, 다음에 생각해 볼 것은 그 움직임의 예측 가능성이다. 움직임이 아주 단순하거나, 전혀 예측할 수 없을 정도인 존재는 굳이 오래 붙잡고 고민할 필요가 없다. 반대로 적당히 다양하면서 그 규칙이 추론 가능할 정도로 복잡해 보인다면, 에너지를 더 쓰더라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조금 더 나아가자면, 상대 변수가 우리의 예측과 대응에 맞서서 대응할 수 있는지에 관한 여부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상대 변수 역시 우리처럼 외부 변수 혹은 자극을 이해하고 그에 맞춰 대응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다면, 단발적인 대응으로는 상황이 완벽히 해결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그다음 수를 고민하거나 혹은 더 복잡한 대응을 하기 위해 더 오래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기준을 가지고 변수의 움직임을 반복적으로 관찰하며 그 특징을 구분하는 것이 인지 편향을 형성하기 위한 첫 단계가 된다. 한편 이와 같은 기준을 조금 더 단순화해서 표현하자면, 그 변수가 가진 내부 구조이자 기능을 구분하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영향력이 크고, 예측하기 어려우며, 자발적인 움직임을 갖는 경우를 고도의 기능을 갖는다고 표현할 수 있고 반대로 영향력이 작고, 단순하며, 수동적인 움직임을 갖는 경우를 단순한 기능을 갖는다고 표현할 수 있다. 따라서 인지 편향 형성을 위해 변수를 구분하는 과정은 변수의 움직임을 보고 그 기능의 정도를 추론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지 편향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또 한 가지 요소를 추론할 필요가 있다. 인지 편향이란 몇 가지 결정적인 단서로 빠르게 대상을 구분하고 태도를 정하는 일이기에, 바로 그 결정적인 단서를 추론할 필요가 있다. 즉 해당 인지 편향의 경우, 기능의 정도의 차이를 반영하는 결정적이고 직관적인 단서를 추론할 필요가 있다. 매우 어려운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 오히려 우리 주변에 직관적인 예시가 넘쳐난다. 우리는 가장 고도의 기능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것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또 가장 저능해 보이는 기능을 가진 것들에게도 둘러싸여 있다. 바로 살아있는 것과 죽어 있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들은 복잡한 움직임을 갖고 자발적인 상호작용이 가능하기에 복잡한 기능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무생물은 수동적이고 때문에 보통 그 움직임이 그것을 조작하는 이들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가기에 예측 가능하다. 그래서 그 기능과 구조가 매우 단순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자성을 띈 광물과 물과 같이 조건만 주어진다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무생물도 있기에 이러한 추론이 매번 옳다고 보긴 어렵지만, 관측이 제한되는 일상적인 환경 속에서 이와 같은 추론은 어느 정도 유효하다. 특히나 살아 있다가 죽은 것을 관찰하다 보면, 생명의 유무에 따라서 기능이 극명하게 차이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외관이 거의 달라지지 않았음에도 생명이 꺼짐과 동시에 자발적인 상호작용이 더 이상 이뤄지지 않게 되는,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되면 충분히 기능의 원천이 곧 생명이라는 추론을 만들게 될 것이다.
한편 생명이 있음에도 반응이나 움직임이 매우 단순한 이들도 존재한다. 그리고 그와 정반대로 사람과 같은 매우 복잡한 생명체도 존재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차이를 설명하고자, 움직임에 관한 편견의 단서를 생명에서 한 번 더 구체화한다. 그래서 우리는 미물은 갖지 못하지만 사람 혹은 사람과 유사한 생명체가 가진 것처럼 보이는 것, 생명이라는 조건을 통해 작동하는 자발적이면서 복잡한 움직임을 재현할 수 있는 무언가를 그려낸다. 바로 마음, 이성과 같은 주체이다. 우리는 복잡한 상호작용의 원천을 경험을 수용할 수 있는(정보를 인지하고 판단할 수 있는) 주체로 바라보고, 그와 같은 주체가 있는 생명체를 조금 더 특별한 존재로서 바라본다. 예를 들어, 가재가 주체가 없는 단순한 동물로 취급받던 시절(왜냐하면 일반적인 사람이 관측할 수 있는 가재의 움직이란 어항 속에서의 무기력한 움직임뿐이기 때문이다.) 그 위상은 입에 넣기에도 바빠서 신경 쓸 것도 없는 무언가였다. 하지만 가재가 아픔을 경험하고 그것을 토대로 다른 반응을 하는, 주체가 있는 존재란 것이 알려지자마자, 가재는 최소한 강아지를 대할 때만큼의 예를 다해야 할 존재로 변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복잡한 움직임이 이성, 지성, 마음과 같은 비물질적인 주체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한다. 정리하자면 우리는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무생물이나 미물은 주체가 없기에 단순한 기능을 갖는다는 편견을 갖고, 생물, 그중에서도 주체를 갖는 생물은 복잡한 기능을 갖는다는 편견을 갖는다. 그리고 그 편견을 따라서 전혀 다르게 반응(정보처리)한다.
그런데 몇몇 존재는 이와 같은 편견이 통하지 않는다. 신경 세포나 컴퓨터 부품 등은 주체나 생명이 없다. 그렇기에 우리의 편견에 의하면 고도의 기능을 구현하지 못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이들을 복잡하게 조립한 컴퓨터나 뇌는 자발적이고 복잡한 움직임(기능)을 구현한다. 편견이 의사결정에 끼치는 영향을 고려해 봤을 때, 이 부조화를 가만히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즉 에너지 효율성에 기여하는 의사결정 보조 도구에 생긴 문제를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이 예외의 경우를 처리해야 하는데,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는 미물의 집합체를 특별한 경우로 두고 구분하며 그에게 주체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뇌나 컴퓨터가 단순한 물질로 이루어졌을지라도 그 물질이 매우 복잡한 구조를 이루게 되면서 그 구조 안에 의식이나 소프트웨어와 같은 복잡하고 자발적인 주체가 잉태되었기에 결과적으로 고도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정리하자면, 우리는 주체 혹은 생명의 유무를 통해 그 대상이 구현할 수 있는 기능 혹은 움직임에 제한을 두는, 편견을 갖는다. 이러한 편견은 에너지 효율성에 기여하는 의사결정 보조 도구로서 형성되었으며, 그 내용이 어느 정도 비합리적인 만큼 단순히 경험을 통한 정보를 통해서 구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구체적으로 고도의 기능을 가진 사람과 단순한 기능을 가진 무생물 사이의 차이를 발견법을 통해서 추론하면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인지 편향은 신경 세포 뭉치나 얇은 판과 회로로 이뤄진 구조물에도 적용되었을 것이다. 해당 편견에 의하면, 주체나 생명이 없는 세포나 회로는 단신으로 뇌나 컴퓨터가 보여주는 고도의 기능을 구현할 수 없다. 따라서 단신으로는 불가능하나 그것을 복잡하게 조립하면서 고도의 기능을 구현할 주체가 형성되었다는 설명이 탄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세포나 판과 회로는 여전히 주체를 형성하기 위한 기반으로서 기능의 간접적인 영향을 주는 대상에 불과하고, 그 기반을 통해 구현된 의식과 소프트웨어 같은 주체가 기능을 직접적으로 구현하는 대상으로서 받아들여진다.
결론적으로 의식 혹은 소프트웨어가 그 신체(세포, 판과 회로)로부터 독립적인 주체라는 믿음을 이처럼 에너지 효율 개선이라는 필요에서 시작한, 반복되는 발견법으로 인한 결과로써 설명하는 가설이 존재하고 그것이 나름 설득력을 지니기에 그러한 믿음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수용한 정보, 즉 경험은 단편적으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존속을 위한 더 나은 결정을 위해서 그 정보는 다음 의사 결정 체계에 반영된다. 즉 우리 안에 그 정보를 다루는 작은 것들은 끝없이 최적화 혹은 학습을 해나간다. 한편 그렇게 형성된 체계는 다시 수용한 정보를 분석하는 과정에 반영되는데, 즉 인지 편향이 된다. 그렇게 우리는 특정한 방향으로 지식을 형성하고 다시 그 지식을 따라 특정한 방향으로 결정을 하게 된다. 특히 결정이 범람하는 일상생활에서는 그 결정 도구를 재검토하거나 해체하며 천천히 정교화시키는 기회는 흔치 않다. 결국 그렇게 우리는 발견법이 편향시킨 세상 속에서 살게 될 확률이 높다.
그 결과 중 하나가, 의식이 신체와 독립적이라는 믿음이다. 과학 지식은 신체 설계도에 존속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으며, 그 설계도를 따라 만든 구조물은 그 설계 속의 규칙을 따라서 작동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생각, 경험, 행동 등을 통제하는 뇌 역시 존속을 향해 작동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향점에 관한 생각만큼은 존속을 벗어난, 더 자유롭고 대단한 무언가일 것이라는 믿음을 갖곤 한다. 그 지향점을 떠올리는 주체인 ‘나’ 혹은 의식이 신체와 독립적인 것만 같은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신경 세포라는 단순한 물체가 ‘나’를 둘러싼 복잡한 경험이나 ‘나’가 결정하고 수행하는 고도의 기능을 모두 구현해 냈다는 사실도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복잡한 기능은 오직 주체를 가진 것만이 가능하다는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납득되지 않는 과학적 설명을 반박할 좋은 방법이 보이지 않는 주체(개념)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단순한 물체라고 해도 그것이 복잡한 구조를 이루면서 독립적인 주체가 만들어졌고, 그렇게 실제로 독립적인 주체가 구현되었기에 우리가 독립 감각을 경험하는 것이고 또 그 주체가 있기에 복잡한 경험을 하거나 기능을 구현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편견과 독립 감각을 근거 삼아 세포의 뭉치가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나’라는 주체를 탄생시키고 그에게 주체성과 독립성을 부여한다. 이는 우리가 간절히 해소하고 싶던 인지부조화를 한 번에 해결해 주는 명쾌한 가설이다.
하지만 그렇게 추론한 ‘나’ 혹은 의식은 독립 감각, 통제 감각, 고도의 기능 외에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다른 단서가 없다. 실체가 없는 주체이자 개념이기에 근거가 빈약하고 또 더 나아갈 수 없다. 즉 그런 ‘나’가 신체로부터 어떠한 독립적인 지향점을 가져야 하는지 설명하기 위한 단서가 적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나’의 독립적인 지향점을 명쾌하게 밝혀내는 일은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까지 쭉 실패해 왔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이와 같은 가설이 생물학적인 사실이나 우리의 발견법에 관한 반성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기에 실패라고도 생각하지만, 무엇보다 지향점을 찾는데 오히려 혼란을 주기에 실패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해당 가설은 편견을 따라 인지 부조화를 쉽게 해결하려고 한 결과라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그래서 결국 과학 지식에서의 인간과 그 행동 지향점이 더 설득력이 있는 가설이라는 것이다.
이번 장에서는 과학을 통해 바라본 사람과 그 지향점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기본적인 개념에 관한 이야기를 해봤다. 우선 특정 대상을 과학이라는 지식 체계로 바라보는 일을 이해하기 위해, 지식과 과학에 관한 개념을 정립하고자 했다. 지식의 개념은 그 인과관계를 추적하면서 정립했다. 구체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주변의 변수를 구분하고 그 움직임을 예측해 대응하는 일이 필요하다. 또한 그 내용을 주변과 공유해 같이 살아남을 수 있어야, 결과적으로 개체의 생존 확률은 더욱 올라간다. 따라서 우리는 변수를 구분하고 그 움직임의 일반적인 규칙을 찾아 공유했을 것이다. 이러한 행위를 개념화하면서 지식이라는 개념 역시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따라서 지식이란 무리와 공유하기 위해 만든, 포착한 정보로부터 추론한 일반적인 규칙이라고 개념을 정립했다.
지식 체계는 이러한 지식을 더욱 정교한 형태로 만들기 위한, 제작 과정에서의 규칙이자, 그 규칙 위에 쌓은 지식의 합이라고 정의했다. 과학은 이러한 지식 체계 중 하나로 정교한 지식을 형성하고자 지식을 형성하는 과정을 타인도 확인하고 검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그 규칙으로 삼는다. 다만 당연히 지식의 대상이 되는 일부 현상은 검증된 것만으로는 완벽히 설명할 수 없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그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현재 기술 수준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변수나 움직임으로 두는데, 과학의 경우 그렇게 파악하지 못한 무언가를 향한 가설을 만들면서 기존의 지식이나 관측할 수 있는 주변 요소를 최대한 활용한다. 즉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검증할 수 없는 무언가를 향한 가설을 만들 때조차도 검증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과학이라는 지식 체계의 특징이다.
이렇게 지식과 과학의 개념을 정하는 일을 통해서, 인간에 관한 과학적 지식을 만드는 일을 구체화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응용하자면, 인간에 관한 지식은, 인간을 마주할 때 우리가 주로 예측하고 대응해야 하는 부분과 그에 관한 일반적인 규칙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인간에 관한 지식에는 인간 행동 원리가 담겨 있어야 한다. 또 일부는 밝혀지고 일부는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는, 다양한 행동과 그 원리를 하나의 일반적인 규칙으로 정리하면서, 과학이라는 지식 체계를 사용한다는 것은 밝혀진 내용을 최대한 활용해서 그 내용을 구성하겠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한 방법으로 밝힌 인간의 행동 원리란, ‘나’의 존속이다.
다만 이는 우리가 기존에 알던 내용과는 다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동기를 경험하고 또 목표를 가진 다양한 이들을 관찰한다. 그러한 경험을 되돌아본 끝에 우리는 우리가 어떤 의미나 가치를 좇아 행동하는 존재라고 믿게 된다. 이렇게 삶의 당사자로서 경험한 바를 통해 구성한 지식은 삶의 관조자로서 더 다양한 근거를 긁어모아 구성한 과학 지식과 그 내용이 다르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까지 고려하고도 과학은 인간 행동 원리를 ‘나’의 존속으로 둔다. 왜냐하면 다양한 근거를 고려해 봤을 때, 결국 의미나 가치와 같은 지향점은 존속의 구체적인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행동의 원리를 이해하고자 행동을 둘러싼 인과관계를 더 엄밀하게 분석하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생물의 행동은 자신의 존속을 위해 자신과 구별되는 외부 요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행동은 정보를 파악하고 계획을 세우는 일 뒤에서야 이뤄질 수 있다. 인지되지 않는 해당 선행 과정은 우리 신체를 구성하는 작은 요소가 그 구조에 맞게 기능하면서 이뤄진다. 즉 행동은 신체 내부 구조에 영향을 받고 더 나아가 그 구조에 관한 설계도에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우리 행동의 범주는 그 설계도에서부터 정해진다.
해당 설계도에 담긴 정보를 완벽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온갖 이해관계가 빽빽하게 얽혀 있는 환경 속에서도 온갖 생물이 그 설계도를 성공적으로 후대에 넘기는 현상을 통해 한 가지 정도는 비교적 명백하다고 추론할 수 있다. 바로 설계도 그 자체에 존속과 재생산을 위한 내용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즉 설계도에는 존속과 재생산을 향해 자동적으로 기능하는 구조가 담겨 있을 확률이 높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 구조를 구현할 수 있는 범주를 품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그 범주는 성장하면서 조금 더 구체적인 내용으로서 굳어간다. 부모로부터 전해받은 설계도는 물려받은 그대로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관한 정보를 반영하면서 발현한다. 결국 그래서 처음 우리가 갖고 있던, 존속과 재생산을 구현하기 위한 내용은 성장하고 학습하면서 점차 구체적인 행동 원리가 되어간다. 그렇게 구체화된 행동을 반성하면서 추론한 행동의 지향점이 바로 표면적으로는 존속과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구체적인 목표나 의미가 된다. 이와 같은 일이 생겼기 때문에 도구 없이 세포 속 작은 일이나, 성장하기 이전의 일들을 알 수 없고, 오직 그 과거의 작은 것들이 만들어낸 충분히 큰 영향인, 행동만을 관측할 수 있는 우리가 의미나 가치가 곧 자신의 행동 원리라고 믿게 된 것이다.
자신의 동기나 목표를 찾고자 몇 날며칠을 고생한 이들에게는 이처럼 기초 목표가 외부 상호작용을 통해 자동적으로 구체화되어가는 일은 의식적인 목표 설정에 혼란만 주는 일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나름의 전략적인 선택의 결과로 해석된다. 즉 처음부터 구체적인 목표를 갖지 않고 경험을 통해 목표를 환경에 최적화시켜나가는 일은 존속에 도달할 확률을 높여준다. 왜냐하면 첫 번째, 환경이 변화가 매우 잦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설계도는 부모로부터 오지만, 우리가 살아가게 될 환경은 부모가 살았던 그 환경과 다를 수 있다. 따라서 부모와 완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그 설계도를 발현하기보다는 해당 설계도를 자신이 경험한 환경에 최적화된 방식으로 발현하는 것이 존속에 유리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두 번째, 우리의 정보 포착 및 예측 능력으로는 미래의 환경 변화를 온전히 계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리 모든 것을 계획하고 예방하고자 하는 것보다는 일단 경험하고 그 정보를 토대로 대응하고자 하는 것이 더 나은 결과를 만들 확률이 높다. 경험을 반영해 유전자가 발현되는 일은 결과적으로 이러한 일이 되어 좋은 결과를 만들 확률을 높인다고 해석된다. 즉 결국 더 잘 존속하고자 나름의 전략적인 선택을 한 결과, 구체적인 목표만을 인지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여전히 ‘나’의 지향점은 신체의 구조상 지향점인 존속과 별개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자신의 몸 안에서 의사결정의 주체를 인지할 때 신체와 독립되는 감각과 신체를 통제하는 감각 등을 단서로서 사용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신체와 구분되는 감각과 통제하는 감각 등을 통해, 신체로부터 독립적인 주체인 ‘나’를 추론한다. 그리고 그런 ‘나’가 지향하는 바는 신체가 지향하는 바와 분명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인으로서 신체로부터 독립적인 주체가 되는 경험이나 신체를 통제하는 경험 모두 뇌에서 만들어지는, 뇌에 종속되는 일임을 알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 뇌 안에 뇌로부터 독립적인 주체가 존재할 것이라는 굉장히 가능성이 낮은 일을 꿈꾸곤 한다. 이는 늘 그렇듯, 추론의 근거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 뇌 세포가 독립(주체) 감각이나 통제 감각 같은, 주체를 추론하는데 쓰일 만한 감각을 구현하기까지의 구체적인 과정이 굉장히 복잡하며 직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복잡한 기능은 주체만이 구현 가능한 것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기도 하다. 편견은 에너지 효율화를 위한 의사결정 보조 도구로서, 마주한 대상이 주는 초기 단서를 미리 만들어 놓은 분류 체계에 반영해 빠르게 대상을 분류하고 그에 맞는 대응을 이끌어내는데 활용된다. 그러한 편견 중 하나는 마주한 대상의 주체의 유무를 따라 그것이 구현 가능한 움직임의 정도를 제한한다. 즉 우리는 수용한 외부 정보를 되새김질하면서, 주체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대상은 사람과 같은 복잡한 행동이 가능하다고 분류하고 반대로 주체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대상은 무생물이나 단순한 생물 같은 단순한 행동만 가능하다고 분류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편견을 갖고 있기에 그 자체로는 주체가 없는, 단순한 세포가 ‘나’를 구성하는 다양한 경험을 만들거나 ‘나’가 하는 대단한 일을 구현한다는 사실을 쉽게 납득하지 못한다. 그래서 세포가 뭉쳐져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세포와 기능 사이에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 ‘나’, 의식 혹은 마음과 같은 주체를 그린다. 즉 세포는 복잡하게 조합됨으로써 주체를 만드는 기반이 되고 그 기반을 통해 구현된 주체가 고도의 기능을 실행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잘못된 설명은 하드웨어가 협업하며 소프트웨어가 구현될 기반이 되고, 소프트웨어가 복잡한 기능을 수행할 주체가 된다는 컴퓨터 기능 구현에 관한 잘못된 설명과 거의 그 형태가 유사하다. 이는 우리의 편견이 유사한 상황에서 유사한 형태로서 작용했다고 추측할 근거가 된다. 그래서 하드웨어의 복잡한 절차를 따르는 움직임이 우리가 마주한 고도의 기능의 실체이듯, ‘나’를 추론하게끔 하는 독립 감각이나 통제 감각 그리고 주체를 추론하게끔 하는 고도의 기능 역시 그 실체는 세포들의 복잡한 협업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협업은 당연히 그 구조, 더 근본적으로는 설계도를 따르기에, 결국 우리가 인지하는 지향 하는바 역시 존속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을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는 사람의 온갖 행동이 그 시작 지점에서는 분명 존속과 맞닿아 있다고 여길 것이다. 다만 여기서 설명을 끝내버리는 것은 아니고 가능한 한 그 행동이 구체적으로 존속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다루고 넘어갈 것이다. 어쨌든 이제는 과학적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것에 관한 합의가 어느 정도는 이뤄졌다고 생각한다. 드디어 우리가 삶의 지향점을 추종하게 되는 과정을 기존과는 다른 관점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기존의 우리는 인간의 삶에 답이 있고 우리가 그것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첫 장에서 다뤘듯, 감각 기관이 포착한 정보만을 다룰 수 있기에 부족한 정보로 잘못된 추론을 반복하는 인간은 미래를 완벽히 통제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즉 답에 도달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며 애초에 답이 있다는 추론부터가 틀렸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이와 같은 잘못된 답에 도달한 이유 중 하나는 인간과 그 능력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문제 원인을 해결하고자, 이번 장에서는 정보처리에 있어서 물리적 제한을 두고 인간을 바라보는 법, 즉 과학적인 인간관을 대략적으로 다뤘다.
그러나 여전히 다양한 경험이 사람의 한계를 부정하고 또 그 지향점 역시 너무나 먼 곳으로 설정하도록 하는 추론에 기여한다. 이번 장에서 다룬 대략적인 내용만으로는 그 다양한 경험을 통한 추론을 모두 반박할 수는 없다. 따라서 다음 장부터는 답이라는 삶의 지향점을 추론하기까지 영향을 주는 다양한 요소, 특히 그 과정에 관한 과학적이지 않은 가설에 해당하는 추상적인 개념을 반박해 볼 것이다. 즉 그 과정을 과학적인 가설로서 대체하고자 뇌와 행동에 관한 연구 결과를 소개할 것이다. 동시에 이를 통해 과학이 바라본 인간을 조금 더 구체화해 볼 것이다. 존속을 위한 활동으로 만들어진 몇몇 행동이나 경험은 어떻게 답이나 지향점에 관한 실마리처럼 경험되는 것일까? 다음 장부터는 이에 관해 다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