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로 먹는 게 쉽지 않다
<오늘의 bgm: Elvis Presley-Blue Christmas>
<오늘의 단어 '월루': 월급 루팡의 약자로 월급을 축내는 시간이라는 뜻>
연말이 달리 정해진 건 아니지만 내게는 캐롤이 사방에서 흘러나올 때, 그때가 바로 연말이다. 도심 어디를 다니든 전구를 휘감은 나무들이 보이고, 대형 쇼핑몰에는 어마무시한 크기의 트리가 존재감을 뽐내는 걸 보니 정말 연말이 와버린 듯하다. 아무도 몰랐겠지만 내게는 주에 2회 글을 올리자는 목표가 있었는데 현실의 삶이 녹록지가 않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순간마다 기분을 움켜쥐고 '꼭 이걸로 글을 써야지' 했지만 계속된 업무 러쉬 속에서 움켜쥔 글감은 이미 휘발되었다. 그렇다. 트리의 꽃말은 '바쁨'이다. 금빛 전구와 색색의 장식물은 정신없는 삶을 응원 중인 표식이다. 응원봉이든 네온사인이든 보통 응원 도구는 다 화려하기 마련이다. 대학생일 적,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라는 농담이나 했는데, 이제는 트리와 포인세티아를 보며 업무를 떠올리는 사회인이 되었다.
보통 사회인 앞에는 '어엿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지만, 내 삶과는 조금 괴리되는 단어이다. 굳이 수식어를 붙여야 한다면 '우당탕탕', '철부지', '아무것도 모르는', '개똥멍청이인', '고용 불안정에 시달리는' 정도의 단어들이 붙지 않을까 싶다. 언제나 가차 없는 자본주의라는 녀석은, 어엿하든 아니든, 계약직이든 정규직이든, 신입이든 경력이든, 프리랜서든 아니든 여하튼 모두에게 숨 막히는 업무를 나누어준다. 세상 어딘가에 불로소득이라는 게 존재할지도 모르나 아마 도시 괴담이거나 전설 속의 존재라고 생각한다. 너무 요원하여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혹시 당신께서 숨만 쉬어도 돈이 들어오는 분이시라면 저 방어회 사 먹게 1억만 주세요.)
가끔 아이들이 하굣길에 '다른 선생님들은 지금 일하던데 선생님은 왜 칼퇴하세요?'라고 물어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작은 주먹을 꼭 말아 쥐고 '이 자식 너 취직하고 나면 두고 보자' 하고 싶다. 대신 상냥한 나는 동태눈으로 웃으며 '오늘이라도 칼퇴 안 하면 죽고 싶을 것 같거든요.'라고 대답해준다. 애초에 저런 질문이 나오지 못하도록 정시 퇴근을 위한 플라잉 체어 시스템이 전국에 도입되어야 하지 않을까? 퇴근 시간이 되면 바로 의자가 하늘로 날아가는 거다. 아니, 취소하겠습니다. 아무래도 그런 시스템이 도입되면 한국에서는 서서 근무하라고 할 것 같다. 도대체 세상 어느 한국인이 나태 지옥에 간단 말인가? 주변을 돌아보면 전부 업무에 치여 살고 있는데. 아니면 그건가? 꿀보직? 나태 지옥에서 일하는 저승 공무원들은 한국인이 아무도 없어서 꿀 빨며 일하는 그런 상황일까? 그렇다면 부럽습니다. 저도 월루하고 싶어요. 죽어서 꿀보직 공무원이 되려면 또 얼마나 스펙을 쌓고 공부해야 하나요? 혹시 그것도 급수별로 시험 보나요? 아니면 자소서와 면접으로? 설마 거기도 경력직만 뽑아요?
아차! 정신 차려보니 의식의 흐름대로 인생을 한탄하는 중이다. 이런 글을 쓰려 한 건 아니었다. 누가 간만의 월루 시간에 팍팍하고 건조한 농담이나 치고 싶었겠냐만은, 막상 분노의 키보드질로 변모한 점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제가 너무 불평이 많았죠? 어찌 되었든 연말이다. 업무가 쌓여 있어도 바깥에서는 캐롤이 흘러나오고 회색 밤 사이사이 주홍 불빛이 스며있는 바로 그 나날이다. 한 해를 돌이킬 때 일궈 놓은 것은 0에 수렴하고 반성할 것은 무한대로 뻗어 나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미한 조명 아래 왁자지껄 떠들고 놀 수 있는 면죄의 기간이다. 그 작은 낭만에 취하려면 미리 일을 끝내 두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취향에 맞는 농담이나 따먹고, 술병도 따먹고, 안주도 잔뜩 축내는 그 시간을 위해서 어쩌면 한 해를 어영부영 지나쳐 왔을 거다. 금주 중인 나는 술병 대신 탄산수나 따야겠지만 아무렴 어떤가? 어영부영 살아있는 나를 위해 건배 정도는 외쳐줘야 내년의 내가 또 살아갈 수 있을 테다. 그러니까 조금 이르지만 11월의 마지막 날을 축하하며 건배사를 외치겠습니다. 당신과 나와 올해와 내년을 위하여! (그리고 언젠가 끝날 업무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