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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육공 Dec 05. 2022

다정함이 세상을 지탱하는 방법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오늘의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 원스(양자경의 멀티버스)>

감상문이라든지 평론이라든지 줄거리라든지 그런 거창할 거 없는 그냥 넋두리



<실망의 대물림>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부모라는 존재는 자식을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작은 자신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 봐야 스스로의 유전자로부터 기인한 존재인데 내 자식은 초능력자라도 되는 마냥 완벽하길 바란다. 말 같지도 않은 불합리 속에서 부모는 자식에게 실망하고, 자식도 그런 부모에게 실망하고 그렇게 공평한 실망이라면 차라리 좀 나을 텐데. 부모에게서 날아온 한 마디가 자식의 가슴에 도달할 때, 자식은 끊임없는 자기 파괴의 과정으로 들어간다. '넌 왜 그것밖에 못하니?'는 곧 '난 왜 이것밖에 못하지?'가 되고, '안 돼'는 곧 '못 해'가 되며, '그렇게 살지마'는 '나는 왜 살아야 하지?'로 바뀌는 그따위 것들. 기대를 충족하지 못한 죄책감, 거듭되는 포기에 의한 무력함, 학습된 패배감, 허상에 불과하지만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 그따위의 것들. 결국 스스로에 대한 실망은 전 우주에 흩날려 눈물의 은하를 이루게 된다.

  그런 자식이 부모가 되면, 무력한 과거의 자신을 떨쳐내려는 듯이, 또다시 자식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다시 그 자식의 실망은 은하를 이루고, 다시 부모가 되고, 다시 자식이 되고. 수많은 은하는 자식이었던 부모와, 부모가 될 자식들이 남긴 눈물 자욱일지도 모른다.



<Nothing matter>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이 하잘 데 없길. 그러면 내가 느낀 그 모든 무력과 슬픔과 좌절과 우울도 아무것도 아닐 뿐인 그냥 허무의 너머로 없어질 것이 되니까. 그런 기분을 느낀 적이 있다. 가끔이지만 지금도 그러하다. 그냥 이대로 죽어도 괜찮을 것만 같고, 내가 짊어진 모든 것들은 사실 나만 사라지면 될 문제인 듯하고, 내가 아니어도 어떻게든 돌아갈 거고, 아니 사실은 모두가 없어도 어차피 무엇 하나 변하지 않을 테니까, 어느 하나 중요치 않은 것들만 가득한 세상은 그냥 베이글 너머로 다 사라져 버려도 무방할 거다.

  그다지 멀지 않은 예전에 '다음 생엔 돌로 태어나고 싶어'라는 밈이 유행했다. 다들 돌이 되어버린 세상에서는 그 어떤 잡음조차 들리지 않을 테지. 영화 그대로 말하자면 'Nothing matter. Just be a rock. We're all small & stupid.'이다.



<Still need each other>

"난 당신을 죽이려고 찾아다닌 게 아니야, 나와 같은 것을 봐줄 사람을 찾은 거지"


  그렇게 하찮은 것이라면 혼자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겠냐만은, 사람들은 허무까지 함께 감상할 존재를 찾는다. 나와 너무 가까워 내게 수많은 상처를 남긴 존재일지라도 여전히 공유에 대한 욕구를 떨칠 수 없다. 대물림된 실망을 겪은 동지로서, 아니면 한 때는 인정받고 싶던 대상으로서, 그도 아니면 어쩔 수 없이 사랑했었던 사람으로서, 아니면 뭐라도 어쨌든 그런 거지. 그가 나와 같은 풍경을 바라봄으로써 애증 관계에 놓인 사람을 증오하지 않을 수 있도록. 아니면 내가 틀렸다는 걸 증명해주길 바라서. 이도 아니라면 고독을 못 이겨서.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사람은 서로가 되길 바란다. 나 또한 온전히 미워할 수 없다면 차라리 나와 같은 존재가 되어주길 바란다. 나와 같은 느낌을, 생각을 공유하길 바란다.



<Plz be kind!>

  어차피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다. 고작 베이글 위에 쌓인 수많은 허무가 아직도 무너지지 않고 여차저차 돌아가고 있는 것은 오롯하게 다정함 덕분이다. 다정이 세상을 지탱하는 방법은 초라해 보일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누군가의 다정함으로 지탱되어왔다. 누군가는 나의 다정함으로 허무한 몇 초를 더 견딜 수 있었을 거다. 그나마 합리적인 것이라고는 찰나의 시간뿐인 세상이라면 그 찰나를 소중히 여기는 게 얼마나 굉장한 일인지 증명할 길은 없다. 그냥 굉장하다고 믿을 뿐이다. 그러니 제발 다정히 굴어 보아요. 혼란함과 아픔 속에서 정신을 잃고 모든 마음들을 태워버리고 있을 때, 사람을 다시 피어나게 하는 건 결국 다정함이다. 돌이 되더라도 내게 다가와 주는 다정함,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상처받고 구르면서 함께 생을 영위하려는 노력, 기꺼이 서로의 기쁨과 슬픔을 공유하고자 하는 용기, 그런 것으로 오늘도 우리는 허무를 뒤로한 채 살아갈 수 있다.





p.s. 우스개지만 반항을 하려면 우주 스케일로 해야 엄마가 이해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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