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사이 잘 자다가 오른쪽 엄지발가락이 아파 깨어났다. 근 몇 년간 괜찮던 내성발톱이 살을 파고든다. 무시하기 힘들 정도라 면봉솜을 껴놓고 소독약을 잔뜩 뿌렸다. 욱신한 통증이 지속된다. 한 시간만 버티면 나아질 거다. 동생은 모기가 있다며 욕지기를 하고 일어났다. 사람의 잠을 방해하는 건 고작 엄지발톱이나 모기 같은 사소한 것들이다. 사소하지만 성가신 것들.
‘생각 없이 살고 싶은데 생각을 하게 만들어서 짜증 난다’라는 말을 들었다. 관계의 종언을 고할 정도로 짜증 났나 보다. 일평생 생각더미를 생산한 사람으로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생각이 물질이었다면 환경 파괴의 주범이었을 만큼 많은 생각들을 양산한다. 잠을 자다 이 새벽에 글을 쓰고 있으니 말 다했다. 거의 매일같이 성찰하여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게 목표였던 날도 있었다. 지금도 성찰만이 인간을 스스로 변화시킨다고 믿는다. 그런 내게 ’생각을 하게 만들어서 싫다‘라니. 그렇구나, 그런 삶도 있구나 싶다. 이해가 가지도 않고 무례하기 짝이 없었으나 대꾸하고 싶지 않다. 그 사람에겐 반성을 촉구하는 내 말이 폭력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제 말이 더 폭력임은 생각하지 못했나? 아니 애초에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내 직업인데? 나도 참 물을 걸 물어야지.
속에서 화가 들끓는 것이 물리적으로 느껴졌다. 욱신하고 부글거리고 요동치고 울렁였다. 이것만큼은 사소하지 않았다. 구역질이 치미는 와중에도 뇌는 자꾸 나를 꺼뜨린다. 그냥 잠에나 빠지라는 듯이. 분노를 마주하지 않으면 공황이 오거나 묻지마 폭행을 하게 될 수도 있단 말을 들었다. 걱정스럽다는 듯이 조언하는 상담 선생님을 떠올리며 화라도 내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누구에게 어떻게 화낸단 말인가? 화 내봐야 소용없는 사람들이 날 이리 만들었다. 차라리 이해하고 용서하여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다. 동생은 그게 언니의 방어기제라고 말한다. 이런 건 진짜 용서도 아니라고. 스트레스에 못 이겨 계속 잠을 자다간 풀리지 못한 감정이 무의식에서 더 큰 응어리로 남을 거라고. 일어나서 맛있는 걸 먹고 뭐라도 하라고 한다.
내면의 통증을 논하고 있자니 엄지발가락의 욱신거림이 하찮다. 지가 그래봤자 고작 발톱이지 뭐. 지금 안 사실인데, 윗집은 새벽 다섯 시 전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린다. 하루의 시작이 참 빠르기도 하다. 가북이 등딱지 쿠션에 누워 나도 등딱지가 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한다. 멀리 도망가지 않아도 감쪽같이 숨어버릴 수 있게, 나를 마냥 강한 사람으로만 보는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게.
이제와 용서를 빌고 있지만 성에 차지 않는다. 진짜 미안한 걸지도, 왜 벌써 저러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렇게 쉽게 후회할 거라면 왜 그리 굴었는지 가볍기 짝이 없다. 참을 수 없는 인간의 가벼움은 언제 봐도 잘 지은 제목이다. 깊은 상흔에 눈물이라도 났으면 싶다. 아니 근데 눈물도 안나. 내가 왜 울어야 하는데. 열받게. 어디 얼마나 용서를 구할 수 있는지 두고 보자. 가볍게 던진 말일수록 무겁게 오래도록 사과해야 할 것이다.
구구절절 적다 보니 마음에 울렁이는 감정도 사라진다. 그냥 그렇구나, 그럴 수도 있겠구나, 너라는 인간은 그런 사람이구나 한다. 폭력적으로 형성된 이해를 강제로 씹어 삼킨다. 뒷 맛이 구리다. 생각 없이 던진 생각에 개구리는 몰라도 내 자아가 맞아 죽는다. 개 같은 거. 타인을 강제로 수용하고 어떻게든 이해하고 용서한다. 이렇게 죽어간 자아가 몇이던가. 애도를 표한다.
이제 엄지발톱은 신경조차 쓰이지 않는다. 뭐라도 응어리를 토해냈다. 다시 잠이 온다. 어제 했어야 한 일들을 자고 일어나서 전부 해치워야 한다. 매일같이 내 생각을 하며 수줍게 마음을 건네는 유일한 사람은 지도교수님뿐이기에, 그 기대를 충족시키진 못해도 주신 과제는 다 해결해야겠다. 죽어버린 뇌를 팽팽 돌려봐야지. 쓰잘 데 없는 사색이 아니라 생산적인 일로 뇌를 깨우며 하루를 마무리해야겠다. 그게 내일, 아니 오늘의 목표이다.
자 이제 엄지 따위, 통증은 저 멀리서 약한 메아리처럼만 느껴지고! 잠이나 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