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 Editor. 깐풍
무언가에 익숙해지는 것은 신비로운 일이다. 처음 봐서 낯선 것일지라도 시간이 좀만 지나면 편안한 것으로 바뀌니 말이다. 우리의 감각은 그렇게 주위의 것들에 적응해왔다. 적응은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을 머릿속에 개념화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은 본능의 경계심을 잠재웠다. 그것은 다시 말해 우리가 익숙해진 대상에 대해서는 신경을 덜 쓰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익숙해진 감각은 항상 좋게만 작용하지 않는다. 지하철에 탄 상황을 가정해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거나 멍 때리며 시간을 보낼 것이다. 지하철이 지나는 역 이름을 확인하는 정도 외에는 다른 곳으로 눈길을 주는 일은 없다. 반대편에 앉은 사람들이 어떤 모습인지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모두 ‘지하철에 앉은 사람’이라는 개념으로 정의될 뿐, 아무런 감상도 주지 못한다.
일상에 익숙해진 우리의 감각일지라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면 그것은 평상시의 풍경의 일부로 인식되던 모습과 달리 선명한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이것의 예시로 내가 미술관에서 했던 체험을 들려주고 싶다. 원주에 있는 미술관 ‘뮤지엄 산’에 있는 ‘제임스 터렐’의 전시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제임스 터렐은 빛을 다루는 설치미술가로, 빛과 사람의 감각 간의 상호작용을 중요시한다. 그래서 터렐의 작품들을 보면 거대한 공간에 인조적인 빛을 비추어 감각에 혼란을 주어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공간을 체험하게끔 하는 경우가 많다. 뮤지엄 산에 있는 대부분의 작품들도 그러했으나 ‘Sky Space’라는 작품은 그보다 한발 더 나아간 느낌을 주었다.
이 작품을 본 날은 구름 한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 (지금은 방문객이 많아 작품 관람순서가 때때로 바뀌지만) 당시에는 Sky Space의 관람 순서가 터렐 전시관의 마지막에 위치해 있었다. Sky Space는 원형 공간에 벽에 따라 배치된 원형 벤치에 앉아 천장에 있는 원형의 빛을 보는 작품이다. 티 없이 파란 빛을 보고 있으면 컴퓨터 그래픽에서 볼 법한 단순 명료한 파란 원을 현실에서 보고 있다는 신비로운 감정이 든다. 하지만 이 작품 이전에 보았던 작품들보다 신비로운 체험을 주지도 않으며 드라마틱하지도 않다.
이 작품의 반전은 그 파란 원이 단순히 하늘을 향해 낸 창일뿐, 프로젝터로 쏘는 빛이 아니라는 점이다.
터렐은 하늘의 한 조각을 떼어내 자신의 작품으로 삼은 것이다.
한없이 비현실적이어 보이던 파란색이 일상에서 보던 하늘의 파란색이었다는 사실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이 선명하고 아름다운 색이 주위를 감싸고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에 나는 그것을 관찰할 생각도 못한 것이다. 그러나 터렐은 오로지 하늘의 색상 하나만으로도 인간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그 점을 놓치고 있다. 하늘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자연과 인간이 이루어낸 수많은 아름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익숙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것들을 관찰하거나 음미하지 않는다. 감동받을 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놓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주변환경에 익숙해지고 적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익숙해진 것을 핑계로 감각을 계속 잠재우는 것은 분명 아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