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명(Resonance)
태호와의 2분기 기숙사 생활이 끝났다. 잠을 줄여 가며 서로 밤마다 많은 이야기를 했다. 단순한 시사 이야기부터 시작해 각자의 꿈과 지향에 대해서도, 인생의 가치관에 있어서도. 고등학교 전체를 통틀어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은 그때였다.
태호는 내가 어린 시절 내가 바라던 모든 것들을 갖추고 있었다. 독서, 운동, 건강, 관점, 지식, 시사, 음악을 포함해 내 인생을 내가 꿈꿔왔지만 현실에 가로막혀 이루지 못했던 것들을 태호는 스스로 개척해 나가고 있었다. 태호는 이념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만의 관점으로 자신의 미래를 뒤도 없이 개척해 나가는 친구였다.
태호랑 접점을 가지며 내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많이 변화했음을 매순간 느꼈다. 지금 내게 있어 태호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당위를 제시해 주는 친구가 되었다. 내 안에 내재되었지만 보이지 않았던 잠재태를 실현태로 만들어줄 능력을 가지고, 먼저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호로부터 나의 어린 시절을 겹쳐 봤다.
태호로부터 나는 공명했다.
뜻이 있는 길에 길이 있을 지어니. 나는 이 격언을 망각한 채 고등학생 시절을 보냈다. 사회의 욕망이 나의 욕망을 덮어씌웠다. 그렇게 나는 공장에서 찍어낸 듯 규격화된 현대 사회의 소모품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 스스로가 소모품으로 전락당하고 있다는 걸 부정하기 위해서 그렇게나 많은 공장을 지어냈던가. 차갑게 식어버린 열정을 현실이란 이름으로 정당화하려 했던 그때의 글들은 변명에 불과했었다. 그래서 과거의 글들을 읽을 때마다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나 자신에 대한 폭력이었기에.
바라는 걸 충분히 할 수 있었음에도 스스로를 왜 절제해야만 했는가? 나는 사회와 제도의 폭력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었다. 인지하고 있었지만 맞서 싸울 용기가 부족했다. 어쩌면 사회는 내가 그들과 맞서 싸울 용기조차 박탈시켜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내 모습을 바라보니 새장 속의 새와 다를 바가 없었다. 현재에 충실한 채 나는 법을 잃어버린 새와 다른 점이 없었다.
처음에는 환상과 동시에 경계감이 들었다. 새장 속에 갇힌 나는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태호라는 이름의 새를 보며 부러움과 환상의 감정이 섞여 올라왔다. 하지만 꿈과 함께 폭풍우를 운반하는 고등학교 생활 속 태호가 더욱 자유롭게 날기를 바랐지만 결국 번개에 맞아 뜨겁게 구워진 통구이 새가 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새는 결국 자신의 목표에 도착했다.
먼저 폭풍우 속으로 뛰어들어가 자신만의 목표에 도달한 태호를 보고 내게도 용기와 간절함이 생겼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인생을 바치는 사람들이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다. 설령 이뤄내지 못할지언정 그들의 도전은 값으로 매기지 못할 정도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내게 결과론적 사고 방식에서 과정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것으로 가치관이 전환되는 계기였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마치 수집하듯 모아서 내 주변에 둔다. 내게 그러한 잠재태가 있었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기 위해서.
억울했다. 꿈을 왜 포기해야만 해? 포기할 정도의 꿈은 내가 정말 바라는 게 아니었던 걸까 의심이 들기도 했다. 그치만 결국 그 꿈을 좇기만 하면 시기에 상관없이 나는 나의 길을 걷는 셈 아닐까. 그래서 좀 더 실존적으로 살기로 했다. 좀 더 실증적으로 살기로 했다. 경험과 판단에 근거해서 함부로 세상을 제단하지 않기로 했다. 내 인생을 타인이 제단하기엔 내 인생이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타인에게 나의 인생에 대한 변명과 정당화 따위를 하지 않는다.
태호랑 지난 2년 그리고 최근의 3개월은 내게 잠재되어 있던 열망을 스스로 되짚어 보고 발현시킬 초석을 마련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비관적인 인생을 낙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됐고 나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한 번 더 확인하는 화법을 가질 수 있었다. 취미와 인생을 바라보는 태도가 비슷한 친구와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 태호에게 내가 이런 글을 써줄 수 있는 친구라는 것이 영광이었다.
이젠 스스로 새장을 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