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간 해를 뒤로 하고, 그렇다고 마냥 어둡지만은 않은 저녁의 어스름을 걷는다. 언제까지나 푸를 무성한 나뭇잎의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고즈넉한 불빛에 비친, 하늘을 담은 우산을 조금 기울여 쓴다. 기울이지 않았다면 맞지 않을 빗방울을 맞으며 걷는다. 슬리퍼 안 양말이 물웅덩이를 밟고 흠뻑 젖어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무채색 같은 하늘색 우산 위로 무심하게도 떨어지는 빗방울이 내는 소리는 왼쪽에서, 과거는 기억의 바다.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는 방울진 피아노 반주는 오른쪽에서 듣는다.
길을 걷는다. 언제까지나 푸르를 나무들 사이에 나의 기억이 있다.
견디기 힘든 상처를 남기고 간 누군가를 옆에 둔 벤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친구들과 나누었던, 자정이 넘도록 그치지 않았던 인생의 대화가 조약돌이 되어 둘레길에 무심코 흩뿌려져 있다.
빨간 불에도 개의치 않고 건넌다. 두 발자국 건너자 초록 불로 바뀐다. 편의점에서 신라면 두 봉지를 사고 나오면 다시 빨간 불이다. 저 멀리서 아까 바라본 벤치와 길목을 아무 생각 없이 쳐다본다. 언제는 모범 시민이었던 것마냥 초록불에 건너서 다시 두 곳을 바라본다. 어둡다. 아무도 없이, 나를 마중 나와 주는 건 여전히 하늘 우산에 부딪히는 빗방울뿐.
기분이 상해서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나무 몇 그루를 보고는 생각한다. 나도 나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억지로 쥐어짜낸다. 짜낸 생각을 도로 바닥에 버려 버리곤 아무 의미 없이 다시 나무들을 바라본다.
어느새 너무 어두워졌다. 집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