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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로부터의 엑조더스

by 울림

내 삶은 끝없는 학원과 숙제 그리고 공부의 연속이었다. 세 달마다 두 번씩 찾아오는 거대한 시험에서 스스로 나를 증명해야만 했다. 내가 속한 반의 위치가 나의 행복이 되었고, 나보다 낮은 반에 있는 학생을 깔보며 나보다 높은 반에 있는 학생들을 우러러 보는 그러한 삶을 보냈다. 거대한 대로변을 중심으로 학원 건물들이 평행하게 놓여져 밤 10시가 되면 붐비는 불빛들은 나에게 여김없는 풍경이었다.


왜 나는 그리도 목표지향적으로 살아야만 했을까.


주위의 기대와 시선 때문이었을 것이다. 명시적으로 스트레스를 주는 요인이 아니지만, 주변의 기대는 더욱 처절하게 개인의 자유를 착취한다. 주기적으로 그들이 정한 바로미터에 스스로를 일치시켜야 하고, 과정은 쉼없이 반복된다. 기대는 무언의 협박과도 같고, 협박의 주체는 가족도, 친지도, 나아가 나를 둘러싼 모든 사회가 된다.


의문이 들었다.


사실 사춘기가 찾아왔을 때 한 번 의구심을 가진 적이 있다. 학원에서 더 높은 반으로 level up 을 하면 그날 저녁은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었고, 그 다음 주까지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주눅 들지 않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거리가 생겼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기분 좋은 한 주가 지나면 일상은 큰 틀에서 똑같이 흘러만 갔다. 타인을 밟아 성장한다고 생각했다. 타인을 밟아야만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볼 수 있는 모든 인생의 가치는 당장의 성취뿐이었다. 그것이 어느새 나의 인생이 되었다. 어느 순간 나는 오직 그것만 바라보고 있었고, 좋은 시험 성적을 얻지 못했다면 나의 인생이, 적어도 3개월이, 송두리째 부정당한다는 두려움. 그것이 원동력이 되었지만 그리 건강하지는 않았다.


외부와 내부의 의도를 동시에 쥐고 달리며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에도 그렇게 지내 왔다. 주위의 기대 속에서 나의 진로는 메디컬로 바뀌고야 말았고 주위의 시선 속에서 나는 높은 내신으로 그들의 기준을 충족해야만 했다. 그러나 밟아온 과정은 이전과 다를 바 없었음에도 나는 왠지 모를 어색함이 내게 조금씩 물들었다. 균열은 순식간에 나 자신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타인에 대한 혐오로 되돌아왔다.


처절하게 공부해도 바뀌는 건 그닥 없었다. 처절하게 공부해서 미뤄둔 행복이 찾아오는 일 따위는 없었다.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나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할 것인가, 혹은 변화할 것인가, 두 가지뿐이었다.


역지사지라 할까나. 나보다 훨씬 심한 성취의 이념을 갈구하는 내가 머문 공간을, 달려오고자 했던 목표들을 바라보며 나는 내가 사춘기 때 잠깐 꺼냈지만 당장의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감추어뒀던 생각을 들추어 보았다.


‘이렇게 사는 게 내게 의미가 있을까?’


이 모든 건 타인들이 나에게 향하는 시샘 어린 기대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나는 주변과의 소통을 스스로 단절시켰다. 더욱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내면의 울림을 듣기 위해 나는 숨죽여 나를 바라봤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내가 지향하던 미래의 모습으로 표상되던 나의 내면은 타인들의 기대라는 칼에 의해 상처 가득히 조각나 있었다.


최근에 와서야 깨달았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알 수가 없었다. 사회의 이념에 덮씌어진 나 자신을 진정히 마주치기는 정말 어려웠고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무비판적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자들에 대한 혐오의 시선을 보내면서 정작 나조차 그들과 같은 길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 너무 부끄러웠다.


나는 이제 나의 주변이 완전히 잘못되었음을 안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를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내면이 깊은 친구들은 나를 알아서 appreciate 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나의 주변은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로 얼추 채워뒀고, 앞으로도 그리 채워 나가려 한다.
내가 지금 하는 모든 행위는 발악에 불과할 테니까. 그치만 지금 하는 발악이 나중에 거대한 태풍이 되어 돌아와 나의 운명을 바꿀 것임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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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발악은 새장 속에 갇힌 새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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