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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광현 Aug 07.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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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틸 라이프 still life

작고 못생긴 한 남자가 있습니다. 메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런던 캐닝턴 지역에 생긴 무연고 사망자를 담당하는 공무원이죠. 메이는 안 그래도 작은 체구에 목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움츠리고 다녀서 존재감이 드러나질 않습니다. 그의 삶은 자신의 직업과 묘하게 닮아 있습니다. 혼자 쓰는 사무실은 그의 몸집처럼 작고 사는 집은 매일 아침 빗어 넘긴 짧은 머리만큼이나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사람이 오래 머문 곳의 특징인 세간살이의 소란스러움이 보이질 않고 마치 언제든 떠날 사람처럼 단출하게 살며 식사는 늘 생선 통조림 하나, 토스트 한 조각 그리고 작은 과일 한 개입니다. 이는 우베르토 파솔리니 감독의 영화 스틸 라이프 still life에 대한 묘사입니다. 정물화를 뜻하는 이 영화의 제목은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의 주제를 관통하는데 단순히 영상미에 주목한다면 화면의 모든 미장센들은 잘 배치된 정물화처럼만 보입니다. 에드워드 호퍼 특유의 고독함이 연상되기도 하는 이 영화는 주인공 역시 그 안에 배치된 정물처럼 정적이며 튀지 않는 연기를 하는데 이 영화는 단순히 갤러리의 정물화를 감상하듯 보는 영화인 걸까요?


에드워드 호퍼 - 밤을 새우는 사람들 (1942 oil on canvas)




정물화의 기원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이 맞겠으나 현대인들이 흔히 떠올리는 정물화는 17세기에 발달된 사실주의 기법의 정물화를 말합니다. 정물화는 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창출했던 네덜란드에서 특히 발전했으며,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다양한 사치품을 정교하게 그린 프롱크 정물화와 인생의 무상함(사치의 끝자락에 있는 예술품으로)을 설파하는 바니타스 정물화가 대표적인 양식입니다. 중요한 공통점은 각각의 정물들에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꽃은 화려하고 비싸기에 중산층의 부를 자랑하는 수단이기도 하나 영원하지 않다는 뜻을 갖고 있으며 해골은 종교적인 의미를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것들은 결국 끝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모두가 떠올릴 수 있는 삶의 이치를 정물화가 담고 있었다는 얘기죠. 좀 더 나아가 우리말로 표현한 정물화라는 단어보다 원어의 뜻에 주목을 하면 영화의 제목이 주는 그 의미가 보다 가까워집니다. still 고요한, 정지한 - life 삶, 생물 결국 스틸 라이프라는 말을 해석해보면 활기 없는 정체된 삶을 의미합니다. 마치 주인공 존 메이를 묘사한 것처럼 말이죠.


우리처럼 1인 가구가 늘어나는 일은 영국도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아니 글을 쓰며 생각해보니 당연히 영국이 더 먼저였을텐데 순서가 잘못됐습니다. 산업이 고도로 발전하고 국가의 부가 늘어나면서 대도시로 모인 사람들이 느끼는 인간소외현상은 산업혁명이 일어난 영국이 먼저 겪었다는 게 당연한 일이겠죠. 사람들이 모이기에 런던 같은 대도시는 살인적인 거주비와 물가를 감당해야 하는 곳입니다. 좁은 공간에서 서로의 얼굴도 모른 채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 하루를 버텨나가지만 역시나 다양한 이유로 삶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고독사라는 말이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기에 표현을 달리해야 한다라는 주장을 신문지상에서 보았지만 대체할 말이 마땅하지 않아 슬픈 용어입니다. 이웃이 죽어도 몇 주가 지난 후에 발견이 되며 장례식에 조차 찾아올 사람이 없는 고독사 즉, 무연고 사망자들을 존 메이는 마지막까지 함께합니다. 그들의 종교를 찾아내어 종교에 맞는 장례를 치러주며 추모사를 직접 적고 식에 맞는 음악을 신중히 고르며 그들의 마지막을 기억할 수 있도록 밤마다 그들의 사진을 사진첩에 모아둡니다. 하지만 직장상사는 자신의 업무를 사랑하는 메이를 실적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갑작스러운 해고 통지를 합니다. 그만두기 전 자신의 마지막 사건(case)을 마무리(closed)하려는 책임감이 강했던 그에게 예상하지 못했던 짧고도 긴 여정이 다가옵니다.


영화는 대사가 의도적으로 절제되어 보입니다. 대사에 집중하기보다 인물의 표정과 배경에 많은 시선이 가도록 연출되어 있습니다. 화면에 주목하면 영국 날씨 특유의 어두운 색감과 건물들이 주는 모던하며 차가운 느낌이 마치 영상으로 회화작품을 감상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앞서 설명드린 대로 정물화에 나오는 각각의 정물에는 그 의미가 있습니다. 그 관점으로 바라보면 세상에서 소외됐을지라도 정물화의 정물처럼 삶에는 저마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주인공 존 메이는 안타깝게도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 채 외로이 삶을 마무리하게 된 사람들의 마지막을 의미의 존재로 떠날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마치 흐트러진 정물들의 위치를 바로잡아 화면에서 구도를 이룰 수 있도록 하는 화가처럼 말이죠. 이미지가 전달하는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인가 이미지는 잊히고 영화의 숨겨진 의미를 찾게 됩니다.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조용했던 장면들의 의미를 알 수 있도록 천천히 길을 터줍니다.


이타적인 삶을 살던 존 메이는 마지막 사건을 통해 자신을 찾게 됩니다. 잃어버렸던 것을 찾은 사람의 모습이 아닌 새롭게 태어난 듯한 모습으로 말이죠. 정물화 still-life에서 자화상 self-portrait으로, 정체되어 있던 삶에서 능동적인 삶으로 그의 인생 주제가 바뀌게 됩니다. 영화의 결말에 대한 느낌을 공유하고 싶지만 역시나 관람자의 몫은 남겨두는 게 맞겠습니다.


여운이 짧지 않은 영화입니다. 특히나 마지막 장면에 모두가 아쉬움을 느낄 수 있겠지만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정체되어 고독한 사람들을 위한 스틸 라이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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