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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광현 Aug 14. 2023

당신도 내가 역겨운가요?

넷플릭스 영화 - 더 웨일 the whale

평단의 호평을 받은 영화들은 쏟아지는 기사 때문인지 평소 영화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제목 정도는 알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이 꼭 흥행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죠.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때도 많습니다.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들은 대중들이 원하는 재미와는 거리감이 있을 것이란 선입견 때문일까요, 오락이 아닌 예술의 이미지가 덧씌워지면 사람들은 피곤해합니다. 역시나 문제는 이놈의 예술입니다.


최근 브랜튼 프레이저 주연의 더 웨일 the whale 이 넷플릭스에 업로드되었습니다. 해외에선 소위 말하는 대박을 쳐 제작비의 10배가 넘는 수익을 얻었다는 기사가 무색하게, 국내 관객동원은 6만 명이 채 안 되는 수로 쓸쓸하게 스크린에서 내려왔습니다. 2000년대 초반 '미이라'와 '일곱 가지 유혹' 등 코믹연기로 주가를 올리던 브랜든 프레이저가 한동안 할리우드를 떠난 사이 국내 관객들에겐 잊힌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소식이 뜸했던 그가 복귀 후 놀라운 연기로 아카데미의 남우주연상, 분장상, 미국배우 조합상 등을 휩쓸었다는 기사에 관심이 안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도 들더군요.


'.... 그나저나 이 코믹 액션배우가 그리 뛰어난 연기력을 갖춘 배우였던가?'





이 영화가 잘 만들어진 걸작이라는 사실은 시작부터 알 수 있습니다. 단 몇 분 동안 주인공이 어떤 사람이며 무슨 상황에 처해있는지 한눈에 들어옵니다. 흘러내릴 듯 거대한 찰흙 같은 몸을 소파 위에 가까스로 걸쳐놓은 주인공 찰리(브랜든 프레이저)는 숨 쉬는 것조차 위태로워 보입니다. 그는 혼자의 힘으론 일어나기도 힘든 초고도 비만환자죠. 우연히 포교를 위해 찰리의 집을 방문한 새 생명 교회의 선교사 토마스는 찰리가 심장에 문제가 생겨 위급한 상황임을 감지하게 됩니다. 하지만 구급차를 부를 위태로운 순간에 토마스는 찰리의 이해할 수 없는 부탁을 받게 됩니다. 숨이 넘어갈 듯한 위급한 상황에서도 프린트로 인쇄된 소설 모비딕의 서평을 자꾸 읽어달라 부탁하죠.


영문을 알 수 없던 토마스는 어쩔 수 없이 서평을 읽어주지만 동시에 공교롭게 그의 호흡은 안정을 찾아갑니다. 그것이 그의 증세를 호전시킨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찰리의 요양보호사이자 유일한 친구 리즈를 부른 후 사태는 일단락됩니다. 하지만 이  짧은 방문으로도 선교사 토마스는 찰리가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며 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짧은 몇 분 동안 이 영화는 한 개인이 처한 처참한 상황을 숨김없이 보여주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영화 속 모든 장면은 찰리의 집 안에서 벌어집니다. 거동조차 불편한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찰리이기에 집 안에서만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죽음을 앞둔 일주일 동안 날짜별로 기록이 되는 찰리의 마지막 모습은 집 밖을 나설 수 없는 그를 방문하는 사람들과의 이야기로 진행이 됩니다만, 이 장치는 영화를 감상하는 내내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왜 그는 집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요?


영화 더 웨일(the whale)은 죽음을 앞둔 한 남자가 세상을 떠나기 전 지난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려는 진부한 스토리의 영화처럼 보입니다. 특히 자신의 외도로 인해 9년 전 떠나온 딸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 하는 메인 스토리는 우리의 눈을 가립니다만 사실 이 영화는 차별과 혐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기에 말하기 불편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감독은 비만(외모), 은둔형 외톨이, 종교, 입양, 동성애, 마약, 이혼 등 방안의 코끼리 같은 터부들을 찰리의 좁은 집안에 가두고 서로가 충돌하게 만듭니다. 물과 나트륨의 접촉처럼 폭발적인 화학반응이 일어날 법도 하지만 신기하게도 찰리는 고래가 플랑크톤을 집어삼키듯 이 모든 문제를 삼켜버립니다. 그리곤 커다란 몸으로 유영하듯 자신의 상황에 대해 관조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마치 자신에게 쏟아지는 혐오는 당연하다는 듯 말입니다.


위급한 상황에도 치료는커녕 아무것도 필요해 보이지 않는 그에겐 오직 딸 앨리만이 주된 관심사입니다. 오랜만에 만난 딸에게 거액의 유산을 약속하며 졸업을 위해 글쓰기를 도와주겠다 제안하지만, 이미 망가져버린 관계의 회복은 불가능한 미션처럼 보입니다. 자신을 버린 이유가 혐오스러웠고 기껏 다시 만났지만 변해버린 아빠의 모습도 혐오스러웠으며, 자신을 설득하려던 이유조차 혐오스러웠던 앨리는 원한을 품으면 사람이 어디까지 모질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려 애를 쓰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브랜든 프레이저의 빼어난 연기에 관객의 마음은 저립니다.



찰리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렇게 변하게 된 걸까요. 사실 그는 상실감과 고통을 견디지 못해 폭식으로 마음의 커다란 구멍을 메웠습니다. 상실감은 허기와 맞닿아 있던가요, 그는 자신의 모습이 초라해지고 혐오스러울 때마다 스스로에게 벌을 주듯 음식을 먹어치웠습니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그의 폭식은 꽤나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만 큰 의미가 있습니다. 찰리의 그 엄청난 폭식은 지옥 속 아귀의 모습처럼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고통 그 자체를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에선 몇 안 되는 인물들이 서로의 욕망을 찰리에게 투영합니다. 선교사, 찰리의 친구, 전처, 딸, 그리고 온라인 수강생들과 찰리 그 자신. 모두가 자신위해 찰리의 구원을 입에 담을 때 그는 구원을 부정합니다

그 고집스러운 부정의 이유를 영화 속 인물들만 모를 뿐 관람하는 우리는 어쩐지 너무나 잘 알 것 같아 슬픔이라는 감정선은 마지막까지 끊어지지 않은 채 이어집니다.



더 웨일은 요즘처럼 혐오와 증오에 관련된 뉴스로 혼란한 시기에 마땅히 주목받아야 할 영화입니다. 그 안에 보이는 많은 편견과 차별적 요인들은 우리에게 집요할 정도로 판단을 요구하지만, 우리는 과연 이 문제에 대해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지 대답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고래는 바다에서 사는 포유류로서 높은 지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포유류 특유의 모성애로도 유명한데 찰리의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제목이 갖고 있는 함의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도 찰리의 집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중간중간 들리는 고래의 울음 같은 소리의 진동은 우릴 심해로 끌어내립니다. 그리고 때로는 숨이 막히기도 합니다. 


제가 글의 초반에 던졌던 질문에 대한 답은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이르러서야 알 수 있습니다. 집을 벗어날 수 없는 현실만큼이나 자신의 과거에서도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던 찰리의 눈물겨운 연기는 이 영화의 많은 것들을 설명합니다. 특히나 배우 브랜든 프레이저의 삶과 더 웨일의 연기가 묘하게도 오버랩되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는 것은 그의 뛰어난 연기에 대한 방증일 테니 평단의 극찬은 마땅했다고 보입니다. 하지만 염려처럼 무겁기만 한 예술영화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드라마 자체에 집중했기에 관객은 편하게 몰입할 수 있습니다.


온라인으로 글쓰기를 가르치는 그는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글에 솔직하라 강조하지만 사실 이는 스스로를 기만하는 일이었습니다. 과연 찰리는 삶의 끝자락에서 자신의 가르침만큼이나 스스로에게 솔직할 수 있었을까요? 또한 죽음의 문턱에서도 읽고 싶어 했던 모비딕의 서평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영화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랜만에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은 영화, 더 웨일 the whale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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