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안부
한동안 달리는 일에 열중했다. 밤에는 트랙을 달리고, 아침에는 헬스장 트레드밀 위에서 뛰었다. 추운 날을 대비하여 사뒀던 통풍 잘 되는 보온 재킷에 만족하고, 비슷한 시기 구매했던 새로운 러닝화 성능에 놀라는 요즘이다. 평소 어떤 일을 시작하려면 예열 시간이 필요한 편인데, 이번에는 애먼 육체만 예열하며 두 계절을 보내고 있다. 러닝은 할 일을 미루게 할 정도로 중독적이다.
기타의 매력은 또 어떠한가. 지지부진했던 실력 향상에 실망감이 들던 때, 새롭게 배운 곡 하나에 연주하는 재미가 되살아났다. 에릭 클랩튼의 <tears in heaven>. 악보를 보며 느릿하게 연주해 본다. 끊기고, 가끔 소리는 엇나가도 대가의 곡을 연주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쁨이 차오른다. 가사를 음미하며 줄을 튕기면 그의 슬픔이 사운드 홀을 울리며 기타를 안은 가슴으로 전해진다. 이 진동은 흐느낌과도 같다.
쑥스럽지만 노래하는 것을 좋아한다. 실력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어쩌다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잡아도 가사가 와닿는 곡을 불렀을 때 주변 반응이 더 좋았다. 그런데 연주도 그렇다는 사실을 선뜻 연결 짓지 못했다. 붓이든, 악기든 본질은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일 뿐인데 말이다.
새로운 글을 준비하며 브런치가 멀어졌다. 할 일이 쌓였기에 이웃 작가들의 글을 살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물론 새 책 출간 후 간간이 이어지는 축하와 홍보 때문에 가끔 들여다보긴 했으나 집중할 수 없었다. 들려주시는 분들께 죄송한 일이다.
얼마 전 교직 초창기에 가르쳤던 제자의 메일을 받았다. 책 속 짤막하게 안내된 브런치 주소를 보곤 여기까지 찾아와서 메일을 보낸 것이다. 기억 속 호기심 많던 여고생은 어느새 대학을 졸업하고, 유치원 교사가 되고, 결혼을 했고, 아이를 키우고 있다 말했다. 스승보다 나은 제자의 반가운 메일에 문득 부끄러움이 들었다.
<이 아이는 내 이야기를 다 읽었겠구나....>
편지의 끝에는 오랜만에 재밌고 공감되는 책을 읽었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이미 나라는 대답은 책에 있으니 할 말을 다 해버린 나는 답장을 미뤘다. 십몇 년 전 가르친 제자에게 스승의 내밀한 이야기가 얼마나 거리감을 좁혀줬을지는 알 수 없으나, 책에 드러낸 내 속내는 내가 짐작할 수 없는 모습으로 나를 비췄을 것이 분명했다.
모니터 앞에 앉아, 텅 빈 브런치 화면을 보며, 출간 전의 마음을 다시 꺼내 보았다. 내 이야기에는 진심이 담겨있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장점 많은 글이지만, 잘 판매할 자신이 없다는 출판사들의 거절은 오히려 나를 더 고집스럽게 만들었다. 나는 책을 내야만 했다. 왜 내놓기 부끄럽다면서도 굳이 책을 내려고 했던가.
이 모순적인 상황은 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인정에 대한 욕구 역시 컸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스스로 자랑스러울 수 없었다. 노력 끝에 얻은 문화재단의 인정도 잠시 스쳐 가는 기쁨이었을 뿐, 부담스러운 과제 하나만 더해진 기분이었다.
앞으로 쓸 글에 무엇이 담겨야 할지를 생각한다. 내 좁은 시야와 구불구불한 감정을 어떻게 이겨내고 나아갈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중이다. 아마도 다시 영화에 대한 잡담을 시작하고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을 말하겠지만, 너무 늦지 않게 새로운 책을 선보일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그때는 뿌연 내 고민이 어느 정도 걷힌 모습이길 소망한다.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이 계획이 즐거움으로 함께하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