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돈의 가치

by 고병철

IT회사 7년, 병특이어서 더 지겨운데, IMF 이후의 벤처붐, 그때는 도전이 필수 같았다. 새로운 직업을 고민 고민하며 찾았지만, 벤처투자는 생소하고 어려웠다.


지금에서야 돌아보니, 한 번에 100여 명을 신규로 뽑았던 그해가 거품의 결정 기였고, 이후 수년간 하락장이었다. 차변, 대변, 보통결의, 상증법 등등 암호 같은 변수들. 네트워크는 어디서 만들어야 하는지, 다른 심사역들은 저런 회사를 어디서 물고 오는지. 참 어려운 숙제로 가득한데, 그중에서도 제일 힘든 것이 “돈의 가치”였다.


투자했다 하면 수십 억이다. 그냥 “몇 개 투자했다”이다. 그런데, 저 정도 돈이면 어느 정도의 위력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어떤 물건을 파는 건지 알아야 장사를 하는데 말이다. 콩나물 10원 깎는 아줌마가, 수백만 원 명품 앞에는 아무 생각이 없다고,, 주로 사용하는 단위를 벗어나니 캄캄했다.


“에라 모르겠다”하며 지르지도 못하는 소심함. 투자 한 건, 한 건이 어려웠다. 누구누구는 강남 아파트 수십 채 목돈도 턱턱 투자했다. 하지만, 모두 성공하진 못했다. 더군다나 베어마켓에서는.


거액을 투자받았던 컨설팅 벤처 사장님의 쓸쓸한 뒷모습이 기억난다. 꿈에도 한번 나타났다. 내가 맡기 3년 전, 투자 자체가 경쟁이던 시절, 선배인 심사역이 어서 더 받으라 했고, 사장님은 더 준다니 일단 덥석 받았다. 투자를 많이 받았으니 많이 벌어 보답해야 한다는 착한 책임감으로, 그러려면 과감히 선투자를 해야 한다고, 고급지게 강의실을 확장하고, 고임금 컨설턴트를 넉넉하게 채용했다. 하지만, 경기가 얼어붙으니 모두 긴축 긴축, 프로젝트는 없고, 마진은 쪼이기만 했다.


그렇게 투자받은 50억은 흔적도 없고, 뒤늦게 씀씀이를 줄여도, 은행빚은 쌓여갔다. 고급인력들은 떠나고, 좁히고 좁힌 사무실에 사장님만 덩그러니 남았다. "투자를 받지 말았어야 하는데, 적당히 받았어야 하는데.." 사장님은 후회했고, 투자사는 당분간 무조건 버티라고 했다. 하지만 회사도, 사장님도 버티지 못했다.


투자를 받기 전에 먼저, 진정 그 돈이 그렇게나 필요한지 다시 생각하고,

투자를 받기 전에 먼저, 좀 더 시장 밑바닥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누가 핵심 고객인지, 누구를 뽑아야 하는지, 무얼 해야 하는지를 알았어야 했다.


돈으로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사업에서는, 돈이 남아나지 않는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가치를 정확히 모른다면, 관리되지 않는다면, 신기하게도 모두 사라진다.


투자하는 쪽은 투자금이 선심 쓰듯 투자할 공돈이 아니고,

투자받는 쪽은 투자금이 대가 없는 눈먼 돈이 아니란 걸 알아야 한다.


돌이켜보면, 어리바리 그 시절에 투자를 별로 못했기에, 지금까지 이 일을 하고 있다. 공격적으로, 지금 보면 무모하게, 하란다고 투자했던 많은 동료들이, 자의반 타의반 업계를 떠났다. 업체가 어려워지면 지켜보는 담당자도 괴롭다. (사실 떠난 사람보다 남은 사람이 더 힘들다. 부실을 다 감내하고 치워야 한다.)


우리나라의 벤처투자 재원은 아직까지 연금, 공제회 등 우리 이웃에게서 비롯한 자금이다. 제도적 장치가 있으나 없으나, 내 이웃의 자금을 운용한다는 책임감이 필요하다. 심사역은 알토란 같은 자금들을 운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선량한 관리자"로서 투자하고 관리하는 과정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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