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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병철 Sep 19. 2022

190. 의미 없는 양해의 말씀

2022.09.19

겸임교수가 됐다. 요즘 대학 신분증, 학생증이 은행 체크카드와 콜라보되어 있다. 온라인으로 신청하고, 은행에서 만든 체크카드로 등록한다. 


은행에 갔다. 대기표에 따라 창구에 앉았다. 태블릿에 서류가 쭉 나왔다. 체크하고 서명하고.. 중간에 직원이 전화를 받았다. 순간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오려고 했다.


언제인지 모르겠다. 전화 응대한다고 바로 앞에 있는 내 일은  뒤로 밀쳐뒀던 기억이 생생해졌다. 하염없이 기다린 느낌이 끝나고, "어디까지 했죠" 했다. 급한 전화였다고, 미안하다는 말은 스쳐가는 표정에서 애써 읽어야 했다. 그는 자기 일을 열심히 했고, 나는 무시당했다. 내가 들은 내용으론 나도 그만큼은 급한 건 데. 


오죽 급하면 오지 못하고 전화로 했을까 하는 공감을 강요받은 느낌. 아니면 전화 권력의 잔재. 발 품 없이 전화 한 통으로 해결할 지체 높으신 분의 일이라는 무의식. 뭐든 동의는 안되고 마음은 상했다. 


원칙이 하나 생겼다. 선입선출. 나는 먼저 정한 것을 먼저 지키자.


그 기억이 재현되나 싶은 그때, 직원이 몇 마디로 하고, 창구에 손님 있으니 나중에 전화드리겠다 하고 수화기를 내렸다. 전화 고객에 나름 대응하고, 창구 고객인 나도 무시하지 않은.. 기분이 다시 돌아왔다.


오늘 젊은 창업자가 연락이 왔다. 만나 뵙고 싶다고. 몇 번의 문자로 며칠 뒤 네시에 보기로 했다. 한 오분 인가 지났을 즈음.. 두시에 일정이 있고 늦을 것 같으면 미리 연락 주겠다고 문자가 왔다.


기분이 애매하다.


아예 처음부터 적당히 뒷 시간을 잡지.. 그럴 수 있다고 지금부터 말했으니 그런 상황이면 내가 이해해야 한다고 미리 날리는 선빵?


고백하자면 나도 그렇게 말한 적 있다. 그때 그 회장님한테 단호한 말씀을 들었다. 정신이 들었다. 알았습니다 하고 제시간에 뵈었다. 


누구나 사정은 생길 수 있다. 그럴 가능성을 언급했다고 권리가 생기는 건 아니다. 일이 생기지 않게 애를 쓰는 게 우선이다. 그래도 불가피하다면 그때 양해를 구하는 게 순서다. 불이익도 검수하고. 


내가 이제 다른 입장에서 속으로 말했다. 여보시게, 그렇다고 내 뒷 약속을 조정할 수는 없네. 자네 약속은 난 지킬 걸세. 늦어도 기다릴 걸세. 난 다음 약속도 지킬 거야. 자네와 나눌 시간이 줄겠지. 그건 당신이 감내할 몫이야. 그리고 내가 흔들릴 만한 내용이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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