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던 자리

2026.01.31

by 고병철

행사 참석을 위해 경주에 갔다.


이십 년 전 아이들과 함께 왔던 보문단지.

자전거 뒤에 둘째를 태우고 호수를 한 바퀴 돌았던 기억.

그때 묵었던, 조금 낡은 콘도도 떠올랐다.


어제 행사장 호텔은 좋았다.

온돌과 침대가 결합된 객실, 탁 트인 호수 전망.

나무 패턴으로 마감한 따뜻한 로비.


오늘 아침 아직 어두운 새벽, 호수를 따라 달렸다.

맞바람은 칼바람.

온몸의 세포가 하나씩 깨어났다.


방으로 돌아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호수 바람이 밀려오고, 덤으로 풍욕을 했다.


동대구역에서 수서행 SRT를 예약해 두었다.

경주에서 동대구행 우등버스가 20분 간격으로 있다.

35년 만에 경주 시외버스 터미널에 왔다.


그때 나는 포항에, 그녀는 대구에 있었다.

하루는 경주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조금 일찍 터미널에 도착했다.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삼십 분이 더 지났다.

배차 간격이 20분, 30분.

그날 따라 사람이 많아 다음 차로 밀렸을 수도 있었다.

교통사고로 길이 좀 막혔을 수도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났다.

무슨 사정이 있는 걸까.

아예 출발을 못했나.

기숙사로 돌아가서 물어볼까 하다

조금만 더 기다리기로 했다.


두 시간이 지났을 즈음,

버스에서 그녀가 내렸다.

포항에서 오는 버스였다.


몸을 조금 비틀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눈을 들어 나를 봤다.

조심스럽게 걸어왔다.


나는 그냥 웃으며 바라봤다.


대구–포항행 버스는

경주를 들르는 노선도 있고

무정차로 가는 노선도 있었다.

그녀는 잘못 탄 채 포항까지 갔다가

다시 경주행 버스를 타고 돌아온 것이었다.


더 나쁜 경우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돌아가지 않은 나를 보고

더 반가워했고, 더 미안해했다.

그때의 눈빛이 아직도 남아 있다.


요즘은 휴대폰으로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을 서로 공유한다.


그땐 그런 것이 없었다.

기다리거나, 엇갈리거나.


인내의 단위가 지금과는 달랐다.

우직함만으로

믿음을 실천할 수 있던 시대였다.


수십 년이 흘러

그곳을 다시 찾았다.

우리의 시간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당연히 변했을 그곳이지만

그래도

한번은 가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