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첫 번째 판단

by 고병철
고민하는 여자.jpg 이미지 출처 : http://www.hidoc.co.kr/news/interviewncolumn/item/C0000005861


통신사가 치열하게 경쟁했다. 기지국도 많이 세웠다. 중계기도 웬만큼 깔았다. 부가 서비스로 차별화 경쟁했다. 통신사가 단말기를 사서, 몇 년 요금 약정으로 묶어서 팔았다. 카메라 화소로 경쟁하고, 디자인으로 경쟁하고. 단말기가 쏟아졌다. 한해에 100여 종을 만드는 회사도 있었다.


단말기를 개발할 때 통신망과 잘 연동하는지 테스트해야 한다. 시그널을 잘 잡는지, 잘 내보내는지 측정한다. 이 장비 시장이 쏠쏠했다. 유명한 강소 벤처가 이미 코스닥에 상장해 있었다.


출자자가 후발업체를 추천했다. 협력업체를 줄 세우던 시절이라 통신사 각각 업체가 필요했다. 데이터 시그널 처리에 강하다 했다. 음성에서 데이터로 넘어가던 시절, 통신사 담당자도 좋다 했다. 판을 바꿀 수도 있겠다 싶었다. 사무실이 양재천 주변에 있었다. 아담하고 볕이 잘 들어왔다. 사장님은 성실했다. 지인을 만났다. 그 강소기업 초기 멤버였다. 자기 회사와 비교가 안된다 했다. 아직은 열세구나 그런 정도로 생각했다. 주목적 투자에 그만한 투자기회도 없었다.


사업구도는 바뀌지 않았다. 통신사들은 이제 투자를 주저했다. 해외 진출은 아직이었다. 녹녹치 않았다. 사장님은 늘 성실했다. 회사가 기울지 않고, 작지만 흑자를 이어갔다. 사장님은 크게 성공하지 못해 미안하다 했다.


조합 만기 전에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도록 사장님이 도와주셨다. 실패한 투자도, 성공한 투자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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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복기해 봤다. 분명 지인 이야기에 고민도 했는데, 어떻게 투자까지 이어졌지? 그 이야기를 먼저 들었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딜을 했을까? 지금은 달랐을 것 같다.


사실 지인 이야기를 듣기 전에도, 여러 정황으로 불리한 점을 알았다. 긍정적인 면을 더 크게 봤고, 결정한 빌미를 찾고 있었다. 특수 목적 펀드에 마땅한 투자처도 없는데 뭘. 이거였다. 사장님까지 성실하고.


대부분 사람은, 어떤 이유든 한번 결정을 내리면, 말했다면, 잘 바꾸지 않는다. 바꾸질 못한다. 내심 불안한 결정이, 자칫 고집으로, 돌이키기 어렵게 된다. 투자에서는 특히, 결과는 몇 년 뒤에 나오고, 당장에 그건 안된다고 증명도 안된다. 외부의 힘으로는 더 어렵다.


섣부른 판단은 금물인데, 중요한 건은 시간이 없다. 최종 판단이 되기 십상인 첫 번째 판단이 중요하다. 순간이면 직관이다. 좋은 첫 번째 판단, 직관은 거저 얻어지지 않는다. 많은 실전과 시행착오, 복기, 반성, 노력으로 몸과 마음에서 베어 나온다. 지루한 노력으로. 뚝 떨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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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투자기업이 근처에 있다. 사춘기 애 키우던 고민 나누던 사장님은 여전히 성실하시다. 어설펐던 투자였는데, 완전한 실패가 되지는 않았다. 난 운 좋은 투자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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