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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뿔 Dec 29. 2020

생각의 지도

앎의 확장 

모르는 곳을 찾아가기 위해 그 곳에 있는 친구와 전화로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 친구 역시 내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할때 서로의 이야기는 과녁없는 화살이 되어 서로를 통과하게 됩니다.

내가 서있는 이 지점은 상대가 알지 못하고 상대가 있는 그곳은 내가 알지 못하기에 두 사람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릴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때 상대의 옆에 있던 길을 아는 사람이 전화를 바꿔달라고 합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있는 장소를 설명하는 대신 내가 알 만한 장소를 댑니다.

처음 한 두 번은 여전히 모르는 장소일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이 내가 아는 장소를 이야기하는 순간

상황은 종결됩니다. 

서로 아는 지점을 찾았기 때문에 그곳에서부터 상대가 있는 장소를 설명하는 것이 

더 이상 모호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랜드마크는 그래서 중요한 것같습니다.

모두에게 익히 알려진 장소이기에 길을 찾을 때 유용하게 쓰입니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작가는 독자에게 이미 알려져있는 장소를 택해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독자가 ‘아! 나 여기 알아’ 라고 자각하는 순간 독서는 유희가 됩니다.     


고전의 경우는 약간 문제가 있습니다. 

그 시대의 독자는 충분히 이해하고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른 지금 독자의 눈높이에서 작가가 설정한 랜드마크가 보이지 않을 때 고전은 어려워집니다. 고전이 씌어졌던 시기의 랜드마크에 익숙해 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비록 고전이 아니라 해도 작가가 생각하는 랜드마크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마찬가지 결과가 될 것입니다.      

사람의 내면을 탐구하는 책-추리소설에서부터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 등에 이르기까지-을 읽을 때 우리의 내면의 한 지점을 알고 있다면 그 지점에 대해 작가가 이야기하는 순간 공감이 커질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 속에서 랜드마크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랜드마크를 찾고나서 우리가 어디로 향하고 있었음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내가 알고있던 지평을 떠나 새로운 세계로 향하던 중이라는 사실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바라보면 순간 멍해집니다.

생각이란 것은 늘 대상을 향해 있기 마련인데 갑자기 그 대상을 자신으로 돌린 꼴입니다.

알아차리는 것이 인식인데 이 알아차리는 자체를 인식하려는 순간 멍해지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를 둘러보면, 그 순간에는 아무런 감도 잡히지 않지요. 하지만 말입니다. 시간이 지나 우리가 있던 곳을 되돌아보면, 하나의 패턴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같습니다. 바로 그 패턴에 비춰 앞을 보면, 때때로 무언가를 파악하게 되지요.”     

                                            선禪과 모터사이클관리술  -가치에 대한 탐구-  로버트 M 피어시그  p303     


지도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길을 가려고 할 때 필요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이 이전에 가보지 않았던 길이고

내가 몰랐던 무언가를 알고자 할 때 지도의 중요성이 부각됩니다.


1492년 콜럼버스가 북아메리카에 도착한 해에 마르틴 베하임에 의해 제작된 지구의.  

오늘날의 세계지도는 근세 유럽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오스만제국이 강성해지면서 동양으로 가는 육로가 막히자 바다를 건너서 동양에 가겠다는 발상이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대항해시대의 시작이지요....

근대 유럽의 세계지도는 미지의 세계를 항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전에 가보지 못했던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공포와 불안 두려움을 수반하게 됩니다. 


외다리 항해사 실버가 인상적이었던 소설 보물섬(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저)을 보면 주인공 짐이 갑판에 놓인 사과통에 숨어서 해적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장면이 나옵니다.

갑판에 놓인 사과통(장기간 보존하기 위해 소금에 절인 사과를 넣어두었다)을 두고 선원들이 수시로 사과를 먹게 하는 관행은 무지를 극복하는 상징입니다.  항해시대 초기에는 오랜 선상생활동안 과일이나 채소의 섭취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괴혈병이 창궐했다고 합니다. 많은 희생자를 내고나서야 비타민이라는 존재를 알게 되고 장거리항해에는 과일을 의무적으로 먹게 했던 것입니다. 괴혈병은 하나의 사례일 뿐입니다. 이전에 해보지 않았던 일을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시행착오를 겪게 되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완성되는 것이 해도와 항해일지 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져 있는 메르카토르 도법은 둥그런 지구를 평면으로 표현하기 위해 지구를 감싸는 원통형의 투시기법을 적용한 것입니다.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그린 지도는 정확성이 높아서 이 지도를 가지고 대양을 건너는 일이 가능해졌다고 합니다.

물론 이 지도만 가지고는 먼 대양을 항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확한 해도가 있다하더라도 아무런 표식도 없는 망망대해를 건너기 위해서는 현재 자신의 선박이 있는 위치를 해도의 도면위에서 지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이 작업을 위해서 발명된 것이 선박용 정밀시계인 크로노미터입니다.)  바다위에서 경도의 위치를 파악하기가 어렵고 따라서 자신의 배가 지도상의 어느 점을 통과하는 지 알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 항로를 무사히 다녀온 선장의 항해일지는 장거리항해의 필수품이었습니다.


이미 먼저 무사히 다녀온 사람의 항해일지가 있다면 그 일지에 따라 같은 방향으로 같은 속도로 나아가면서 같은 시각에 자신이 겪는 일을 일지와 대조해봄으로 해서 자신의 배가 항로를 이탈하지는 않았는지 여부를 확인하면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의 지도는 우리의 인식이 일상의 감각기관에 붙들려 있을 때가 아니라 과거의 반복에서 벗어나 미래의 바람직한 방향을 향해 관심을 가질 때 필요합니다. 이 때의 방향성이란 길게보면 평생에 걸쳐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일 수도 있고 짧게는 설정한 목표를 추구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장정이 길던 짧던 생각의 지도는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범선의 선장처럼 매일 항해일지를 쓰고 별을 관찰하고 해도위에 나침반과 육분의를 놓고 내가 지금 항로를 이탈하지는 않는지 살피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생각이 독도법과 다른 점은 빈 곳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지도는 주어지지 않은 정보에 대해서는 비어있습니다.

대항해시절 모험가들은 지도의 비어있는 부분을 '테라 인코그니타'라고 적고 그 영역을 줄여 갔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테라'가 땅이고 '코그니타'는 인지한다는 말이니까 미지의 땅 정도로 새길 수 있습니다.

미지의 땅이라고 이름붙여진 순간 가서 확인하고 밝혀내야 하는 땅으로 인식된 것입니다.


의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비어있는 항목을  채워넣지 않으면 비어있는대로 의식은 앎을 구성합니다.

'내가 이 항목에 대해 아는 것이 없구나! 이 부분을 마저 채워야 겠다.' 라고 의식하지 않고 대상을 전체로 뭉뚱거려서 이해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책이 잘읽어지지 않고 막히는 것에는 내가 읽고있는 내용을 모르겠다는 느낌이 자리잡고있습니다. 무언가 알고있다는 생각이 들 때 이해가 되기 시작하고 책을 읽는 것에 대한 흥미와 속도가 붙는 법입니다. 반대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면 책을 읽어나갈 수가 없게 됩니다.


다음 글을 멈추지 말고 찬찬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신문이 잡지보다 낫다. 해변이 거리보다 나은 장소다. 처음에는 걷기보다 뛰기 낫다. 아마 여러번 시도해야 할 것이다. 어떤 기술이 필요하지만 배우기 쉽다. 어린 아이들도 즐길 수 있다. 일단 성공하면 말썽은 거의 없다. 새들이 지나치게 접근하는 일은 별로 없다. 그러나 비는 매우 빠르게 스며든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것을 해도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한 사람에게 많은 공간이 필요하다. 말썽이 없다면 매우 평화로울 수도 있다. 돌멩이가 닻이 되어 줄 것이다. 그러나 물건들이 거기서 풀려나가면 다시는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다.


문장이 연결이 되지 않고 이해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어쩌면 자신이 모르는 분야의 책들 특히 철학책이나 인문학서적을 읽으려고 할 때 막히는 느낌보다 더 말도 안되는 글이라고 생각하고 짜증이 날 수도 있습니다.


이제 한 단어를 제시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지켜보라.

연(kite)!  단락을 다시 읽으면서, 뭔가 마땅치 않았던 이전의 불편함이 옳다는 쾌감으로 옮겨가는 것을 느껴보라.  모든 것이 들어맞는다. 모든 문장이 제구실을 하고 의미가 있다. 단락을 한 번 더  다시 읽으라. 이해할 수 없다는 느낌을 다시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각의 한계   로버트 버튼  p20 


길을 묻는 사람과 길을 설명하는 사람이 같이 아는 장소가 나왔을 때 우리는 우리가 서있는 지점과 목적지 둘다를 인식하게 됩니다. 책을 읽을 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문득 고개를 들고 '이거 나 알아'라고 말하고싶은 순간 있습니다. 그때부터 모든 문장들이 일련의 의미로 꿰어져 있음을 이해하면서 읽어나갈 수 있습니다. 


이 순간 내가 가진 통찰력을 필자는 '책을 읽어내는 힘'이라고 부릅니다.

언뜻 보기에는 말도 안되는 문장이 '연'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해서 기적처럼 정돈되는 심상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읽고 싶은 책을 읽다가 막혔을 때 다시 앞줄을 읽기도 하고 작가의 머릿말이나 후기를 보면서 되씹고 인터넷에서 감상을 찾아보면서 눈앞이 트이듯이 막힌 구절을 읽어나간 경험이 있는 사람은 책을 읽어내는 힘을 가진 사람입니다.


'책을 읽어내는 힘'은  어떤 책을 읽고자 하는가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이미 잘 알고 있는 부분에 대해 쓴 책을 읽는 경우라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점검하고 언론과 주변 사람들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진실을 판단하기 위한 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면 읽어야 하는 고전들이라면 문제는 달라질 것입니다.

바로 나의 생각과 논리를 바로잡기 위해 읽어야 하는 책들이 있습니다.

고전이나 인문학 도서들입니다.

이런 류의 책을 읽기 위해서는 커다란 생각의 그림을 그릴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생각에 공간이나 좌표가 있지는 않습니다.

생각을 공간화한다는 것은 결국 사물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의미를 내 머리속에서 재배열하는 것입니다.

독서는 연상력이 좌우합니다.

그 연상력은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의미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길러집니다.

단어와 문장의 맥락속에서 의미가 새롭게 조합되면서 머리속에 이전에 없었던 의미 관계 조합이 형성됩니다.


여기서 의식은 다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기억은 데이터를 저장하고 불러옵니다.

사유는 의식이 특정한 흐름 속에서 새롭게 알아차리는 과정 즉, 새로운 지각이나 관념에 대해 기존의 나의 심상을 분류하고 재배치하는 작업을 말합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앎이나 해석들 그러니까 대상을 지각하기 위해 필요한 배경지식들을 필요로 합니다.  새로운 앎을 익히기 어려운 것은 새로운 감각과 관념에 연결되는 기존의 배경지식들이 부족해서 생각의 지도위에 관계의 좌표를 설정하는 것이 어렵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스키마’(schema)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기억 속에 저장된 지식입니다.

우리의 머릿속에는 많은 지식이 저장되어 있으며 이 지식들이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정보를 이해하고자 할 때 또는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불러내고자 할 때 이 스키마의 작용이 관련됩니다. 이때 스키마는 특정분야에 대한 지식, 종교나 관습에 관한 지식 및 일상사의 여러 사건이나 사물에 대한 구조화된 세상 지식을 포함합니다.

피아제에 의하면 스키마는 새로운 경험을 기존의 스키마에 동화하거나, 새로운 경험에 맞춰 기존의 스키마를 조절하는 과정을 거쳐 수정되고 변화된다고 합니다.     

또한 기존의 배경지식이 잘못되었다면 생각의 지도상에서의 좌표는 잘못될 수 밖에 없는데 이 지도는 의식의 특성상 잘못된 채로 완전한 의식체계를 구성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도라면 비어있어야 한 공백이 잘못된 좌표에 의해 사실과 다르게 채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우리는 편견이나 선입관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물과 사건들은 사실이라는 거대하고 단단해 보이는  일상의 반복속에서 서로 연결되어있습니다. 이 연결은 느슨할 수도 있고 한 다리 건너서일 수도 있는 그런 관계들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기존의 앎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 앎이란 단순히 보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계에 대한 해석이 개입된 앎이므로 그 해석을 인지하지 못하면 사물을 올바로 볼 수 없다고 했었습니다.

우리가 앎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이 해석들을 편집가능한 형태로 바꾸어야 만 합니다.     


작가는 글을 쓸 때 모든 것을 지어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소설에는 수많은 설정들이 깔려있습니다.

등장인물, 배경, 이전의 스토리(시작하는 시점에는 항상 그 전의 역사가 있지요) 사건들....

개연성을 가진 스토리를 전개하기 위해서는 현실에서 아니 실제 있었던 일에서 수 많은 설정을 빌려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의 사건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디테일들을 일일이 셋팅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영화의 내용이 사실처럼 여겨지는 것은 바로 저러한 설정들이 알게 모르게 관객들의 눈과 귀에 노출되고 축적되는 까닭입니다. 관객들은 처음에는 영화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으므로 팝콘도 먹고 옆 사람과 대화도 하지만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사실의 축적과 이야기의 전개에 빠지게 되면 바로 눈앞에 일어나는 현실처럼 숨을 죽이고 지켜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의 지도를 구성하는 수많은 설정들은 이미 일상의 반복되는 경험을 통해서 축적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엇갈린 설정과 상이한 경험으로 정의되지 않은 감정들이나 정보들이 무의식의 영역에 ‘테라 인코그니타’(Terra Inconita)로 자리잡고 있을 뿐입니다. 


앎을 확장한다는 것은 지각을 깨어나게 하고 이미 습득한 것을 다시 분류하여 자신의 생각의 지도에 좌표로 기입하는 일일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영어단어를 외우거나 발생연도를 암기하는 식으로 진행될 수 없습니다.

세계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지금과는 달랐을 당시의 상황을 재연하고 그런 조건에서 ‘지(知)’가 발현해가는 과정을 추적하면서 새로이 진실의 인과를 새겨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우리는 근대이전의 역사로부터 단절되었습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단군신화도 알고 고구려 백제 신라도 아는데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져서 대한민국으로 온 것이 아닌가? 무엇이 단절되었다는 것인가?     


필자는 걷는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평발에 가까운 편평족이라는 특이한 발을 가지고 태어나서 책읽는 것처럼 앉아서 하는 것을 좋아했던 필자는 걷는 즐거움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몸을 읽고 관찰하는 단계에 이르러 팔자로 걷고 종아리근육으로 힘을 썼던 것을 일자 걸음과 고관절 중심의 이른바 코어근육을 움직이는 걸음으로 바꾸게 되면서 걷는 것이 즐거워졌습니다. 걷는 동작 자체에도 수많은 경험의 반복을 통해 지혜가 쌓인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차가 없던 시절 우리 조상들은 한양 천리길을 걸어서 다녔습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한번 가는데 일주일 가량 걸렸다고 합니다. 오고가고 서울서 일보고 하다보면 한달이 걸리는 기간이었습니다. 날이 저물면 주막에서 자고 호롱불아래서 미투리를 삼아서 신발을 보충하면서 종일 걷고 걸어서 갔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때 어떻게 걸으면 피로가 덜한지 발은 어떻게 놀려야 하는 지에 대해 조상들이 가졌던 생각을 알지 못합니다. 너도 나도 다 아는 내용이라 글로 써서 남길 생각을 못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입니다. 어느순간에 갑작스런 변화로 그렇게 멀리 걸어다닐 일도 없어지고 난리도 겪고 하면서 어떻게 걸어야 오래 걸을 수 있는지,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보폭은 어떻고 무게중심은 어떻게 배분하는지에 대한 지혜들은 전해질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합니다.     


전통이 단절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정신세계는 오늘날 남겨진 책으로 접해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이어지는 서구문명의 사색의 전통은 하나의 흐름으로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리스에서 로마로 갔다가 로마의 멸망으로 인해 유럽은 잠시 암흑시대가 되었지만 아랍문명에서 다시 르네상스라는 이름으로 부활을 하게 된 정신의 흐름이 존재합니다.

이 흐름이 결국 오늘날의 세계문명을 지탱하는 근간이 되고 있습니다.

필자는 이러한 흐름을 통해 생각의 지도를 그려나가려고 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역사나 세계사가 아니라 '왜'라는 의문과 그 해답을 찾으려는 노력을 통해  좌표들이 설정되리라고 믿습니다. 


저명한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과 레오나드 믈로디노프가 함께 집필한 책 '위대한 설계'를 보면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왜 무(無)가 아니라 무엇인가가 있을까? 

왜 우리가 있을까?

왜 다른 법칙이 아니라 이 특정한 법칙들이 있을까 ?


이 원초적이고 거대한 질문에 감히 답을 못하겠지만 서양문명이 왜 오늘날의 주류가 되었고 그리스 문명이 왜 그 시발점이 되었는지를 더듬어가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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