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읽기의 도구들

서문

by 무뿔

어린 시절 나는 지루함을 견디기 위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대가족 속에서 자란 나는 형제들이 학교에 간 시간 동안 집에 혼자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8살에서 9살 나이에 지루함은 견디기 힘든 감정이었고,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책속의 세상에 빠져들 수 있었다.
무엇을 읽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읽는 동안 내가 그 시간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속도광이었고, 읽기를 가속하는 동력은 줄거리였다.
다음 장면, 다음 사건, 다음 문단을 향해 시선은 멈추지 않고 이동했다.
읽기는 이해라기보다, 다양한 줄거리의 방향을 추측하고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읽는 동안 나는 많은 것을 빠르게 따라갔지만,
어떤 것들은 거의 보지 못한 채 지나쳤다.

읽을 책이 없어 좋아하는 책은 다시 읽었다.
책을 다시 읽자, 처음에는 보지 못했던 장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두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줄거리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이 오히려 다른 것들을 보게 만들었다.
결말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읽기의 속도를 늦췄고,
속도가 늦어지자 문장 사이의 간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건과 사건을 잇는 말들,
그동안 지나쳐 왔던 묘사와 어조,
인물의 행동보다 앞서 놓여 있던 미묘한 징후들이 남아 있었다.

처음 읽을 때는 줄거리를 밀어내는 힘에 가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다시 읽는 순간, 썰물의 바닥처럼 드러났다.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야기 주변의 인물들이나 복선은 읽을 때마다 다르게 보였다.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줄거리에만 몰두하며 읽었던 책들과 달리,
나의 생각과 함께 읽어간 책들은 오래 남는다는 것을.

그런 책은 많지 않았다.
읽는 나의 속도와 사고에 맞춰지지 않은 책들은
끝까지 읽고 나서도 쉽게 흩어졌다.
노력하지 않고 얻어지는 책은 없다는 사실도 그때 함께 알게 되었다.

왜 그런 책들이 희소한지, 이제는 알 것 같다.
그것이 바로 책을 읽어내야 하는 이유다.
책을 읽기만 할 때, 좋은 책과의 만남은 결국 운에 맡겨진다.

하지만 읽어지지 않는 책이라 하더라도
적절한 도구를 통해 접근하기 시작하면 그 책은 더 이상 닫힌 대상으로 남아 있지 않을 수 있다.
읽히지 않던 책이, 읽어지는 책으로 바뀌는 순간이 생기는 것이다.

책이 어렵기 때문에 멈추는 것이 아니었다.
내게 맞지 않다는 생각이 멈추게 한 것이다.
내게 맞지 않다는 감각은 살펴보면 또 다른 정보를 제공한다.

바로 내 우주안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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