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형상화 - 인식을 경험으로 번역하는 형식
우리는 매 순간 무언가를 보고, 듣고, 느끼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 모든 인식이 곧바로 나의 경험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일상에서 스쳐 지나간 수많은 말과 장면들,
그 순간에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돌아서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허망한 순간들을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이 알고 있다.
나는 오랫동안 그 차이가 주의력의 문제라고 생각해왔다.
집중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의 차이.
하지만 주의를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귀를 거쳐 지나가 버린 이웃집 아줌마의 수다처럼
내 삶의 어디에도 자리를 잡지 못하는 인식들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쉽게 설명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인식은 언제 비로소 ‘나의 경험’으로 살아나는가.
나는 그 답을 정합(coherence)과 형상화의 관계에서 찾게 되었다.
인식론에서 말하는 정합이란
새로운 지식이 기존의 인식 체계와
어긋남 없이 맞아떨어지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독서의 자리에서, 그리고 삶의 자리에서 이 정합은 논리적 판단의 결과로 도달하기보다는
어떤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는 방식으로 먼저 감지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무언가를 진정으로 “알았다”고 느끼는 순간을 떠올려보자.
그 순간은 대개 바깥에서 마주한 사물이나 문장이 내 안에 이미 존재하던 형상과 맞물리며,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건 틀릴 수 없다”고 느껴지는 직관의 형태로 도착한다.
앞서 패턴 인식의 끝에서 언급했던
‘홀깃 봄(Glimpse)’— 전체가 한순간 스치듯 드러나는 그 찰나의 감각—은 이때 내면의 지형과 결합하며
하나의 안정된 형태로 자리 잡는다.
이 과정이 바로 형상화다.
이 지점에서 형상화는 상상력을 발휘하거나 이미지를 떠올리는 기교를 넘어서 인지와 사유의 문턱에서
새로운 의미를 받아들이는 형식(form)이 된다.
형태 없는 의미는 그 자체로는 오래 머무를 수 없다.
그 의미를 담아낼 형식이 마련될 때에야 비로소 내 인식 안에서 자리를 얻는다.
형상화라는 형식을 거치지 못한 인식은 개념으로는 이해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경험으로는 정착되지 못한 채 흩어진다.
반대로 형상화가 일어나는 순간, 외부의 자극은 내 지식과 감정, 기억의 맥락 속으로 편입되어
‘나의 경험’이라는 고유한 의미로 번역된다.
결국 읽어낸다는 것은 찰나의 패턴을 포착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의미를 자신만의 형상으로 빚어내는 일이다.
형상화는
내가 이미 알고 있던 것들과 바깥에서 마주한 낯선 것을 결합하여
새로운 세계를 수용하게 만드는 가장 능동적인 인식의 형식이다.
이 형식을 통해서만
타인의 글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나의 삶 안으로 들어오는 경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