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의 도구들

9. 형상화와 인지 체계 ― 인디언의 사례를 통해

by 무뿔

앞서 형상화가 능동적인 인식의 형식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형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인식의 형식을 갖춘다는 것은 단순히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낯선 외부의 자극이 내 삶의 경험으로 입주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다.

형상화는 특정한 독서 기술이거나 상상력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인지 체계가 외부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흔히 인지가 감각의 입력과

개념적 판단으로 이루어진 과정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사이에 하나의 중요한 단계가 존재한다.

바로 감각과 개념이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과정이다.


인류학과 인식론 논의에서 자주 언급되는 사례 중 하나로,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바다에 나타난 스페인의 범선을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거나 알아보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종종

“그들은 배를 보지 못했다”는 식으로

과장되거나 단정적으로 전해지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역사적 증거는 없다.


보다 신중한 해석은 이렇다.

그들은 분명히 바다 위의 이상한 대상들을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것을 ‘배’라는 하나의 의미 있는 전체로,

즉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형상화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이는 시각의 문제가 아니라 인지의 문제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형상화의 문제다.

형상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인식은

감각 자극으로는 들어오지만 의미로는 정착되지 못한다.

부분적인 인상이나 낯섦, “뭔가 이상하다”는 감각만 남을 뿐,

그 대상이 무엇인지, 어떤 범주에 놓아야 하는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는다.


이 상태에서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지부조화조차 완전한 형태로 발생하지 않는다.

인지부조화란 보통 기존의 믿음과 새로운 정보가 충돌할 때 생기는 불편함을 가리키지만,

형상화 이전의 단계에서는 아직 충돌할 만한 ‘의미 있는 대상’ 자체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의 상태는 갈등이라기보다 판단이 보류된 채 멈춰 있는 인식에 가깝다.


형상화가 일어나는 순간, 상황은 달라진다.

흩어져 있던 감각들이 하나의 전체로 묶이고,

그 대상은 비로소 인지 체계 안에서 자리를 얻게 된다.

그제서야 우리는

두려움, 위협, 경이로움, 의심과 같은 반응을 보일 수 있고,

해석과 판단, 나아가 인식의 부조화 역시 가능해진다.


이 사례가 말해주는 것은 특정 집단의 인지 수준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인지 체계가 세계를 받아들이는 보편적인 조건을 보여준다.

형상화되지 않은 것은 아직 의미의 영역으로 들어오지 못하며,

의미로 들어오지 못한 것은 경험으로 살아나지 않는다.


독서에서도 마찬가지다.

문장을 눈으로 보고 내용을 이해했다고 느끼는 것과,

그 의미가 하나의 형상으로 묶여 내 인식 안에서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은 전혀 다른 단계다.

형상화는 이 둘 사이를 잇는 과정이며,

인지 체계가 새로운 대상을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 때 형상화는 의미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아니라,

의미가 인지 체계 안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자리가 마련된 이후에야 의미는 다른 장면으로 이동하고, 다른 대상과 연결되며, 확장될 수 있다.

다음 장에서 다루게 될 유추는

바로 이 형상화된 의미가

한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다른 영역으로 건너가는 인지 체계의 다음 움직임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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