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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 Jun 06. 2022

삶을 만드는 우연, 감정이 흐르는  상상

하마구치 류스케 <우연과 상상>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는 배우들이 전하는 대사의 울림으로 완성된다. 평어체로 대화가 진행되다가도 어느 순간엔 연극 속에 들어온 듯한, 관객의 감정을 보듬아주는 마법 같은 문장의 구사가 그가 가진 최고의 매력이다.

"드라이브 마이카"에서 볼 수 있던 카메라를 향한 다카스키의 독백과 설원에서 가후쿠의 고백

현재의 삶을 중요시하라는 이야기로 관객들을 위로하던 전작 '드라이브 마이 카'처럼 이번 '우연과 상상'의 이야기들 역시 관객들의 감정 속으로 유려하게 녹아내렸다. 우연이 만들어낸 상황 속에 상상을 덧붙여 완성시킨 3가지 이야기들을 마음에 완전히 스며들게 만들기 위해서, 노트북을 열고 글을 끄적여 본다.









EP1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


연인관계에서 느껴지는 애매모호한 감정. 사랑과 우정 사이를 저울질하던 우연은 애증 속에서 조금씩 타오르던 마음들을 완전히 털어놓게 만든다.

 

영화에선 배우들의 입으로 하여금 굉장히 이질적이고 직설적인 문장들이 사용된다. 전 애인의 면전에서 '넌 이제 내 것이 아니지만 누가 가져가는 건 싫어'라는 문장을 입에 담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게다가 '너와의 관계로는 욕구를 채울 수 없었어'라는 문장은 어떻고? 매몰차게 말하고 싶다가도 차마 입 밖으로는 꺼낼 수 없었던, 부끄럽고 절대로 내색할 수 없던 불편한 이야기들을 영화라는 틀을 사용하여 표현한다.

이러한 대사들은 위에서 언급했듯 영화를 연극처럼 느껴지게 바꾼다는, 길고 현학적인 대사를 이용하여 관객들에게 직접적으로 이야기한다는 점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이 사실을 증명하는 건 메이코와 카즈키의 감정으로 이어지던 대화 장면이다. 이 짧은 순간에선 그간 그들이 걸어왔던 희로애락의 시간을 되감기라도 하는 듯한, 마치 놀이기구를 타는 듯한 감정의 변화가 느껴진다.

우연이 만들어 낸 살얼음판 같은 재회, 조롱과 분노가 이어지던 대화, 진심 어린 고백 이후 눈 녹듯 사라진 앙금, 또 다른 우연으로 인한 이별의 순간 속에서, 도저히 이성적인 대화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투박한 대화 속에서 한 문장 한 문장 사무치는 대사가 관객의 귓가를 스쳐 지나가게 된다.


배우들의 연극이 끝나고 다시 영화로 돌아왔을 때 "너도 사실 이런 감정들을 가지고 있었잖아. 이별한 전 애인을 보며 질투하고, 후회하고, 울고, 원망하며 지냈잖아?"라는 무거운 질문이 관객의 진심과 마주한다. 영화는 상대뿐 아니라 나에게 말할 수 없었던 말 역시 은연중에 전해준다.

우연이 만들어낸 마법

'우연'이란 누구에게나 선물처럼 찾아오는 똑같은 기회이지만 파생되는 '상상'에선 서로 다른 각자만의 이야기들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우연이 만들어낸 마법 같은 순간은 스스로가 창조한 상상 속에서만 유효하다. 시간이 흐르고 달콤했던 상상에서 깨어난 우리가 할 일은 선택이다.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상상으로 남길지 혹은 마법 같은 상상을 현실로 이끌어 낼지.


메이코는 다시 한번 마주한 우연 속에서 결국 달콤한 상상을 포기하고 현실을 선택한다. 관객은 과거의 인연에 집착해 현재의 우정을 잃을 수 없는 메이코의 선택에 충분히 공감한다. 대부분이 쓰라린 감정을 숨기고 현실에 순응하는 삶이 현명한 삶이라고 믿고 있으니까.


하지만 선택을 끝마친 메이코의 눈앞에는 파란 하늘이 보인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무엇이든지 자유로이 그릴 수 있을듯한 청명한 하늘 아래 어떤 삶을 그려갈지는 온전히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다. 그것이 현실이든 상상이든, 당신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드넓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고 말한다.  









EP2 문은 열어둔 채로


감정적으로 비어있는 인간은 누군가에게 의지하기 마련이다. 설령 상대가 흠이 많다 할지라도, 자신을 채워줄 수 있다는 감정이 들기만 하면 몸과 마음 모두를 줘버린다. 상대를 기댈 수 있는 벽으로 삼아 안식을 찾고 집단을 거부하는 도피처로 인식한다.


영화 속의 '나오' 역시 그렇다. 조금 많은 나이와 모난 성격으로 인하여 동기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나오는 대학교 낙제생인 사사키와의 관계 속에 매달리며 살아간다. 겉으로 보기에는 수평적인 파트너 관계일 뿐 어느 한쪽이 한쪽을 갈망하는 수직적인 관계로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모난 성격을 죽이라는 사사키의 조언 이후 이어진 대화에서 이들의 관계가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지 명백히 드러난다.


오히려 상대방을 존중하라던 사사키가 나오에게 굉장히 무례하게 구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인다.

계속되는 조롱과 냉소 속에서 그녀를 성적 욕구를 처리하는 도구, 스스로의 증오를 배설하는 장난감으로 밖에 여기지 않는다는 감정이 노골적으로 보인다.


대학 낙제라는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변명과 원망 속에 열등감으로 뭉쳐진, 완전히 마음의 문을 잠가 버린 사사키란 인물은 나오에게 있어 불완전한 감정 속을 더욱더 헤매게 만드는 존재다. 그리고 그가 내뿜는 부정적인 공기는 점점 나오를 오염 시켰다. 나오가 존경하는 교수인 세가와 교수를 모함하게 만들고 그녀를 이용하여 나락을 떨어뜨리려는 모습을 보면 구역질이 절로 나오게 된다. 요즘은 이런 행동을 가스 라이팅이라고 하던가?

사사키에게 철저히 이용당하던 나오

나오는 파트너와의 관계를 통하여 일시적인 안식을 얻는다고 할지라도 결국 채워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 관계를 멈출 수 없었다. 당장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안정을 거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기에.


결국 그녀의 마음을 채워준 사람은 모두에게 문을 열어주었던, 누구에게나 마음을 열고 이야기하던 세가와 교수였다. 그는 낯부끄러운 문장을 소리 내어 읽든, 문 앞 복도로 학생들이 지나가든, 개의치 않고 문을 열어젖힌다. 이러한 행동이 그만의 습관인지 혹은 다시금 연극으로 넘어왔다는 작위적인 신호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그와 그녀의 우연적인 만남이 나오 스스로 하여금 잘못된 행동임을 자각시키고, 닫혀 있던 그녀 마음속의 문을 열 수 있게 만들었다는 건 확실하다. 꽉 막혀있는 사사키의 문이 아닌, 항상 열려있는 세가와 교수의 문을 통해서 말이다.


이제 세가와 교수는 나오를 응시 하며 그리고 관객들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말한다. 자신만의 취향을 포기하지 말고, 남들에게 미움을 받는다 할지라도 스스로에 있어 당당해지라고. 

세가와 교수를 통해 다시 한번 관객들을 마주 보며 이야기하는 류스케 감독

지금까지의 내용만 보면 나오가 외로움 속에 홀로 방치된 안타까운 존재로도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하는 건 그녀는 화목한 가족 관계를 가진 한 가정의 어머니라는 점이다.   

관객들은 세가와 교수의 위로 장면에서 잠시나마 감정을 몰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상상 속에서 깨어나 냉혹한 현실을 바라보라고 말하는 듯한 차가운 버스 안에서, 후회로 얼룩진 나오의 얼굴을 보며 이성을 되찾게 된다.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그녀는 가족을 내팽개치고 본인의 감정만을 쫓았던 불륜녀라는 사실을.

그리고 이런 위선자들의 결말을 영화에서나 현실에서나 똑같을 거라는 사실을.

 

문을 닫고 회피만 하던 나오의 인생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마찬가지로 문을 걸어 잠그고 있던 사사키의 인생 역시 여러 번의 우연 끝에 심판대 위에 오르게 되었다. 기습적인 키스 이후 깔끔히 작별하지 못하고 당황해하던 그의 표정이 흔들리는 마음을 증명한다.


이 사건이 지나가는 우연으로 끝나게 될지 아니면 작은 균열로부터 시작하는 복수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미래이다. 하지만 문을 닫고 도망만 다니며, 순간의 쾌락에 점철되어 감정의 자기 위로에만 빠져있는 인간의 이야기가 어떤 결말로 끝맺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다.   









EP3 다시 한번


무미건조한 전자메일의 텍스트가 꾹꾹 눌러쓴 손 편지로 바뀌었을 때 피어나는 감정들. 그리고 그런 감정 덕에 마주할 수 있던 인연.

우리는 눈과 눈이 마주한 순간, 서로가 서로를 대면한 순간의 소중함을 잊고 살아간다.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누군가로 착각하는 상황은 요즘 시대에선 겪을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착각한다 한들 스마트폰을 헤집으며 과거를 따라가다 보면 진실이 드러나게 돼있다. 만약 전자기기가 살아 있는 상황이었다면(마치 현시대처럼) 나츠코와 아야 모두 어색한 사과 이후 아무 일도 없는 듯 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착각이라는 우연이 두 사람 사이에 만들어낸 일들을 생각해 보자. 그녀들을 한 집에 불러 모았고, 과거의 추억들을 끄집어내게 했으며, 가슴속에 묻어놨던 진심을 꺼내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서로에게 있어 소중한 친구를 만들어 주었다. 하나하나가 현대인 대부분이 성취하기를 소망하는 귀중한 경험들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이러한 경험을 얻어내기 위해 멈추지 않고 전자기기를 들여다본다. 누군가와 만나기 위해 연락처를 뒤지고, 과거의 추억을 찾기 위해서 갤러리를 넘겨보며, 진심을 표출하기 위해 익명의 커뮤니티에 글을 쓰고, 친구를 만들기 위해 sns를 이용한다. 그러고는 너무나 성취하기 힘들다고 우울해한다.


어째서 사회가 이렇게 변해가는 걸까? 코로나라는 팬데믹이 이런 현상을 더욱더 부추겼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더 이상 누군가와 직접 마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며, 만들어내는 모든 감정을 액정 속의 세상으로 공유하는데 집중한다. 놀라운 일이 일어나도, 화나는 일이 일어나도, 면대면의 대화보다는 랜선 사이의 대화에 집중되는 게 당연한 일상이 돼버렸다.


이런 삶을 살아가며 우리가 놓쳐버리는 감정들은 이곳저곳에서 넘쳐흐르고 있다. 원인을 확실하게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귀찮음이란 이유로 애써 모른 척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성취를 위해 해야 할 일은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는 게 아닌, 흘러버리는 감정의 구멍을 메우는 일이다.

결국 스마트폰만을 들여다보지 말고 직접 누군가와 만나고, 대화하며, 감정의 나눔이야말로 이런 경험을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말한다.

대화가 이어준 인연

그리고 이어지던 역할 놀이는 영화 속 세 가지 에피소드 중 가장 따뜻하고 밝은 연출로 묘사된다. 앞의 두 가지 이야기는 우리를 위로하는 듯한 연출 속에서 한편으론 가슴 아프고, 한편으론 서늘한 이야기가 숨겨저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마음의 부담 없이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부록이 되어줬다. 스크린 속 그녀들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난 이후로 관객 모두의 얼굴에서  역시 미소가 끊이지 않는다. 어쩌면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마음을 간질이는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펼쳐 보임으로써 전자기기를 덮고 현실로 걸어 나오도록 말이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오르고, 앞으로 삶을 살아가며 마주치는 수많은 우연들은 우리를 다양한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우연에 생겨나는 오만가지 감정들 속에서 어떤 감정을 무시하고 어떤 감정을 받아들일지는 우리의 상상에 달려있다.

이 영화는 그런 길들을 살짝 엿보게 해 주었을 뿐이다. 물론 스스로 선택하는 길에 완벽한 정답이란 존재할 수 없지만, 어쩌면 비슷한 이야기로 고민하는 관객들에게 좋은 조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이 영화를 통해 위로받을 수 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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